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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2 성령강림후 15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9. 9. 20. 19:51
성서일과
1독서 | 예레미야 8:18 ~ 9:1
2독서 | 디모데전서 2:1 ~ 7
3독서 | 누가복음 16:1 ~ 13
응 송 | 시편 79:1 ~ 9 또는 113편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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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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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들이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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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뉴스를 보니 31명이 임대주택 1만1천채를 소유하고 있고, 그 중에 1위는 무려 594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건 부럼움의 정도를 뛰어넘는 모두가 무언가의 광기에 내몰려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만큼 아득합니다. 아마도 마지막이라 불리게 될 그 날까지 계속해서 더 많이 가지고 쌓아두는 일에만 온 마음과 영혼을 쏟아붓게 될 것입니다. ‘과연 그 이들은 그처럼 많은 재산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을까 ? 이 땅을 떠나야 할 때, 한평의 땅도 소유할 수 없는 우리인데, 무엇이 그런 소유의 집착으로 내몰았을까 ?’ 부질없는 의문을 가져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을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을 부인할 수 없는 우리입니다. 그리고 현실과 조우할 때마다, 나는 왜 ? 저렇게 살 수 없는가? 하는 아픈 마음에 낙망하거나, 혹은 이렇게 만든 세상을 향한 분노와 증오를 키워가기도 합니다. 슬프지만 우린 모두 이렇게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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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성경본문, 그것도 예수님의 말씀속에서 마치 세속의 성공 신화를 부추기는 듯한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_ 8b
마치 너희도 세상 살이할 때는 좀 지혜롭게 살아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그렇지 못해, 어리숙하고, 아둔하게 살아가는 우리 마음이 편치 못하게 됩니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도 너희는 세상을 본받지 말고, 이렇게 살아라’ 하시면 조금은 위안이라도 될텐데 말입니다. 대체, 주님은 이 세대의 아들들의 무엇을 칭한하시는 것일까요 ?
주어진 본문을 보면, 주인의 소유와 재산을 낭비하던 청지기가 등장합니다. 불성실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주인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것입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는데 누군가의 고발로 주인은 그 사실을 알아버렸고, 그에게 해고를 통지했습니다 _2절
하루 아침에 좇겨나게 되었는데, 청지기로만 살아왔던 탓에, 버거운 일을 해낼 힘도 없고, 별스런 재간도 없으니 막막했을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곰곰히 생각하며 밤을 지세웠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하튼 그가 찾아낸 묘책은 주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채무자들을 주인 몰래 만나는 것! 이었습니다. 이쯤되면, 아마도 ‘그가 주인이 받아야할 몫의 채무를 몽땅 변제받고 도망이라도 가려는가 ?’ 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대와는 달리, 그는 채무자들의 채무를 임의로 탕감해 주인이 가지고 있는 채권증서를 위조합니다.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셈입니다. 자신을 내어 좇는 주인을 향한 앙갚음이라도 하는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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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후의 말씀을 좀 더 읽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_9절
여기에서 ‘내가’는 예수님이고, ‘너희’는 1절을 보니 ‘제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이라 씌여진 14절을 보면, 16장에 들어서 전하신 이 비유의 말씀은 세리와 제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다가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마도 그들 무리 중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예수의 제자의 삶을 통해 바리새인들의 이중적이고 그릇된 삶을 고발하시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이 특별한 메시지 전달을 목적으로하는 ‘비유’라는 사실과 또한 말씀의 수신자가 제자들이니 반드시 신앙적 차원에서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고 배임행위를 한 옳지 않은 청지기의 도덕성이나 윤리적인 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적어도 신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청지기의 행위 자체도 비난받아야 할 불법은 아닙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지주와 땅을 빌어 쓰는 이들 사이의 통용되던 이자율이 50 ~ 100%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율법에서도 금하고 있는 엄청난 고리입니다. 어쩌면 그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청지기의 행동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관행처럼 고리대가 통용되던 당시의 삶을 율법의 취지에 맞게 되돌린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본문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청지기의 행위나 예수의 말씀이 ‘옳으냐 ?’, ‘아니냐 ?’ 가 아닌,
