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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29 성탄후 첫번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19. 12. 27. 17:02
성서일과
- 제 1 독서 이사야 63:7~14
- 제 2 독서 히브리서 2:10~18
- 제 3 독서 마태복음 2:13~23
- 응 송 시편 148
설교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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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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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참여하시는, 하나님"
# 첫번째 성탄의 날
아무리 보아도, 예수님의 인생은 참으로 불행하고,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해마다 교회가 맞이하고 있는 성탄절이란 꿈과 소망, 산타클로스의 낭만으로 채워져 있지만, 이와는 달리 첫번째 성탄의 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태어나시던 그 밤이야말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는 결코 낭만적일 수 없는 밤이었다고 그려내고 있습니다.
역사에 따르면 예수가 태어날 당시 유대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은 대단히 폭력적이고 잔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없던 에돔출신의 이방인임에도 로마의 힘에 기대어 유대의 왕이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까요, 아니면 정치적 수완이 좋았다고 해야할까요 ? 그러나 이방인인 그가 유대의 왕으로 인정받을 명분이 없었기에 매일을 그는 왕의 지위를 지켜내는 것에 광적으로 몰입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유대사가였던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아들 둘을 반역혐의로 처형시켰을 만큼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헤롯이 지배하던 그 시대는 말 그대로 매일이 미쳐돌아가는 시대였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이때의 처참함의 날들을 보며, 모세가 태어나던 애굽에서의 시절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두 살 아래의 남자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할 만큼 광기에 서린 폭력에 지배당하던 시대, 죽음이 짓누르고 온 땅을 뒤덮고 곳곳마다 라헬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그 때처럼 음습한 땅에 예수는 찾아왔습니다.
자기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할 메시야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초라하다 못해, 안쓰럽고 애잔한 탄생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거절하는 죽음의 위협에서 예수를 살려내기 위해 요셉과 마리아는 피난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목숨을 건져내려는 아슬아슬했던 피난 길이 끝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상황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지역의 왕이 되었던 헤롯 아켈레오 역시 난폭하고 잔인했던 이였기에 이들은 유대를 피해 북쪽 변방 갈릴리로 향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위태한 순간은 면한 것 같았지만 서른 세살의 나이에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고 말았으니, 태어나는 순간부터 따라다니던 죽음의 그림자를 결국은 피할 수 없었던 불행하고 불쌍한 운명이었습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짊어지고 살던 박복했던 예수입니다.
이런 예수를 볼 때마다, 과연 그가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분이 맞으신지, 왜 ? 굳이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만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왕이나, 구원자와 같은 모습과 기대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늘의 천군천사를 통해, 혹은 불을 내려서라도 불의한 땅의 모든 권세를 뒤짚어 엎어버릴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권세를 지닌 분이신데,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불행도 싹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오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 장애도 없고, 불평도, 배고픔도, 절망도, 고통도 없는 모두가 다 평안하고, 만족감을 누리는 그런 세상을 한번에 만들어버릴 수는 없으셨던 것일까요 ?
게다가 예수께서 구원의 이름으로 이땅에 찾아 오셨음에도, 지금도 세상은 구원에 허덕이는 모습 그대로만 보입니다. 세상의 악은 만연하고, 전쟁의 위험과 깨어지는 삶의 모습도 그대로입니다. 작게는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난 이후의 우리 개개인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습습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불안하며,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그대로입니다.
