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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22 대림절 넷째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19. 12. 19. 23:44

    성서일과

    • 1독서 이사야 7:10~16
    • 2독서 로마서 1:1~7
    • 3독서 마태복음 1:18~25
    • 응 송 시편 80:1~7, 17~19

     

    설교음성

    https://drive.google.com/open?id=1oxqXZjwwyvrTIuzZoMWJOaHvST0KyGFh = '클릭'하시면 설교음성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설교파일

    https://youtu.be/sQQyh0HsWXw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복음'  '징조'

     

    #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믿음'이란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런 가치관을 통해 살아가려는 의지이기도하고, 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매우 특별한 상황, 그러니까 오직 믿음만 필요한 그 때 드러나는 것을 전제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의 무능함과 깨어짐의 자리, 하나님의 손을 경험하고, 그 은혜가 주어지지 않으면 버텨낼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한계의 자리에 었을때에야 비로서 ‘믿음’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믿음이란? 하늘을 바라보는 이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니 땅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믿음은 그처럼 불품없고 허무해 보이는 것이 또 없습니다. 하지만 비록 바다를 가른다거나 산을 뒤흔들 만큼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폭풍처럼 밀려드는 시련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도록 우리 영혼을 지켜내어주는 것이 또한 ‘믿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야 말로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능력’,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사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내게 주어진 ‘지금’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을 보는 눈이기에, 믿음의 사람ㄷ르ㅇ 느껴지는 대로 살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믿는대로만 살아갑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결같이 믿음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믿음만으로 살아가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연약하고, 우리가 처한 현실의 상황은 너무나 가혹하기만 합니다. 이런 때는 내게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겨자씨 한톨만한 믿음이라도 있는가하는 의심을 떨쳐내기 어렵습니다.

    이번주 1독서 이사야서 말씀은 남유다 아하스왕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앗수르라고 하는 제국이 발흥하여 근동의 패권을 잡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주변국이었던 아람과 북왕국이 연대하여 앗수르에 저항하기로 했고, 유다에게도 동맹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지만 유다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이런 유다를 아람과 북왕국 동맹이 침공하기로 하였는데, 그 바로 직전의 상황이 오늘 본문의 시대적 정황입니다. 유다의 아하스왕이 이들과 맞서기 위해 선택한 해결책은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앗수르는 가장 강력한 패권국이었으니 그의 도움을 구한다는 것은 외교적으로는 합당하고 실익이 있는 선택입니다. 하지만 선지자 이사야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아닌, 현실적인 힘과 능력으로 보이는 외세에 의존하려는 선택은 불신앙이었고, 그릇된 것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야 이사야의 편에서 아하스의 믿음 없음을 바라보고 있지만, 지금 아하스 왕과 선지자 이사야의 관계는 대단히 심각한 갈등 가운데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선택이란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외세의 위협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있는다는 것은 대단히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겠다며 이사야 선지자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징조’를 구해보라고 권하지만 아하스왕은 이마져도 거절합니다. 얼핏 하나님의 뜻을 시험하지 않으려는 믿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이미 그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의 힘을 빌리는 것에 마음을 두었던 아하스 왕의 마음과 오늘 현실의 문제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과 믿음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앗수르 대신에‘돈’이나 ‘형편’ ‘상황’의 유불리에 기댈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거나 ‘징조’를 구한다는 것을 ‘의심’과 혼동하곤 합니다. 그래서 ‘징표’나 ‘표징’을 구한다는 것을 불경하거나 믿음없는 행위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본문과 같은 상황속에서는 오히려 징조를 구한다는 것이 도리어 믿음의 상황이 됩니다. 선지자가 징조를 구하라고 하는 목적은 현실적 갈등의 상황에서 내 뜻을,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꺾어내겠다는 믿음에서 연유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던 아하스는 이미 하나님이 보이실 징조가 자신이 보고 있는 현실적인 방법과는 다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현실의 문제앞에서 말씀을 선택할 용기도, 자신도 없으니 듣기 싫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그 응답을 구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이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선택할 용기가 없는 것 뿐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용기야 말로 ‘믿음’이며, 반대로 말씀대로 살 용기가 나지 않는 것 ! 이것이 우리의 ‘믿음 없음’의 실체입니다. 그러니 두려운 겁니다.