‘대체 왜 ? 청지기가 이렇게 처신하였는가 ? 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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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지기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자신의 지위와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절박성’에서 비롯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임박한 ? 종말을 준비하는 ‘청지기’처럼 임박한 종말,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자신의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단호하게 선택하고 행동할 것을 원하십니다. 너무 늦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예수님으로부터 긴박하고 절박한 청지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자들은, 비교적 쉽게 ‘임박한 종말’을 대면하고 있는 자신들의 제자로서의 삶과 죽음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종말은 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마치 청지기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과 같은 운명의 날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좇겨나는 그때, 자신이 채무를 탕감해준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주거나 받아줄 것을 기대했을 뿐이었는데, 주님은 9절의 후반절에서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지체없이 결단했던 그의 행위를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영원한 집)로 영접하리라’ 라는 조금은 뜬금없는 결과로 연결시킵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채무자들의 채무를 탕감해준 것이 영원한 집을 준비하는 것이다 ! 그래도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직면했던 절박성을 중심으로 이 이야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절박성이 청지기로 하여금 자신을 구원할 것으로 믿었던 것에 모든 것을 걸도록 해주었습니다. 낭비하며 살던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던 자신을 구원해내줄 소중한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종말 앞에 선 청지기처럼, 우리도 죽음앞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내일을, 미래를 장담해줄 수 없습니다. 평생을 노력하던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지금 부여잡고 있는 것들 중에 어떤 것도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그런 것에 모든 것을 걸어두는 사람은 결국 훨씬 큰 절망감과 상실감에 휩싸이게 되는 것임을 인간의 삶이 보여줍니다. 그래서 복음은 스스로 업적이나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시도들, 만족하거나, 낙담하고 절망하는 모든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내가 행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진 것으로 나를 구원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붙잡지 못하게 하는 파괴적인 힘입니다. 대체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불현듯 임할 종말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죽음’이나, 우주적 ‘종말’의 때에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주시는 분은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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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할 것만 같아 보였지만 결국은 모두 내려 놓아야만하는 자신의 운명을 직면하였을 때, 그는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것을 멈추었고,, 지금까지 그의 정신을 빼앗아 갔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졌습니다. 종말은 그의 삶의 분주했던 모든 것을 제거해버렸습니다.
우리는 내 발 앞에 ‘종말’의 그 날이 미치기 이전까지는, 그런 날은 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남의 이야기라 관심없이 외면하며 살던 문제가 어느날 내 이야기가 되었을 때 여유를 잃고, 갑작스레 찾아온 낯설은 삶앞에서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이유는 지금의 삶이, 지금의 내 형편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서부터 비롯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 오지도 않은 문제 때문에는 그렇게 염려하고, 또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위해 적금이나 보험을, 투자를 하고, ‘성공’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기를 쓰고 공부하고, 애를 쓰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참 이상하기만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보이질 않습니다. 우리는 생명과 연관된 것을 분별하지도, 선택하지도 못합니다. 우리 삶을 지탱해줄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에 너무 많은 삶을 소비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임박한 종말을 바라보며 사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투쟁하듯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것들은 ‘끝’이 있음을 염두하고 볼 때, ‘종말’ 의 시야안에서 바라볼 때야 비로서 ‘상대화’하고 ‘객관화’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야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지, 무엇이 생명을 살려내는 것인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땅히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죽을 것만 같은 문제도, 이런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혹은 반대로, 뭐가 중요하느냐? 묻던 그런 문제가 실은 너무나 중요한 것으로 발견되기도 합니다. 자신이 이런 운명안에 있음을 깨달은 사람은 내일의 안식과 평안을 줄 수 있는 본질적인 구원을 갈망하게 됩니다. 다른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릴적 그렇게 갖고 싶었던 것들이, 어느새 성장하고 보면 유치하게만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도 이와 같은 문제입니다.
