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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12 주현후 첫번째 주일 | 주의 수세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0. 1. 9. 23:20

    성서일과

    • 1독서 이사야 42:1~9

    • 2독서 사도행전 10:34~43

    • 3독서 마태복음 3:13 ~ 17

    • 응 송 시편 29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open?id=11eQiCC-e1xBC0xM2UKWTVhWVgxD-9loR = '클릭' 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0TJVTg7FbI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 이 가야하는

     

    #

    오늘은 주현후 첫번째 주일이며, 주의 수세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성탄 이후의 절기가 마쳐지고 새로운 절기가 시작되는데, 그 핵심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입니다.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1월 6일을 ‘주현절’로 지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점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구원의 종으로 선택받은 그리스도이심이 세상 가운데 드러나셨던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축일이 '주현절'입니다. 아직도 어둠의 지배가 두터운 세상을 뚫고 하나님의 구원이 빛처럼 드러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분을 드러내셨던 이 날은 죽음이 지배하고 있던 어둠의 권세를 향한 하나님의 선전포고의 날입니다. 마땅히 만민이 기뻐해야하는 날입니다. 이제 만민을 구원하시고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말했던 ‘하나님의 종’에게 놓여진 숙명의 길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종’이란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요 ? 언제나 주인에 의해서만, 주인을 기준으로만, 주인의 뜻을 따르는지 아닌지로만 모든 것이 정의되는 존재가 바로 ‘종’이라는 말입니다. 제 멋대로, 제 뜻대로 행하는 이는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이 말의 뜻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이루신 분이시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일은 무엇일까요 ?

     

     

    #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사명자들입니다. ‘사명자’라는 말은 이들의 직임이 단순한 자신을 위한 직능이나 직업으로서가 아닌, 특별한 명령을 부여받고 이것을 이루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들입니다. 분명히 주어진 역할과 활동은 백성들을 향한 것이었음에도, 이들은 모두 ‘백성들의 지도자’가 아닌 ‘하나님의 종’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워졌습니다.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이기에 이들이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이루어가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아야합니다. 그때에만 그들의 직임과 지위는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만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어떤 사특한 이익이나, 불의한 위협앞에서도 주눅이 들거나 의기소침해지지 않을 수 있으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앞에서도 기꺼이 자신을 낮출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사역의 본질로 삼을 때 얻게 되는 유익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거나 그런 인정으로부터 소외될 때면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회의가 찾아오기도 하고,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지만 한순간에 밀려드는 이런 감정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에게 찾아오는 위기이고 시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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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 하나님의 일을 사명으로 삼는 종의 길은 결코 제 힘만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_스가랴 4:6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영이 임해야만 하나님의 종이 되고,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를 인정하셨다는 말일텐데, 대체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일까요 ? 다윗이나, 엘리야, 엘리사, 베드로, 요한, 바울은 무언가 남 다르고 출중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일까요 ?

     

    •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 즉 …’ _이사야 42:1

     

    이사야의 예언을 읽어보면 주어진 정보는 오직 한가지,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뽑고,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 뿐입니다. 다른 기준이나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며, 그래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도, 하나님의 영을 받을 사람도, 그리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도 모두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 제 아무리 거룩한 척, 올곧은 척을 하고, 용기 있어 보여도 우리의 그릇은 연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나 자신에게 조차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런 존재가 우리입니다. 그저 하나님이 ‘그렇다 !’ 라고 여겨주시는 것 말고는 성립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의 부르심의 ‘종’이 되는 것도 또한 ‘은혜’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

    이사야 42장 3, 4절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종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의 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종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정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정의라고 말하면 무언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법적인 개념을 생각하곤 하지만, 하나님의 정의인 ‘미슈파트’라는 말은 꺾거나 꺼트리는 죽임의 일이 아닌, ‘살려내는 일’을 뜻합니다.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살림’의 일이니 하나님이 세우시는 종이 해야하는 일도 또한 ‘살려내는 일’ 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사렛 출신이신 예수님이 주현 이후 공생애 기간 행하셨던 일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갈릴리와 유대 땅에 버려지고, 상처받고, 병들고, 귀신들린 이들을 고쳐내셨지요. 절망의 자리, 암담함에 내몰려 죽음앞에 서 있는 이들을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생하도록 하시는 일을 하셨고, 그 최종 목적지는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던 일들을 뜻하는 ‘케리그마 !’는 그가 죽기까지 이루어냈던 일들이 ‘생명 살림’인 ‘구원’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그의 온 삶안에 여호와의 종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을 고스란히 담아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만이 메시아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보냄을 받았던 베드로는 그곳에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설교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화평의 복음’(36)이셨고,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42)으로 세워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수님께 주어진 하나님의 일,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화평의 복음에서 ‘화평’이라는 한자어는 평온할 ‘평’과 화목할 ‘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화목할 ‘화’자는 ‘벼화’자에 ‘입구’자가 합쳐져 있는 모양입니다. 말 뜻 그대로 밥상머리를 함께 할 수 있는 관계, 끼니를 나누고 삶을 함께 할 수 있는 사이를 뜻합니다. 밥상을 함께 하려면 조금 잘난 사람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못난 사람도 주눅들지 않고 나아와야만 합니다. 밥상은 더 잘난 것도 없고, 더 못난 것도 없이 하나되는 자리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의 사이가 틀어져버려 ‘하나님 없슴’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우리는 하나님과도, 타인과도, 나 자신과도 ‘함께’ 할 수 없는 불행한 사람들, 평화할 수가 없는 사람들, 성경의 정의대로 ‘죄인’일 뿐입니다.

