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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5 대림절 셋째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19. 12. 14. 15:54
성서일과
제 1 독서 이사야 35:1 ~ 10
제 2 독서 야고보서 5:7 ~ 10
제 3 독서 마태복음 11:2 ~ 11
응 송 시편 146:5 ~ 10
설교음성
https://drive.google.com/open?id=1u4RL9W_qoswDX0Q2aK5RAc_EOjGH5tBN = '클릭' 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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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실, 그이가 당신이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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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을 상징하는 키워드는 ‘기다림’ 입니다. 기다림이라면 ‘무엇’, ‘얼마나 좋은 것’을 기다리는지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또한 언제까지인지 알 수 없는 막연한 시간에 맥이 빠져버리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대림의 기다림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 기다림이 간절하다는 말은 뒤집어 보면, 그것이 없는 현재에 만족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삶에 대한 불만의 내용은 으레 근심과 괴로움이며, 이런 것들은 대부분 두려움에서부터 비롯하곤 합니다. 한편으로는 시름과 걱정이 두려움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어지는 이러한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무도 벗어날 수 없으니 죄와 사망을 ‘권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삶 가운데 두려움이 아스라이 드리워질 때면 지레 겁을 먹고 체념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닥쳐오는 두려움을 똑바로 마주하고 헤쳐나가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편을 보면 안스럽기만 하고 반대로 다른 한편을 보면 대견해보입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직면해야하는 두려움이란 것이 끝이 없기에, 끝까지 가면 제풀에 꺾여버리고 마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성경은 사실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직접적으로 ‘두려워하지 마라’는 용례가 무려 365번이나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처럼 성경이 두려움의 문제에 집중하는 이유는 그 만큼 우리 인생이 ‘두려움’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두려움의 끝자락에서 만나게 되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인간 구원이 완성되어진다는 실체를 꿰뚫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와 삶은 이런 두려움의 문제를 관통하면서 씌여진 것들입니다. 구약본문 1독서인 이사야 35장은 얼핏 읽기에는 구원의 기쁨과 소망이 가득차 있어 보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화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1절의 시작입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왔던 포로 1세대들이 모두 죽고 난 이후, 다시금 유대로 돌아가야만 했던 당시에 들리워졌습니다. 이방땅 바벨론에서 태어나 삶의 터를 잡고 살고 있던 그들이 선지자의 예언앞에 서 있습니다. 그럭저럭, 아니 어떤 점에서는 포로 1세대들의 추억이었던 당시보다 더 안정적인 삶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처참하게 황폐하여진 유대로 귀환해야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오래 터잡고 살던 곳에서 이사만 하게 되어도 전날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시집가기 전날밤 내일이 두려워 울먹이는 신부의 마음처럼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 아무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데다가, 이미 하나님보다 바벨론이 더 우월해 보이는 현실에서 하나님을 향해, 찬란해보이는 바벨론을 등지고 길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무런 보증 없이 약속하나 믿고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도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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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선지자는 귀환의 길 앞에서 경험하고 있는 ‘두려움’을 맹인의 눈과, 못 듣는 사람의 귀, 저는 자의 발, 말 못하는 이의 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장애는 그때나 지금이나 당사자에게는 힘에 겨운 고통입니다. 장애는 소망없이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두려움, 그리고 이런 삶이 나아질리 없을 것이라는 체념과 공동체의 낙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찬 어찌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본문속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야고보 사도도 이런 장애와 질병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찬송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_ 5:13
선지자와 사도들이 절망하지 마라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말할 수 있었던 근거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이사야는 그분이, 그분의 날이 오고 있다(4)고 말하고, 사도는 주의 강림의 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8)고 말합니다. 주님이 오시면 모든 현실은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소망의 메시지라도 여전히 ‘현실’에 눈이 멈추는 순간,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맥이 풀리고 선 다리에 힘이 빠져버리고 맙니다. 정말 그렇게, 정말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요 ? 믿음을 붙들고 매일을 씨름하며 살고는 있지만, 우리도 현실앞에선 여전히 이 질문을 떨쳐내지 못하고 맙니다. 자신앞에 세례를 받으러 나오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보복과 심판의 날을 보게 되었던 세례 요한도 우리와 똑같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던 그는 결국 헤롯왕에게 거슬려 감옥에 갇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날을 끌고 오셨지만, 여전히 세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암담한 현실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강직하고 늠름했던 그였지만 슬그머니 두려움이 올라옵니다. 그는 제자들을 통해 예수께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시오리까 ?’ 그의 신념이 어느새 흔들리고 있습니다.