예레미야의 시대, 종말을 바라보며 외치던 예레미야도 있었지만, 믿음이 없어, 임박한 날을 보지 못한 채, 해야할 것을 선택하지 못해 망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삶이 괜찮은 것 같고, 좋은 것 처럼 보이더라도 결국은 패망함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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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을 다시 봅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
본래 돈이나 재물은 선이나 악이 아닙니다. 루터는 이 불의한 재물을 불의한 ‘맘몬’이라 번역합니다. 재물이 곧 불의한 맘몬, 불의한 ‘신’이라는 해석입니다. 정확한 번역입니다. 돈이 사람보다 귀한 대접을 받는 세상이 어떻게 불의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 재물이란 사람의 삶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수단이며 도구일 뿐인데, 사람이 그 도구를 위해 헌신되어야 하고, 소비되어야 하는 세상은 결코 의로운 세상이라 할 수 없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인간 탐욕이, 사용하고 지나쳐가야할 것을 내 안에 쌓아둠으로 결국은 돈이나 재물을 ‘불의’하게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곤 어느새 ‘맘몬’이라고 하는 신이 되어버린 재물은, 도리어 우리의 시간도, 가치도, 삶도 모두 빼앗아 가버립니다.
비단 돈 뿐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결국은 잃어버리게 되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건강, 외모, 명예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은 결코 주인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잠시 있다가 지나가야할 재물이 인간의 삶에 군주처럼, 주인처럼 떠받들여지는 세상이, 그렇게 물신을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찌 악하지 않겠습니까 ?
더 많이 쟁취하고 얻어내려는 노력은 결국 맘몬이 되어서 우리를 지배하는 재물의 권세와 힘을 강화시켜줄 뿐입니다. 더 많이 가질 수록, 자유를 빼앗길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눈이 어두어지고, 귀가 닫혀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재물은 숭배의 대상이 아닌 친구를 사귀는 도구일 뿐이라는 선언이며, 결국 재물보다 사람이 귀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을 위해 재물을 사용할 수 있을 때, 재물보다 하나님이 귀하시다! 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을 경험해 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리 좋은 말씀처럼 들리워도, 우리 본성은 절대 이 반지를 빼어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맘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손을 펴야함을 알지만 막상 내 손을 펴려면 그렇게 힘이 들 수가 없습니다. 정말 죽을 것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삶에서 구원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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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임박한 종말을 목격한 순간 청지기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했습니다. 그 동안 주인의 자리를 기화로 자신만을 위해 낭비하며 살던 것들을 자신의 내일을 구원할 도구로 내어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날이 그의 새로운 선택을 만들어 낸 셈입니다.
‘임박한 종말’,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를 통해 자신을 돌아 볼 때에만, 우리 안에 지나가고 말아야 할 것들을 본래의 자리로,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결국 우리가 예배하고, 바라보고 따라야할 주인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뿐이시라는 사실을 회복해낼 수가 있게 됩니다.
2독서인 디모데서에서 바울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모든 사람을 위해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드리는 자리를 지켜내라고 전합니다. 그곳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하는 디모데가 서 있어야할 자리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함의 자리 자체가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 _(2:3) 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자리'_(2:4)입니다. 기도의 제1목적은 소원의 성취 같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타락한 재물이 신이 되고 주인행세하는 거친 세상속에서, 기도함은 다른 수단, 방법, 성취로서가 아닌,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은혜’로 살아갈 수 있다는 ‘자유선언’이 되어, 비로서 맘몬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것입니다. 기도는 진정한 주인을 믿는 이들이 영혼을 파괴하는 거짓 주인의 폭력을 무장해제시키는 유일한 능력의 자리입니다.
8
매서운 여름이 지나 선선한 가을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다시 혹독한 겨울이 찾아오겠지요. 어떤 사람은 매일 아침 저녁 선선한 공기를 마실 때마다, 어떤 이는 하늘의 높이가 변해져가는 것을 보면서, 또 어떤 이는 들꽃의 피고 지는 것들을 보면서 날의 변화를 읽어냅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이루고 소유하라고 재촉하는 세상의 시간에 몰입되어 살다보면, 계절의 변화는 그렇게 느닷없는 낯설은 장면일 뿐입니다.
이처럼 맘몬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면,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살다보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날이 찾아오고 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죽음’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십시오. ‘죽음’의 절박성은 모든 삶을 정직하고, 겸손하게 만듭니다. ‘종말’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의 삶은 정직하고, 겸손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쌓아두고자 하는 탐욕을 버리고, 하루 하루 일용할 양식에 마음을 담아낼 때, 비로서 영원한 생명으로 받아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영혼을 맞아주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어떻게 해서든 주안에서 살아내는 것 외에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지나갈 것들일 뿐입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붋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_이사야 40:6~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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