     

     

    # 아하스왕의 믿음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불안감이나 조급함에 내몰려 현실을 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야 말로 옳다는 뜻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그것이 옳다는 징조를 하나님께서 보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14절입니다.

     

    •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말씀은 오늘 3독서 신약 복음서 본문에도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관한 것입니다. 동정녀로부터 태어날 아이에 관한 징조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주어진 징조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불명확하고 충분해보이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징조 때문에 실족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체념하고 포기해버리는 사람도 있을 법합니다.

    동정녀탄생에 대한 기사는 요즘같은 시대에 오히려 많은 사람을 실족하게 합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는 오히려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어떻게 하나님의 징조가 되고, 어떻게 온 땅에 소망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 아니, 연약하고 무능하게만 보이는 여린 아이의 탄생에 대체 무슨 소망이 있다는 말일까요 ?

     

    본래 이사야서 7:14에 기록된 ‘처녀’라는 말은 히브리어 ‘알마’라는 말로, 가임기의 젊은 여인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이 신약시대로 들어오면서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번역가들이 ‘처녀’라는 뜻의 ‘파르테노스’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조가 임하였음을 드러내는 설명으로 사용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이 말이 무언가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의미를 덧입게 된 셈입니다. 하지만 정작 동정녀 수태에 관한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를 낳은 이가 처녀인가? 아닌가?라는 사실이 아닙니다. 동정녀 탄생이라는 사건은 어떤 일이 일어날 기미나 징후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징조’일 뿐입니다. 그리고 사실 초기 기독교공동체에서는 동정녀 탄생이 예수의 ‘신성’(Vere Deus)을 담보하고 강조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야 말로 ‘온전한 사람’ (Vere homo) 이셨음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던 교리였지요. 여하튼 말 그대로, 정작 중요한 것은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기괴한? 뉴스도 아닙니다. 그 징조가 나타내고 있는 ‘그 어떤 일’입니다 ! 이사야가 징조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이야기나, 복음서 기자가 동정녀 탄생을 통해 들려주려 했던 그 어떤 일은 무엇일까요 ? 예수의 탄생은 어떤 징조입니까 ? 여러분은 지금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계십니까 ?

     

     

    # 아하스왕이 선지자의 말을 따르지 않고 앗수르를 택하게 된 이유는 사면초가의 위기앞에서 하나님을 놓쳐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그의 기억속에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되시는 하나님이 사라졌습니다. 한번 두려움에 휩쌓여 버리게 되면 하나님이 보이질 않는 법입니다.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 승리의 깃발되시는 하나님, 반석과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면 ! 아람 동맹국이 아무리 크고 강하더라도 문제 될 것이 없고, 두려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앗수르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거기에 기댈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기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평가는 다 상대화되는 것이기에 당연한 결과는 ‘평안’ 만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또한 말씀안에서 만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징조’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만 하면 그만 입니다. 그것이 징조의 목적입니다. 그 내용이나, 형식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서 기자의 시선도, 초대교회 성도들도 처녀에게서 태어날 아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라는 사실을 주목했습니다. 가장 작고 여리고 볼품없어, 거친 세상과 어둠속에서 도리어 우리가 돌봐야 할 그 아이를 보면서 ‘아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구나 !’ 라고 고백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연약한 아이가 우리의 희망이 된다는 이런 말이 여전히 피부로 와닿지 않으실 겁니다. 저는 외부의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먹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평화’를 기억해냅니다. 더 배고프고, 더 가난한 이를 돌보려는 가난한 이웃들의 손을 보면서, 어둠에 삼키워지지 않고, 믿음을 지켜내려 몸부림치는 이들을 보면서, 우리의 오늘을 돌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을 기억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저에게는 오늘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보게 하는 ‘징조’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일이나 과정을 경험하게 될 때, 고백하게 되는 ‘주님이 하셨다’, ‘주님이 함께 하셨다’ 라고 말은, 그런 일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지금 함께 하셨음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시고 계신지, 어떤 일을 이루시는 분이신지를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결코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자꾸만 염려나 두려움에 삶이 사로잡히고 맙니다.