     

    힘없는 동물을 먹고 사는 생태계처럼 타자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불화’한 세상이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강한 사람이나 연약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서러움 당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함께 한 상에서 먹을 수 있도록 풍성하게 주어져야만 합니다. 더욱이 내것을 내어줄 수 없는 이기적 우리이므로 희생당하는 먹이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생명의 떡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하나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으니 비로서 우리는 주안에서 평화하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분안에 있다는 것은 ‘나와 다름’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베드로는 하나님의 화평의 복음이 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세우신 세상의 재판장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재판장이라는 것은 최종적인 심판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심판의 주님을 어떻게 그리시고 있습니까 ? 예수님이 심판주가 된다는 것은 보복적이고 형벌적인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세상의 가치에 가리워져있지만, 종말이 오면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느냐 누리지 않느냐의 가름과 기준이 되신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자와는 달리, 그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바로 심판인 것입니다.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 _요한복음 17:3

     

    그러므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흉내를 내며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하나님 백성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충분한 기쁨이 되셨습니까 ?

     

     

    #

    오늘 우리는 도무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라 할 수 없다고,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불의함과 불법함과 패악함에 절망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소망이 없으니 다 팽개쳐버리고 싶고, ‘이런 세상은 또 없다’고 원망하고 싶은 적도 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이 내 인생이라고 한숨 지을 때도 있지 않았습니까 ?

    예수께서 이사야가 예언했던 여호와의 종, 복음서 기자가 보았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현’하셨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종들이 드러나는 때는 불의와 불법이 하나님의 정의인 ‘미슈파트’를 무너트리던 때, 어둠이 깊어짐에 따라 세상이 모든 소망을 잃어버리는 죽음의 때 ! 주님은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여호와의 종은 생명이 시들어가고, 소망이 깨어져버리고, 절망이 집어삼키우는 그런 세상을 향해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건강한 세상이 아닌, 병들어 있고, 죽어가는 이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말입니다.

     

    •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 _마가복음 2:17

     

    사도 베드로는 병들어 있는 세상, 죽어가고 있는 세상을 살려내기 위해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의 케리그마를 함께 듣고 있는 우리들이야 말로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주님의 종이 아니겠느냐고 되묻고 있지 않습니까? ‘부름을 받은 사람’ 그리고 ‘보냄을 받은 사람’ ! 이라는 말은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교회’의 정의이기도 합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해야할 다른 일은 없습니다. 세상밖으로 부름을 받아, 세상을 향해 보냄을 입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며 사는 것만이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복음서는 주현절, 예수님의 현현의 시작이 ‘세례’로부터 비롯했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는 내적인 욕망 뿐만 아니라, 세상의 영광에 천착하고 또한 그 권세에 두려워하던 자기 중심적인 ‘나’와의 결별을 뜻하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걸음, 돌아서지 않고 오롯이 하나님의 일만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의지, ‘죽음’과 ‘부활’의 경험이 세례 안에는 고스란히 서려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이미 죽음을 넘어선 이들만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의 종으로서 어둠을 뚫고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어둠을 바라보면서 암울해 하지 마시고, 내 자신을 바라보며 실망하거나, 세상의 화려함에 주눅들지도 마십시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향하여 죽은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

    주어진 상황이나 여건, 나의 삶과 살아가야할 세상을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세상을 빛으로 드러내기 위해 당신의 종으로 우리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반드시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은 주님이시고, 전적인 주님의 선하신 의지에 따라 보냄을 받은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죽음에 물들어 있는 어두운 세상을 향해 늠름한 모습으로 걸어가시는 빛 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힘과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보내고 계십니다. 어둠을 물리치고 두려움을 이겨내며 빛을 잃어버린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우리를 당신의 종으로 보내시는 주님안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내신 이의 증인으로서 살기만 하면 됩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우리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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