요한의 질문을 받으신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_마태복음 11:6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믿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들어도 여전히 현실과 믿음의 불일치로 인한 당혹감은 곧잘 씻겨내려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언제나 ‘지금’만 볼 수 있고, ‘지금’에만 멈추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라바를 선택하고 도리어 예수를 내어주어 죽게 만들었던 군중들도, 그를 비난하던 이들도,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은 이들도, 세례 요한도 모두 예수로 인해 ‘지금’ 실족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으며, 우리도 그렇게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현실’ 앞에 서있는 우리의 한계라고 해야할까요 ? 하지만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 이런 회의가 완전히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그때 마다 용기를 내어 바른 답을 선택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믿음과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기를 기도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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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요 ? 너무나 당연한 것 같지만, 현실안에서 들려오는 회의를 향한 답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때만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족함’이라던가 ‘넘어짐’이란 것이 사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지 못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들,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의 자리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현실의 터위에 세워졌던 것들입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들은 모두 공허한 이상주의자, 현실부적응의 몽상가들일 뿐입니다. 현실만 보게 된다면 이사야의 예언은 틀렸습니다. 귀환한 현실은 고통이었고, 이스라엘은 늘 이민족에게 자유를 빼앗기며 살았습니다. 요한의 메시지도 틀렸습니다. 요한은 결국 헤롯에 의해 허무하게 살해당했고, 그가 바라보았던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도 틀렸습니다. 그들은 매일 재림하실 주님을 바라보며 살았지만, 그들의 형편은 나아진 적이 없고, 그렇게 죽어갔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들 앞에 서 있었다면 똑같은 믿음을 외치고, 살아낼 수 있었을까요 ?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현실’과 ‘지금’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평가하고 해석한 결과들일 뿐입니다. 이런 안경을 쓰고보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한계 밖에 계시니 결국 늘 ‘나’만 보이게 만듭니다.
그들은 모두 처해있는 현실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사야는 폐허만 남은 그 땅과 현실에 찾아오실 하나님을 보았고, 요한은 자신앞에 나와 세례를 받는 청년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날을 보았으며,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늘상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 손에 만져지는 것, 지금과 현실이라는 한계안에서만 살아가는 땅 위의 사람들에게 전혀 낯설고, 새로운 경험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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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외침을 다시 들어봅시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_이사야 35:5~6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여기에서 온 것입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_마태복음 11:4b ~ 5
‘하나님이 오실 때’,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나타날 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이 오시면, 하나님이 오시는 곳에는 지금까지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기쁨과 회복, 환희가 넘쳐나게 된다 ! 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이사야나 예수님의 이 외침을 들으셨습니까 ? 이 말씀안에서 여러분도 넘치는 기쁨을 경험하실 수 있으십니까 ? 사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삶 가운데 기쁨이나 회복,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모양은 제 각각이지만 따지고보면 저마다 이것을 이루겠다는 몸부림입니다. 문제는 우리 힘으로 이것을 얻을 수도 누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슷한 것을 찾아 헤매이고, 그런 것을 행복이라 여기며 만족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들 중에 하나님 아닌 모든것이 이런 것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본문속에 비유된 이들에게 있어, 어떤 것이 복이나 기쁨, 행복이 될 수 있겠습니까 ? 돈을 많이 번다든가, 명예를 얻는다던가, 심지어 빼앗긴 나라를 돌려받는 것도 그들에게는 행복이 아닙니다. 그저 영벌처럼 여기며 살던 장애가 회복되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현실’의 자리에서는 결코 경험해 본적도 없고, ‘지금’의 시간안에서는 결코 꿈꿀 수 없던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만이 찾아오시면 가능해집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불치의 질병처럼 소망없던 ‘현실’의 감옥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고, 그 안에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놀라운 구원의 기쁨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그들은 드디어 외칠 수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일이 있었구나 ! 정말, 그렇구나 !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의 목표가 여기에 있습니다. 죽음을 선고받고 두려움과 체념속에 시한부의 삶을 사는 이라도, 치료받을 수 있고, 나을 수 있는 신약이 개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죽음이 아닌, 회복을 향하며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 아 ! 이런 기쁨의 날이, 이런 감격의 날이, 이런 역전의 날들이 오고 있구나 ! 하나님이 오실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그 일들을 예수 안에서 발견해 내는 것 ! 이것만을 ‘믿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약속안에, 그 소망안에 삶의 걸음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구원의 이름이신 예수를 믿고 있으나 아직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온전히 맛보지 못하였습니다. 