     

     

    #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실까요 ? 성경이 일관되게 소개하는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죄와 죽음에 빠져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다 하시며, 영생의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자주 들어왔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안에서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해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상투적인 종교 언어로만 흘려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것을 경험하든, 어떤 것을 믿든 그것은 모두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구원경험일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에 근거할 때만 존재할 수 있으며, 이것만이 우리에게는 ‘복음’입니다. ‘복음’ 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의 시름과 절망, 고통에서 구원해 낼 수 있습니다.

    결핍되고 버려진 인간 구원은 진리되시는 하나님을 삶의 기준으로 삼으며 살아갈 때에만 경험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차별받고, 또 차별하는 벽이 두터워만 가는 세상입니다. 이런 차별의 벽은 돈을 더 많이 벌고 성공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앞에서만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그의 앞에서는 더 가진 사람도 우쭐댈 수 없고, 없다고 기죽어 살 이유도 없습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을 더 살고, 100년을 더 산다고 해도 우쭐 댈 수 없고, 지금 내 건강이 좋지 않아도 절망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앞에서는 모든 차별은 무의미일 뿐 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복음’을 알게 되면,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이 가치를 잃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만 된다면 더 이상 부족할 것도 없고, 더 이상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누구보다 더 많이 가지거나, 더 많은 것을 이루어야한다는 강박이나, 무엇인가를 이루지 못함에서 오는 두려움과 초조함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순간에만 인간은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자유’와 ‘구원’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참 평안이며, 구원입니다.

     

     

    # 본래 ‘복음’ 이라는 말은 로마 황제에게만 사용되던 용어였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매혹적이고 강력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모두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며, 그의 법을 따르며 살았습니다. 그 법을 따르기만 하면 ‘평화’가 주어지고, 생명을 부지할 수 있고,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공동체는 황제 숭배의 ‘복음’을 온 몸으로 거부했습니다. 대신에 그들이 선택한 ‘복음’은 나무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야 말로 ‘주님’이시며, 그가 바로 ‘복음’이라고 외쳤습니다. 볼품없는 로마 제국의 변두리에 있던 기독교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주어졌던 모든 권위를 박탈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로마의 칼도 무력도 그들을 어찌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로마를 거부하고, 황제숭배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하게 칼의 위협이나 목숨을 잃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세상에서 고립되고 차별되고 내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들처럼 살지 못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번영과 성공, 행복을 이야기하는 돈을 숭배하는 세상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돈이 중심을 이루고, 성공이 인정을 받는 세상 가치를 거부하고, 내면을 채우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 효율 보다는 사람을 중시여기며,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지 못합니다. 주류의 세상에서 내몰릴까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도,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는지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채 살고 있습니다. 그 안에 담겨진 기쁘고 소중한 가치를 누리지 못한 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이 왜 ? ‘복음’인지 실감하고 계십니까 ?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_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사도로 살겠다는 바울의 고백은 ‘복음’에 완전히 붙들려 살아가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 ‘복음’은 조건이 없이 주어집니다.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_에베소서 2:8~9

     

    그 동안 바울이 경험했던 세상의 복음은 모두 조건부의 것들이었고, 조건을 이루기 위해 삶은 온통 내몰려야만 했습니다. 제국 로마는 평화를 약속해주고 있지만 제국의 법을 따라야하고, 황제 숭배에 순응해야만 합니다. 유대교는 어떻습니까 ? 유대교는 ‘율법’을 지켜내는 조건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행복을 얻으려고 달려나가는 세상이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 모두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소외됩니다. 이룰 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차별적인 행복입니다. 운좋게 오늘은 행복한 것 같아도 내일 내 행복은 누군가에 의해, 어떤 상황에 의해 박탈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고 황제숭배를 거슬렀던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 ‘복음’에 삶을 기대며 살아가게 되는 순간, 우리를 결핍과 불안으로 내몰던 모든 두려움의 권세는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이 러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맛 본 사람,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며, 함께 하심을 경험한 사람은 모두가 굴복하는 현실에서도 비굴하게 살지 않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 대림절 마지막 주입니다. 큰 기쁨의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하지만 성탄을 앞두고 오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_ 로마서 1:7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신이야말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징조’라고 소개하였던 바울입니다. 그는 오늘 대림의 소망을 안고 마지막 네번째 촛불을 켜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여러분도 또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징조’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아하스 왕처럼,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해 세상과 현실에 압도당해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능력에 기대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되었던 바울처럼 살아내십시오. 바울의 말로 여러분을 축복하며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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