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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 신년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1. 4. 22:09
성서일과
- 1독서 예레미야 31:7 ~ 14
- 2독서 에베소서 1:3 ~14
- 3독서 요한복음 1:1~18
- 응송 시편 147:12 ~ 20
설교 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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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
1
평일에도 가끔씩 교회를 찾아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방문자들이십니다. 특히나 매서운 겨울에 찾아오시는 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도움을 얻어보겠다고 작은 교회의 문을 두드리며 찾아오시는 분들의 사정이 그러하고, 그렇게 내미는 손길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또 그렇게 빈손으로 돌려보내야만하는, 할 수 있는 것, 해야만 하는 것을 할 수 없는 ‘없슴’이 서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나눠줄 것이 있을 때에도 돌아서 가시는 모습속에서 느끼는 감정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정말 한끼에 목말라 밥 한그릇이 아쉬워 찾아오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개중에는 술이라도 사먹으려 속는 돈 몇푼얻어볼려고 듣는이의 마음이 무거워질 만큼 절절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횡재한 듯한 표정으로 돌아가시는 뒷모습이 왜 그렇게 아련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나누는 마음을 닫을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해야할 몫만 감당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드는 이 아련함은, 아프고 비굴하게 살아야하는 우리네 인생이 속상하고, 또 한편으로 저 한끼의 돈이나 식사를 채웠어도 내일이면 또 배고플 것이라는 암담함이 공감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과 현실은 나누어 주고 있는 우리라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두 오늘을 채우면 내일 또 다시 배고프고, 오늘을 일어서면 내일 다시금 넘어지는 생을 살아갑니다. 하늘의 불을 탐하다 땅으로 추락해 버린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 실존입니다.
2
누구도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우리는 모두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갑니다. 땅이라고 하는 ‘현실’을 살고 있는 것 자체가 늘상 결핍되고 배고픈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땅으로부터 얻는 것들, 먹는 것, 입는 것, 모두가 다 오늘 있다가 내일은 사라져버릴 것들 뿐입니다. 이런 것안에서 살고, 이런 것들을 먹고, 이런 것들을 붙들고 사는 우리도 역시 결국은 그렇게 사라질 존재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먹는 그것이 그 사람을 이루는 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래 아무것이나 함부로 먹지 말고 섭식을 잘해야 몸이 건강하다는 말에서 온 것인데, 이 말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육이든, 영이든 무엇을 먹고 있느냐에 따라 그 건강이나 상태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기름지고 몸을 상하게 하는 음식을 즐겨먹으면 건강이 상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도 거짓되고, 허탄한 말을 자꾸만 채우면 깨어지고 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건강이 상하고 나면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 우선 먹는 것을 바꾸는 겁니다. 한의학에서는 병을 다스리기 전에 체질을 바꾸는 약을 먼저 쓰는 것이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체질을 바꾸는데에도 우선순위가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_요햔삼서 1:2
으레 범사가 잘되고, 삶이 잘되면, 그 다음에 영혼의 문제도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늘 영혼이 잘되어야만 즉 건강하고 바르게 서야만 범사도 잘된다고 말합니다. 늘 두려움과 근심으로 가득차있고 불안감에 사로잡혀있는 것처럼 정신이 건강하지 않다면, 영혼이 건강하지 못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고 죄를 향해 달려간 ? 여러분은 정신과 영혼이 깨어있고, 강건하고, 잘되어질 것을 소망하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삶과 체질을 바꾸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첫번째 길입니다. 따지고 보면 믿음 생활이라는 것도, 보이는 것으로 대변되는 육적인 체질을, 자꾸만 보이지 않는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 영적인 체질로 바꾸어 가는 것 뿐입니다.
3
영적인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면, 내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없어지고 사라져 결국은 배고픔의 자리로 내몰리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될 뿐입니다. 몇푼의 돈을 받아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가벼운 걸음이 내일 다시금 아픔이 될지 몰라 매일을 되풀이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보이는 당장의 삶에 매몰되어버린 채 살아가는 이 걸음을 우리 스스로는 결코 멈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이기에, 자꾸만 땅을 쳐다볼 수 밖에는 없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제대로 설 수 없으면 무너지고 망가질 것만 같아서 그렇습니다. 두려워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고, 제대로 서 있는지 불안하고, 저 앞은 어떨지 무섭습니다. 온통 삶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내일이면 사라질 것들만 보이니 이 불안함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땅이 끌어당기는 힘을 거부할 수 없는 불행한 인생입니다.
구약본문 예레미야 31장은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쌓여 언제라도 꺼져버릴 듯한 이스라엘의 슬픈 현실을 보여줍니다. 마치 우리들 삶의 단면처럼 보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하고 앗수르의 식민지에서 이주되어 온 이방인들로 채워져있습니다. 31장 8절에서 이야기하는 남아 있는 이들은 앗수르에 의해 좇겨나지 않고 남아 있는 백성들,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모든 기대가 사라진 사람들입니다. 남아 있는 소수의 사람들안에서 유명무실한 이스라엘의 이름이 발견될 뿐입니다. 하나님 백성인 그들의 삶이 어쩌다가 이렇게 처참하고 불쌍하게 되었는지 안타깝습니다. 유다도 당장은 망하지 않았지만, 언제 강대국의 손아귀에 떨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사정은 마찬가지로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런 현실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흩어진 백성을 모으고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그들을 지키시고 구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이다’ _ 31:13
기뻐할 것이 모두 사라져버린 이 황폐한 땅에, 다시 즐거움의 노래가 드리워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기뻐할 수 있게 되는 이유가 12절입니다.
