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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06 성령강림후 17주 _세계성찬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19. 10. 5. 19:22
성서일과
1독서 | 애 1:1-6
2독서 | 딤후 1:1-14
3독서 | 눅 17:5-10
응 송 | 시 37
설교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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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을 길어내는, '겨자씨 믿음'
1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과의 대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늘 갈등과 긴장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그들과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지평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처럼 여기며 살던 그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핍박하고, 배척합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곳곳에서 그들의 신앙이 실상은 빈 껍데기처럼 공허함을 들춰내셨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들의 신앙을 그렇게 열매없는 허상으로 만들어 버렸을까요 ?
예수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이 질문에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도 여전히 세속가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예수를 오해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자유로울까요 ? 오늘 우리 신앙의 자리 역시 이 질문앞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같은 예수를 믿고 있다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근거로 세습을 합리화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불법을 자행하면서도 큰 소리를 치는 아연실색한 신앙의 모습이 우리안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말입니다.
2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분량은 짧지만 그 내용은 결코 짧지 않고 난해하기도 합니다. 본문 앞에 있는 1 ~ 2절의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이에 대한 저주의 말씀이나, 3 ~ 4절의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는 이가 되라고 하시는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은 상당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물론 ‘너희는 이렇게 하지 마라’는 이 말씀이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고발하는 것이었지만, 주님앞에 서고 보니 실상은 자신들도 바리새인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 편할리가 없습니다. 속내가 들킨 것처럼 화끈거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 민망해서 일까요, 아니면 안타까워서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돈을 달라, 명예를 달라, 성공을 이루어달라는 식의 세속적 탐욕을 ‘믿음’의 언어로 포장하는데 익숙한 요즘인데, 다른 것도 아닌 ‘믿음’을 달라는 그들의 요청이 목사인 제 눈에는 기특하게만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묘한 늬앙스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너희 가운데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 뽕나무가 바다에 심기워지라 하여도 이루어질 것이다’ 짐짓 제자들을 칭찬하고 두둔해 주고 싶던 마음이 무색해집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너희는 겨자씨 만한 믿음도 없느냐?’라는 책망처럼 들리니 말입니다. 과연 주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
겨자씨 한알의 의미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바로 뒤에 이어지는 8절 이후의 네번째 단락의 '무익한 종’에 관한 비유는 더 어색하고 쌩뚱 맞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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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은 유대인들, 바리새인들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그 거리의 차이를 드러내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차이는 바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의 차이와 거리감일 것입니다. 8절부터 이어지는 ‘무익한 종’의 이야기속에 제자들과 예수과의 사이의 거리감 처럼 아득한 ? 겨자씨 한알의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자들은 ‘믿음'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어떤 놀라운 ‘능력’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능력이 있어야 주님이 가르쳐주신 바리새인들과 다른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바리새인들과 달리,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어찌해야하는가?’ 라는 말씀을 듣다보니, 자신들로서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내 수준에서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습니다. 여기서 어떤 능력이 더 부어져야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니 능력으로서 ‘믿음’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마음에 담고 있는 ‘믿음’은 놀라운 이적과 기적,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행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냈던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이들에게 임했던 특별한 능력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쓰러트리거나, 망했던 사람이 재기하고, 불치병이 낫는 등의 불가능한 현실이 바뀌어지게 만드는 신적인 권능이나, 혹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믿음’이 좋다라고 여기는 오늘날 우리도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이런 것과는 전혀 결이 달라보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말만 하면 뽕나무라도 바다에 들어가게 할 만큼의 능력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면, 정말 엄청난 능력이구나 !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겨자씨 한알 만큼의 믿음은 이미 제자들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족합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것만으로도, 때로는 낙망하고, 때로는 유혹앞에 흔들리고, 두려움앞에 쓰러져도, 상처투성이 같은 모습이라도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열매나 결실, 혹은 놀라운 능력까지 포함해서 그 뒤에 따르는 것들은 모두 우리 몫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어떤 신적 능력이 더 부어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이 있든, 태산 처럼 엄청난 크기의 믿음이 있든, 그것으로 우리가 능력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충분하다!!! 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어떠한 것이 채워지더라도, 우리는 능력자가 되지 못합니다. ‘무익한 종’의 이야기를 더 살펴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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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종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의 믿음’과 쉽게 연결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도 2천년전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보다 쉽게 주님의 말씀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때는 노예나 종을 부린다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평등하며 열심히 일하면 일한 만큼 대우를 받아야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오늘 우리의 눈에는 홀대 받고, 비천한 처우를 받는 종의 모습에 마음이 불편하게 됩니다. 종의 열심이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비유의 핵심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덤덤하게 종의 일은 모두 ‘마땅한 것’, ‘당연한 것’ 뿐 이라고 결론을 짓습니다.