오늘같은 이런 시대에,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따르는 기독교 신앙이 어떤 면에서는 너무 나이브하고, 무기력해 보입니다. 때로는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내 걸음이 옳은 것인지 자신도 없고, 무의미하게 소비되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무력해 보여 답답할 때도 있고, 인생 자체가 허무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은 삶에서, 게다가 저 만치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의 모습과 비교라도 될라치면 구원은 여지없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이 차를 탄다’라는 국내 모기업의 자동차 광고에 주눅드는 이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수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아득한 신기루 마냥 멀기만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만이 ‘도움’을 ‘도움’으로 경험하고, 배고픈 사람만이 배를 채워주는 한끼의 식사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은혜’는 ‘은혜’가 주어져야만 살 수 있는 그런 좌절과,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의 자리에서만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단 한 걸음도 ! 걸어갈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대 무능의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늘의 ‘은혜’ 만 바라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모두 이처럼, 가난하고, 연약하고, 불쌍하고, 겸손한 이들, 하나님이 아니라면 살 수 없는 이들을 붙잡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손이라는 것을, 이런 사람들만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경험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하신 말씀이 이런 것이겠지요.
그러니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 예수가 신화가 아닌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경험한다는 것은 보이는 방법이나, 세상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어보려는 가능성이 무너지고 부정되어지는 삶에서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낯설은 구원자
이런 예수를 볼 때마다, 과연 그가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분이 맞으신지, 왜 ? 굳이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만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왕이나, 구원자와 같은 모습과 기대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늘의 천군천사를 통해, 혹은 불을 내려서라도 불의한 땅의 모든 권세를 뒤짚어 엎어버릴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권세를 지닌 분이신데,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불행도 싹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오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 장애도 없고, 불평도, 배고픔도, 절망도, 고통도 없는 모두가 다 평안하고, 만족감을 누리는 그런 세상을 한번에 만들어버릴 수는 없으셨던 것일까요 ?
게다가 예수께서 구원의 이름으로 이땅에 찾아 오셨음에도, 지금도 세상은 구원에 허덕이는 모습 그대로만 보입니다. 세상의 악은 만연하고, 전쟁의 위험과 깨어지는 삶의 모습도 그대로입니다. 작게는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난 이후의 우리 개개인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습습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불안하며,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그대로입니다.
오늘같은 이런 시대에,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따르는 기독교 신앙이 어떤 면에서는 너무 나이브하고, 무기력해 보입니다. 때로는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내 걸음이 옳은 것인지 자신도 없고, 무의미하게 소비되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무력해 보여 답답할 때도 있고, 인생 자체가 허무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은 삶에서, 게다가 저 만치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의 모습과 비교라도 될라치면 구원은 여지없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이 차를 탄다’라는 국내 모기업의 자동차 광고에 주눅드는 이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수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아득한 신기루 마냥 멀기만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만이 ‘도움’을 ‘도움’으로 경험하고, 배고픈 사람만이 배를 채워주는 한끼의 식사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은혜’는 ‘은혜’가 주어져야만 살 수 있는 그런 좌절과,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의 자리에서만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단 한 걸음도 ! 걸어갈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대 무능의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늘의 ‘은혜’ 만 바라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모두 이처럼, 가난하고, 연약하고, 불쌍하고, 겸손한 이들, 하나님이 아니라면 살 수 없는 이들을 붙잡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손이라는 것을, 이런 사람들만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경험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하신 말씀이 이런 것이겠지요.