-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삶이 윤택해지고,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회복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양떼나 소떼가 아무리 많아진다고 해도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쳐나게 된다고 해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나 유다의 백성들은 불행합니다 현실은 암담합니다 열국의 힘에 의해 언제 망할지 모르는 현실에서는 이런 것들은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예언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다시금 기쁨과 즐거움의 노래가 불리워진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4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의 정황도 예레미야가 예언서를 기록하던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라고 하는 제국의 힘이 지배아래에 있었습니다. 권세와 힘앞에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런 삶의 정황속에서도 기쁨과 즐거움의 노래를 불러야할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예수의 복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그 이유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한끼의 식사뒤에 찾아오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이 아닌,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기쁨과 자유를 예수안에서 발견해 냈습니다. 오늘 우리가 먹는 것들, 우리가 입는 것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매달리는 것들 중에 과연 내일이면 직면해야하는 삶을 책임져줄 수 있고, 근심과 염려, 짙은 어둠속에서 우리 영혼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 오늘 우리가 얻으려 그것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영혼을 채우던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
앞서 언급했던 예레미야가 전한 희망의 메시지를 다시 읽어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남겨진 이들과 유다 백성들의 삶에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들, 곡식과 기름과 양떼와 소떼의 회복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했지만 그런 이스라엘의 구원은 역사속에서는 성취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예레미야가 전한 예언은 무가치한 것일까요 ?
‘언어도단’ [言語道斷] 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 무엇인가를 도저히 말로 표현해 낼 수 없어 할 말이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을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런 언어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천국에는 온갖 보화가 가득한 곳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그런 것들은 모두 내일이면 사라질 것들, 이 만큼 있으니 행복할 이유였던 것들이지만 어느 순간 저 만큼 가지고 있지 못하니 불행함을 경험하게 만드는 이유가 될 뿐입니다. 땅위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상대적입니다. 그러니 그런것들이 기준이 되는 행복도 늘 상대적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오로지 비교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들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땅 끝으로 흩어진 이들을 모으시는 분’이라는 선언에 있습니다. 빼앗기고, 깨어지고, 소망마져 끊어진 남겨진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말입니다. 예레미야의 영적인 감수성은, 피폐한 삶에 찾아와계시는 하나님안에서 절대적인 구원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비어진 곳간이 채워지고, 먹을 것이 넘쳐나며, 양떼와 소떼가 채워지고,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는 것, 병든 육체가 나음을 입거나, 장애가 치유되는 방식의 구원을 거부했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본질적인 삶의 구원을 경험할 수가 없다는 것, 제국이 제시하는 이런 구원의 방식은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다시금 나락을 떨어져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들은, ‘자아의 죽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나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는 길을 통해서 본질적인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구원자가 됨으로 늘 불안하고, 늘 두렵고, 늘 불만스럽고, 답답하고, 허무하고, 섭섭한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모든 수고로부터 벗어나 하나님만이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날마다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이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 삶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아내는 것 말입니다.
5
바울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경험이 무엇인지를 에베소의 교우들에게 써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 _에베소서 1:3
‘신령한 복’ ,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하늘에 속해 있는 신령한 복이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주님이 되었을 때, 우리가 믿음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 우리안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능력이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부자가 된다거나, 건강해지는 것도, 성공하고 평안을 얻는 것들은 예레미야가 말했던 양떼가 채워지고, 소떼를 얻는 것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굳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교양을 쌓고 처세술을 배우는 것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것들이 없는데도, 여전히 비어있는데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말씀만이 이루실 수 있는 일들, 그 구원이 예수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만 있는 것이 구원의 능력입니다.
예수 안에서 생명을 경험한 사람들은 무언가 다릅니다. 비록 오늘을 살고 있는 겉모습은 그렇게 볼품없어 보이고 삶도 별볼일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오히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능력,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구원의 능력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삶이 마음 먹은대로 풀리지 않아도, 자꾸만 엉망이 되어가는 것 같고, 계획은 무너지고, 살림은 나아지질 않고, 육신은 약해져만 가고 있어도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지는 겁니다. 양떼가 없어도 괜찮고, 소떼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으니, 이것이먀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이라고 외치는 이유입니다.
저는 예수님 때문에 이 땅이 보여주는 어떠한 권세, 어떠한 명예, 어떠한 부유함에도 기죽지 않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
사도요한은 예수님이야 말로 삶을 짓누르는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 되시며,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운명안에 담아내신 하나님의 아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구원자이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담겨있고, 그 안에 구원이 담겨 있습니다. 오직 그만이 우리의 삶을 찬양으로 채울 수 있는 ‘복된 소식’입니다.
‘복음’은 말이 아닌, 능력입니다. 능력은 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운명안에 오롯이 담아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 살아가실 때, 천국가는 그 날까지 날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기도하고 찬양하며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안에 있을 줄 믿습니다. 바울이 외쳤던 이 고백이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경험할 때에 터져나오는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_고후 6:8b~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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