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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9 성령강림후 16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9. 9. 27. 00:20
성서일과
1독서 | 예레미야 32:1 ~ 63a, 6 ~ 15
2독서 | 디모데전서 6:6 ~ 19
3독서 | 누가복음 16:19 ~ 31
응 송 | 시편 91:1 ~ 6, 14 ~ 16
설교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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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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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다"
#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소위 ‘나쁜 사람은 벌 받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권선징악’ 류의 이야기 한토막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말하는 이가 있고, 듣는 이가 있는 것인데, 이 말씀을 전하시며 예수께서 바라보시는 대상은 ‘바리새인’입니다.
예, 또 그들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헤롯을 보며 ‘여우’라고도 말씀하신 바도 있었지만, 예수의 공생애의 비난의 주된 대상은 아무래도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누가의 복음서 15장부터 시작된 그들과의 대화가 오늘도 이어지고 있고, 17장까지 이르고 보면,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이들은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라는 저주같은 혹독한 말씀도 서슴지 않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16장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돈을 사랑하는 이들, 재물에 밝은 사람들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자’는 분명 ‘바리새인’들을 지목하고 계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비유속에는 바리새인들로 비유된 ‘부자’와 병들고 불행했던 거지 ‘나사로'라고 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한날 죽게 되었고, 그들의 운명은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서로 정반대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죽음 이후에 그들의 형편이 뒤바뀌어 버렸다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의 ‘죽음’ 이전의 삶의 모습을 자세히 톺아 봄으로, 대체 왜? 부자 (바리새인)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속에서 부자, 그리고 나사로 둘의 일상을 살펴보면, 부자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었던 ‘죄’가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부유함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뿐입니다. 범죄나 악행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것도 아닙니다.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죽음 이전의 모습이라고는 비참하고, 처참한 삶의 모습 뿐 ! 딱히 천국에 들어갈 만큼 착했다거나 믿음이 좋았다거나 하는 증거는 보이질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유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읽어나갈 때 우리는 단단히 굳어진 선입견이 초래할 세가지 실수를 피해야만 합니다.
첫째, 본문은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
둘째, 본문은 믿음이 있어 나사로가 천국에 갔고, 믿음이 없어 부자가 지옥갔음을 이야기함도 아니라는 것,
셋째, ‘부’나 ‘형통’함이 ‘죄’라는 것도 아니다 ! 라는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서는 도리어 ‘부’란 하나님이 내리시는 ‘축복’으로 상징되어집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8절 반대편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던 부자의 간절한 애원을 가혹하고 단호한 말로 뿌리치던 아브라함도, 창세기 기록만 보면 그는 상당히 부유한 족장이었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복이었습니다. ‘부’가 지옥에 간 이유라면 적어도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
여하튼 부자와 나사로, 이 둘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만 남긴채 어느 한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 * 이 사실로, 죽음 자체도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 ! ) 그리고 우리가 이미 읽은 바와 같이 이후의 상황은 죽음 이전의 그들의 삶과는 완전히 뒤 바뀌어 버립니다. 땅에서 복을 누리며 시름이나 문제 없이 평안하게 살던 부자는 극심한 고통이 가득한 지옥에 있고, 고통속에 신음하며 처절한 아픔을 끌어안고 살던 나사로는 반대로 천사들이 함께 하는 아브라함의 품 ( 천국 )에 들어갔습니다.
# 상이한 이 둘의 ‘죽음’ 이후의 모습속에 담겨있을, 그 원인을 어떻게 찾아내야할까요 ? 일단 ‘죽음’ 이라는 말 자체를 살펴봅시다.
본문속에 죽고 나서 부자가 도달한 곳을 우리말 성경은 ‘지옥’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히브리어 ‘스올’, 헬라어 ‘하데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스올’은 오늘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죄에 대한 댓가로 주어지는 종교적 처벌과 형벌의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스올’은 죽은 사람이 머무는 곳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죽어서 ‘하데스’에 있다는 사실 자체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진술입니다. 죽었으니, 죽은 자들이 머문 곳으로 간 것 뿐입니다 !!! 오히려 이상하고, 낯설은 것은 ‘나사로’가 천국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 에 있는데, 그곳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그가 유대인들이 죽으면 머물 곳, 하나님의 자녀들이 머무를 곳으로 돌아갈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음을 부각시키려는 의미합니다. 하지만, 바라새인을 대변하는 부자는 마땅히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조상들이 잠든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그 스스로의 믿음과 예측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말았습니다 !