그러니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 예수가 신화가 아닌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경험한다는 것은 보이는 방법이나, 세상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어보려는 가능성이 무너지고 부정되어지는 삶에서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우리의 구원자
이사야 선지자는 절망의 현실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녀삼아 주시는 구원자이시며, 그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63장 11절 이후에 소개하는 모세의 때에 이루어졌던 출애굽 사건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선지자가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은 애굽의 병거를 무찌르고, 성을 무너트리고, 승리의 깃발을 꽂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대와 너무 다릅니다. 여러분도 찬찬히 읽어보십시오. 9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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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이사야가 소개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과 고난의 현장을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는 스스로가 구원자가 되는 이들이 아닌 깨지고 상한 자기 백성의 삶의 자리에 찾아가시고 그들의 삶에 기꺼이 동참해 주심으로, 당신의 손으로 위로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시험의 자리에 함께 하심으로 반드시 지켜내시는 분입니다. 아이를 위태롭게 하는 세상과 싸워 이기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온몸으로 아이를 끌어안고 자신이 깨어지고 상함으로 내 아이를 지켜내는 어머니의 품 같은 분이 주님이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적과 싸워 이기는 것에는 관심이 전혀 없으십니다. 애당초 그와 맞서 싸울 대적이 없는 전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승리 그 자체이십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부유함에도 관심이 없으시고, 세상의 명예에도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 모든 것이 이미 그분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 하나님의 시선이 고정되어 바라보고 계신 대상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자기 백성’인 ‘성도’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일등을 하든 꼴찌를 하든 이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세상 모두가 비난하는 천덕꾸러기라도 상관없습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자기 백성의 삶에 참여하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어느날 삶이 온통 바뀐다거나, 대적이 모두 무너지고, 하루 아침에 세상이 바뀌는 식으로 경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자기 백성의 삶에 ‘지금’ 함께 해주심으로 그들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도록, 무너지더라도 깨어지고 않도록, 깨어지더라도 패배하지 않고 반드시 일어서도록 지켜내시는 능력입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DNA에 새겨진 출애굽 사건에 대한 기억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신음을 듣고 찾아오셔서, 그들을 가나안까지 함께 먹고, 마시고, 싸우며 동행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 !!!
# 하나님 구원의 방식인 ‘성육신’
마태의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의 모습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다시금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이들을 피해 도망다니는 어린 예수안에서, 자기 백성들이 살고 있는 서슬퍼렇고 광기에 서린 폭력의 세상에 고스란히 자신을 내어던지신 하나님을 발견하실 수 있으십니까 ? 여러분은 그 연약한 예수의 모습안에서 자신을 제한하고 낮추심으로 우리의 삶에 참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복된 눈을 가질 수 있기를 빕니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과 고통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틈 속에서, 그들을 지켜내시기 위해 찾아와 계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외면할 수 없고, 그러니 그런 사람들의 곁에 함께 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이 눈물 흘리는 이들, 가난한 이들, 내몰리는 이들, 소외당하는 이들 곁을 찾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을 외면하고, 곁을 내어주는 것을 거부한다면 결코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성육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성육신’이야 말로 우리를 아픔과 절망속에 그대로 두실 수 없어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수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하늘을 버리고 기꺼이 이 절망과 고통의 삶으로 찾아오셨다고 말합니다. 그 목적은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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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_히 2:14 ~ 15
마귀는 ‘죽음’과 함께 하며, 또한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 존재입니다. 마귀는 죽음을 무기삼아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너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그 권세에 모든 사람이 짓눌려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임당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기꺼이 그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마귀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은 마귀를 쓸어버리는 것이 아닌 자기 백성의 죽음에 동참하심으로 마귀의 권세였던 죽음의 공포를 물리치십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다시는 마귀의 권세앞에서 실패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시험받는 이와 함께 하심으로 시험당하는 이를 구원해주시고, 그가 죽으심으로 죽음을 직면하는 이들을 도와주십니다. 그가 찾아가 주시고, 삶에 동참해 주시는 것만으로 마귀의 권세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귀와 싸우는 것이 아닌, 모든 시험 가운데서 주님과 함으로 마귀의 권세를 깨트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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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_ 히 2:18
여전히 예수님 이전의 시험과 고난이 우리 삶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든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이 두려움과 절망에서 우리를 구원해 낸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라고 하는 신학자는 ‘주님이 죽임 당하신 십자가 이후로, 이제는 우리 중에 누구도 홀로 시험을 받거나 고난 당하지 않습니다’ 라고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세상의 권세자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경험하는 고난은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이미 주님으로 인해 극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고난과 그의 죽음이 더이상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음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더이상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연약하고 무능한 우리이기에 또 어쩔 수 없이 두려울 때도 있겠지만 그것 때문에 절망하지는 마십시오. 죽음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시고, 우리는 무능하지만 주님은 구원하십니다. 당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곳에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주님만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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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_ 로마서 8: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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