아직은 구원이 능력을 온전히 누리고 있지도 못합니다. 여전히 병든 자는 아픈 상태이고, 요한은 여전히 감옥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여전히 이 땅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지자들의 외침을 들었고, 우리의 삶을 향해 찾아오신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러니 매일의 삶, 매 순간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그 일 !’만을 바라보며 살 수 밖에는 없고, 또한 그렇게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를 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과 ‘오늘’에만 머무는 시선을 거두고,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고개를 떨구며 살아왔었기에, 이제는 고개를 드는 훈련을 해야합니다. 작은 종이 한장만으로도 눈 앞에 가까이 대면 세상 모두를 가릴 수 있는 법입니다. ‘너머’를 보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지금’이라는 종이를 치워내야합니다. 원래 이렇게 살던 사람처럼 살지 마십시오. 지금까지는 내 마음과 생각이 가져다주는 것만 현실로 여기며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며 살아야만 합니다. 더욱 더 믿음의 눈을 크게 뜨실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목적지가 분명하고 믿을 만하다면, 아직은 닿지 못하였고 아직은 이루지 못하였을지라도 비록 힘들더라도 내딛는 걸음이 날마다 그곳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무나 힘겨워 ‘조금 더’, ‘조금만 더 멀리’, 그렇게 안타까운 신음을 내뱉으며 살던 삶이라도, 어느새 이미 ‘저 멀리’라는 시간앞에 와있고,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다보면 결국 어느 순간 ‘내일’에 맞닿아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런 날이 우리에게 찾아와 줍니다. 아니,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 주시는 주님이 그 날을 우리 삶으로 끌고 오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말로 확신을 가지라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_갈라디아 6:9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있다면, 오늘 이곳에서부터 그 나라를 살아내야만 하는 법입니다. 살기 시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나님 나라는 더디 오더라도 살아내는 이들에게 찾아오는 나라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반드시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이런 삶을 믿음의 삶이라 부르며,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소망과 행복은 이런 삶안에 넘쳐납니다. 그리고 무엇도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선물을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런 경험의 고백으로 오늘도 목사로서의 직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의 목사라는 현실을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안스럽게 보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불행하지 않습니다. 지금 써야 할 돈이 없다는 것이나, 교회가 커지지 않았다는 것,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맛보게 된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만 주어지는 구원의 행복을 뺏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기쁨을 맛보고 계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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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오실 그이가 당신이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요한의 실족을 보며 아무리 단단한 사람이라도 무너트리고 마는 현실의 엄중함에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나도 또한 그렇다는 자괴감에 고개숙이지도 마십시오. 주님은 ‘오실, 그이가 당신이십니까 ?’ 라는 부끄러운 우리의 질문안에서도 ‘현실’이라는 암담함을 벗어나려는 영혼의 갈망과 꿈을 발견해 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경험하게 되는 복된 삶의 자리에 서고 싶으십니까 ? ‘현실’의 터위에서 예수 생명, 예수 구원의 지경을 통과하고 싶으십니까 ? 그렇다면, 오늘 다함께 시편 기자의 노래를 함께 부릅시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대림절 셋째주일 응송인 시편 146편에서 시인은 이 말로 그의 노래를 시작합니다. 할렐루야 ! 라는 말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현존앞에 서는 것입니다. 어둠, 실패, 암담한 현실에 짓눌리고 있을 때, 그 무게가 아무리 무겁더라도, 이 고백을 잃지 않고 우리 입술에서 외쳐질 때 !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앞에 계심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신을 깨워내려는 시인의 갈망이 읽어지십니까 ? 여러분도 그렇게 현실에, 마음에 들어오는 생각에 온통 짓눌려버린 여러분의 영혼을 깨우고 계십니까 ? 하나님 앞에만 서면 주인처럼 행세하던 모든 사특한 것들도, 두려움의 그림자도 사라져버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만 드러나는 기쁨과 환희와, 행복이 밀려들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비록 ‘지금’, ‘오늘’, ‘현재’라는 언어에 갇혀 고통을 경험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어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 절망의 어둠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신앙의 고백안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와 달리 말씀 가운데 한 구절을 덧붙이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메시야의 복된 소식, 하나님이 이곳에 임하셨다는 그 기쁨의 소식은,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발견하고, 구원을 경험하는 이들이 전하는 소식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버둥거리며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 소망을 몽땅 잃어버린 삶을 구원하고, 반복되어지는 모래늪같은 ‘지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은 절대적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오실 그이가 당신이십니까?’ 라고 되물을 수 밖에 없는 메시야를 잃어버린 현실앞에서, 우리는 ‘할렐루야’ 라고 외쳐야만 합니다. 그렇게 바로 여기에 하나님이 임하셨음을 선포하며 소망을 가진 자 답게 사는 겁니다.
대림절 세번째 주일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함께 살아가는 이 땅에도 이 말씀이 들리워지길 소망합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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