# 이제 본문의 핵심으로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조금도 연민이 없으신듯 매섭게 몰아세우셨지요. 그들은 왜? 그렇게 유독 예수님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을까요 ?
누가의 복음서만 해도, 15장에서부터 16장, 17장에 이르기까지 직접 들으라고 그들 면전에서 그들을 비난하셨습니다. 15장에서는 소외된 사람들, 죄인들, 잃어버린 소수, 탕자를 16장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17장에서는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분모는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으로부터 비난을 당하고 있는 대상이 ‘바리새인’이라는 것과,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 ‘토라’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 열망을 가진 사람들, 하나님 믿는 것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사람들, 세상이 부러워할 만한 풍부하고 교양이 있고,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라면 그들 스스로는 늘 자기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나는 너와 달라’ ‘너는 나와 달라’ !
그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생각했고,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나는 죄인들과 달라’, ‘나는 세리와 달라’, ‘나는 저런 부정한 이들과는 달라’ … 그들이 했던 거룩을 추구하는 삶, 말씀을 입에 달고 다니는 종교적 의식들 모두는 자신들이 이런 죄인들, 저주받은 것같은 이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받고자 하는 열심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지만, 그들의 삶과 그들의 말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 아십니까? 하나님도 말씀을 져버리고 사는 그들과 다르시다는 것을 ...
# ‘토라’ 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토라가 담고 있고, 설명하고, 가르쳐주고 있는, 지향하고 있는 분은 ‘하나님’이 십니다. 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구약 성경 전체는 자비와 인애로 공의를 이루어 내시고 마는 하나님, 공의를 통해 자비와 인애가 흐르는 땅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토라는 하나님은 하나님외에 누구도 거짓 주인 행세하는 것을 용납하실 수 없으시다고 전합니다. 그는 만유의 주인이시며,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땅의 권세, 정치권력, 재물, 지식, 명예 그 무엇, 그 어떤 것, 어떤 이유로도 주인이 될 수도, 주인 노릇할 수도 없습니다 ! 누군가 그런 것들을 통해 자기보다 못한 이들이 신음, 고통, 눈물 짓게 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참지 못하시는 분이시고, 거짓 주인행세하는 모든 것들 앞에 당신의 공의를 보이심으로, 그 모든 것을 ‘죄’라 칭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처럼 살게 되는 것을 참아내실 수 없기에, 그들을 짓밟는 제국을 쓸어버리시도 하십니다. 고아, 과부, 객, 나그네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는 인간 탐욕을 ‘악하다!’ 단호한 유죄 판결을 내리시고, 직접 헐 벗은 이들을 먹이고 입히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의로운 이들을 피흘리게 하는 어떠한 불법도 직접 ‘하나님 자신’을 향한 것으로 간주하시고 분노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예수는 그런 고통받는 자기 백성을 두고 보실 수 없어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을 찢고 땅을 향해 달려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 하나님은 말씀 자체이시기에,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자신을 주셨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씀을 지키고, 말씀과 더불어 사는 동안에는 그들은 하나님 백성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것이 자기백성과 맺으신 언약이 되며, 그들의 정체성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그들에게 주셨던 토라, 하나님의 말씀이 깨어졌고, 그 결과 상처받고, 깨어지고, 죽어가는 세상을 두고 볼 수 없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께서 자기 백성의 삶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자비, 인애, 공의, 하나님 말씀이 그들 삶에 회복되게 하시던 모습을 보면서 마뜩잖게 여기며 빈정거렸던 이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15:2)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도 않았고, 예수에 의해서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도 기뻐할 수 없는 이들입니다.
# 토라, 말씀은 하나님 백성이 되는 길,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을 가리키고 있으니, 마땅히 하나님 백성은 사람을 향하고, 사람을 살려내기 위한 그 법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지켜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법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며 부패한 도구로 전락시키고, 그리고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 요즘 말로 ) ‘나야 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다’라는 정신 승리, 자기만족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백성이라는 그릇된 확신과 긍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난 이후,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의 고통, 아픔이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냉랭하다면, 그저 '나'하나 먹고 사는 문제만 중요하다고 여기며 살아왔다면, 나의 그런 모습에 슬퍼해야만 합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바리새인들의 민낯을 드러내셨던 예수의 비유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날카롭고 통렬히기만 합니다. 들을 귀 있는 이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그저 듣고 흘릴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숫의 입을 통해 지금까지의 삶의 가치와 기대, 모두가 송두리째 부인되고, 역전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은 나사로였다’는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나사로는 받으셨지만, 너희는 거부되었다. 너희를 부정하신다’ 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온통 헤집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스스로 잘난척 하며, 나는 너희와 달리 구원받았다, 구원에 합당하다 말했던 그 사람들 앞에서의 수치에 민망하기도 하고, 니까짓 것이 무언데 그리 말하는가?라며 분노에 휩쌓였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떠나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 하나님께 소외되는 것을 ‘죄’라고 하고, 그 결국이 ‘죽음’ 이라고 정의하고 있지요? 사람이 아무리 그럴싸하게 자신을 치장하고, 덧입히고, 쌓아올린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떠나 물신을 숭배함으로 그렇게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엇나가 버린 길은 반드시 타자의 세상을 아픔과 고통, 상처로 얼룩지게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죄’라 정의하시고 ‘죽음'으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의 삯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아닌 물신에 마음과 영혼을 빼앗김으로, 하나님 말씀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자비와 인애를 베푸시며, 또한 그렇게 살라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만을 섬기는 것이 바로 그들의 죄입니다.