‘종이 하는 어떤 행위도 주인에게 유익할 것이 없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전부이며, 결론이고, 핵심입니다.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은 마땅한 것일 뿐이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을까요 ? 여러분은 가정에서, 회사에서, 교회에서 여러분의 열심히 모두 마땅하고 당연한 것일 뿐이라는 평가를 받으시면 어떻겠습니까 ? 많이 불편하실겁니다. 사람은 모두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이 있고,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내가 가진 것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무익하다는 평가를 결코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억울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무능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능력이 있으시다’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마땅한 것’일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믿음’이란 그 마음을 비워내는 것이니, 너희도 주인앞에 묵묵히 제 할일 하는 종처럼 ‘나’를 주어 삼고 살아가려는 짐을 좀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야 비워진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 생명을 살려내는 말씀의 능력이 채워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습니다. 실제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것들 입니다.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고, 우리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로만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이 사실을 깨닫는 것,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믿음’ 즉 하나님을 잘 알았다면, 소자나 가난한 이들, 깨어지고, 상한 사람들, 귀신들리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그렇게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잘 아는 믿음이 있었다면,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앞에서 기만하고 외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아는 믿음이 있었더라면,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양, 거룩한 체하며 으스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 즉 하나님이 능력있으시다는 것을 안다면, 능력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느 순간, 어떤 자리에서도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무능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니 그렇습니다.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란? 나는 무익하고, 나는 무능하며, 나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짐으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이며, ‘은혜’이고, ‘능력’ 입니다. 나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능하고 무익한 종임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과 은혜를 인정하고, 그의 품에 용납되는 길입니다. 그때에 비로서 우리는 영혼의 안식과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이 작은 겨자씨 한알을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천국을 설명하시면서 ‘겨자씨 한알’로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알은 작지만, 그 한알에는 울창하게 자라 숲을 이루고, 세상을 덮는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니 겨자씨 한알 만큼의 믿음이라는 것은 ‘적다’ ‘작다’의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보지 못하고, 상상할 수도 없는, 모든 것에 능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지게 되는 것이 바로 이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인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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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10명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앞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조카 롯 모두에게 절망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심판앞에 무력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땅에 찾아오심으로, 우리는 멸망과 죽음에서 벗어났습니다.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 기쁨이 실감이 나셔야 합니다. 롯이 무엇을 해서, 아브라함이 능력이 있어서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인간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능력은 우리안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어떤 능력을 받겠다고, 그것으로 무언가를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헛발질인 셈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바울은 디모데에게 써 보낸 두번째 편지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8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당당하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땅에서 복음을 따라 사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복을 누려라, 형통해라’ 가 아니라, ‘고난’을 받으라는 말을 이렇게 당당하게 하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당장 우리도 제자들처럼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고난을 이길 능력, 집채 만한 믿음을 부어주십시오’
하지만 바울의 당당함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고난이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지면 감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_9절
하나님께 능력있음을 믿는 이들을 바울은 하나님께서 ‘소명’으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소명’ 은 ‘구원’과 함께 성경의 가장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구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죽은 것을 산 것으로 불러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 우리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은혜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
우리가 처해 있는 모든 자리는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곳이 남들이 보기에 부러운 곳인지, 아니면 누구도 보아주지 않는 볼품없는 자리인지, 만족스러운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부르셨다’라는 믿음입니다. 겨자시 한알 만한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이 믿음위에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궁극적으로 구원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우리는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누리게 되는 능력이 무엇일까요 ? 하나님의 능력은 그 선한 의지와 뜻을 끝끝내 이루어내시고야 마는 힘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비겁해지도록 만드는 세상의 힘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지켜내주시는 힘입니다. 진리를 위한 고난, 복음을 위해서 받는 고난을 넉넉하게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힘입니다. 미움과 증오의 시대에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것 까지도 품어내어 따듯하게 만들고, 죽어가는 것들을 살려내는 힘입니다. 탐욕에 이끌려 제 배를 채우려 자기 좋은 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을 꺾고, 하늘의 복을 전하고 나누고 베푸는 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는 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겨자씨만한 믿음을 붙들고 나아가는 성도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고, 이것보다 더큰 믿음의 능력은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깨어져 있어도 자신의 삶이 형편없이 구겨지고 깨어져있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구원하십니다.좌우로 분열되고, 엉터리 같은 일상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더라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능력이십니다.겨자씨 한 알 만큼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겨자씨 한알 만큼의 믿음을 가지고도 세상을 구원하십니다.'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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