#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더 해결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가 있는 이유와 더불어, 반대로 ’나사로’ 그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된 근거나 이유가 무엇인가? 에 대한 답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나사로’ 그는 지나칠 수 밖에 없는 짐짝이나 보기 흉한 쓰레기였을 것입니다. 잔치와 흥을 즐기던 부자의 대문 안쪽에 머물던 그런 이들의 삶에서 보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나아보이는 그런 존재였는데, 그가 지금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다 ?
왜? 어떤 이유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었을까요 ? 기록되지 않은 나사로의 선행이라도 있었던 것일까요 ? 본문은 ‘비유’라고 했습니다. 비유는 특별한 메시지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니, 숨겨진 배경이나 더 설명해야할 배경 같은 것은 없습니다. 주어진 본문이 전부입니다. 찬찬히 보면 보인다더니 가만히 보니 불우했던 사람 ‘나사로’에게 특별한 점이 눈에 띕니다. 이름입니다! ‘나사로’라고 하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엘리에셀’ 인데, 그 이름의 뜻이 새롭게 들립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
왜? 하나님이 도우시는가? 사람이 돕지 않으니, 사람이 그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니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하나님은 도우시는가? 돕지 않으면 않되는 넘어지고 쓰러지고 상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내어주고, 물신에게 마음과 영혼을 빼앗겨 ‘나’만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 쓰러지고 상한 이들에게 무관심하고 돌아설 때, 도리어 하나님은 돌아서는 그들에게 냉정해지십니다. 주님은 그렇게 '나를 섬기는 벽’을 높이 쌓아 타인을 타자로 삼는 이들의 냉정함을 ‘죽음’으로 갚으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 자신을 위해 쌓아 올린 사람들의 냉대의 벽 너머에서 슬피우는 불쌍한 이들의 주님이 되어주시기 위해 찾아가시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
주님은 마태의 복음서 25장에서,
『내 아버지께 복받을 사람들이여, 너희를 위하여 천국이 예비되었으니 그리로 들어가라. 이유가 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역경, 가난하고, 깨어지고, 상해 있어, 하나님이 아니시면 살 수 없는 이들과 자신을 늘 동일시 하십니다.
# 예레미야 32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의 숙부 하나멜로부터 아나돗의 밭을 기업무를 책임을 지고 구입해주라는 말씀을 받게 됩니다. 그때는 기원전 588년 시드기야 10년 즈음,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망하기 바로 직전의 때였습니다.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 땅을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에게 왜 ? 그런 때에, 그런 땅을 사주라고 했을까요 ?
‘아나돗'은 예레미야의 고향이기도 했고, 솔로몬이 아닌 왕위를 노리는 아도니야 편에 섰다가 패망했던 아비아달 제사장 계열의 제사장들의 유배지이기도 했던 땅입니다.‘아나돗’은 그렇게 태생적으로 우울한 지역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곳에 살던 숙부 하나멜은 지금 그의 밭을 처분해야만 하는 형편입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땅은 삶의 근거가 되는 재산일 터인데, 그는 몹시 불우한 형편에 내몰려 있었던 가 봅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고는 하지만 한번 처분한 토지를 다시금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가난이 가난을 대물림하는 것이 현실이니까 말입니다. 여전히 부유한 이들은 계속해서 부를 대물림하고, 가난한 이들은 내몰린 삶 때문에 다시금 가난을 대물림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불평과 부정의한 사회 구조를 정면으로 가로막아 섭니다. ‘희년’과 같은 제도는 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최종적 자유선언입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땅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고, 억압된 이들은 자유민이 되도록 해방해주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셨으니, 누구도 타인의 것을 취함으로 그를 가난과 궁핍한 삶의 나락으로 떨어트리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득불 토지를 매도할 때에라도 가까운 친척에게 넘김으로 다른 지파에게 하나님이 분배하신 기업이 넘어가지 않도록, 그리고 훗날 회복을 용이하도록 하는 셈입니다. 하나멜은 지금 예레미야를 자신의 기업무를 자로 찾아온 것입니다. 물론 지금 상황은 그런 말씀에 일일이 신경쓰지 못할 때입니다. 찾아온 친척의 어려움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기 앞가림하기도 정신없는 때, 나라가 망하게 된 때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 밭을 은 칠십 세겔에 구입합니다. 세겔이 성인 남자 하루 품삯정도이니, 많이 잡아도 어림 잡아 700만원 정도 밖에 않됩니다. 하지만 곧 나라가 망하고 나면 쓸모 없이 날아가 버리는 돈이 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 어려움에 처해있는 이를 위해 마음을 내어줍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유입니다 !!!
# 이제,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부자는 눈에 띄는 범죄나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도리어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그는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잔치에 함께 하고 있었고, 심한 피부병을 앓고 자신의 대문앞에 누워있는 거지 나사로를 좇아내지 않고 두고 있는 것을 보면 그닥 거칠은 사람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20절 말씀의 표현 중에 이런 표현이 눈에 띕니다.
16: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누군가 병든 나사로를 부자의 집앞에 데려다 두었습니다 구걸을 하라고 그랬는지, 내어 좇아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개역개정 성경은 나사로가 누워있는 모습을 ‘버려졌다’라고 번역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사람들에게서 버려졌습니다. 그의 부모, 형제로부터 버려졌고, 이웃에게서 버려졌고, 신앙공동체에서, 사회에서 버려졌습니다. 부자는 그를 돌보아 줄 수 있을 만큼 여력이 있었지만, 그에게 마음을 줄 여유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자신의 대문앞에서 굶주리다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처참하고 이그러지고 아픈 삶의 깊이가, 주어진 삶을 호화롭게 즐기던 부자의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버려진 이스라엘의 고통받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돈이 가져다주는 안일함과 풍성함이 주인이 그의 영혼의 주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지 못한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 즉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이들입니다.
하나님은 인애를 바라시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당신의 백성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눌리고 빼앗기고 헐벗을 때 죄에 짓눌려 버둥거릴 때에라도 자비와 긍휼을 천대까지 베풀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부자는 하나님 말씀과 다른 편을 택하였고, 하나님 백성들과 다른 편에 있었고, 그렇게 다른 사람이었으니, 하나님 백성들이 모여있는 곳에 함께 할 수 없는 것 뿐입니다. 이 운명은 그가 살아 있을 때, 대문 밖의 나사로를 그렇게 다르게 대하는 때부터 이어진 결과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서 돌이켜, 부자의 삶에서 버려진 대문 밖에 있던 나사로를 끌어 안고 그를 위로하시고, 대문을 열고 그의 나라로 이끄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_ 잠14:31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_ 잠14:21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_ 약2:13
# 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물질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명예를 갈구하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는 이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당신의 은혜만을 갈구하는 이들의 구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구하고, 그의 은혜만을 구하는 성도의 눈에는, 그 앞에 심령이 가난하여 서 있는 나와 같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깨어지고, 상해서, 홀로 눈물로 날을 지세우는 자기 백성들을 찾아 달려가시는 주님이 보입니다.
누가 주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 누가 주님의 은혜를 입는 사람입니까 ? 누가 패망한 나라의 운명앞에서도 구원해주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까 ? 누가 사람들이 버리고 외면하는 저주받은 인생에서도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까 ? 그리고 누가 그렇게 자기 백성을 향해 달려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의 걸음에 함께 동행하는 사람입니까 ? 기억하십시오. 세상에서 버려진 이를 주님은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버리는 이들은 주님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마음이 상한 이들은 주님께 위로를 받고,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 대문 밖으로 버려진,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그래서 너무나 외롭고, 고독하고, 상하고, 깨어져 이제는 가능성 조차도 잃어버린 나사로 ! 그를 도우시기 위해 기쁨과 안락에 빠진 이들을 뒤로 한 채 문을 열고 뛰쳐나오신 주님을 만납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던 '나사로'처럼,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 유리되어 살다가, 오늘 ! 결국, 주님의 품에 안기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님앞에 섭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우리를 이 예배 가운데에서 만나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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