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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26 주현후 셋째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0. 1. 24. 23:27

    성서일과

    • 1독서 이사야 9:1 ~ 4
    • 2독서 고린도전서 1:10 ~ 18
    • 3독서 마태복음 4:12 ~ 23
    • 응송 시편 27:1, 4~9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open?id=1Bqxm_cw7qt-PqVazIwauoq-QZG-t2_Zq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 https://youtu.be/420v3fIHkAc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을 낚는다구요 ?"

     

     

    1. 고기를 낚는 사람은 뭐라 부를까요 ? ‘어부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에는 여기에서 한걸음을 나아가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경천동지할만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리리 바다에서 물고기 잡던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씀이 쉽게 와닿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여전히 예수안에서 우리가 해석하고 발견해야할 하나님의 역사는 무궁무진하기만 합니다. 또한 예수를 믿고 있는 오늘의 모습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발견해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고, 나라가 망하고, 공동체가 깨어지고, 모인 사람들이 흩어지고, 삶이 망하는 같아도 사실을 분명하게 붙들고 있다면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하고 교회 생활이 아무리 익숙해 졌다고 하여도 기독교 신앙이 변죽만 울리고 있는 셈일 뿐입니다. 대체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구원해내시는 예수는 누구이십니까 ?


    2. 오늘 성서일과 복음서의 본문의 시작인 12절은 예수께서 갈릴리로 이동하셨다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인 싶습니다. 예수님 보다 앞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던 요한에게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13절을 보니 그후에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가서사셨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떠나시기 바로 직전 사건으로 소개된 것은 본문의 바로 앞단락인 유명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아로서의 소명을 받고,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통과했다면 이제 곧장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셨어야 합니다. 메시아에 걸맞는 사역의 중심지는 예루살렘 쯤은 되어야 같은데 예수님은 중심에서 벗어나 변방으로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아니, 그곳을 잠시 머무는 곳이 아닌,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할 곳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

      갈릴리는 유대 북쪽 변방입니다. 오늘의 기준에서 보면 출세나 성공과는 거리가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메시아로서의 명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헤롯의 위협을 피해 도망을 것일까요 ? 하지만 십자가 처형을 향해 달려가시는 예수의 공생애를 볼때 이것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3. 로마의 폭정에 시달리던 당시의 유대사회와 그런 세상을 살아야하는 힘없고 배경없는 일반 백성들의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고 처참했습니다. 제국의 세금에 더해, 유대사회에서 일반 서민들이 감당해야하는 조세의 부담이 수입의 40%에서 많게는 70%까지 치닿고 있었다고 합니다. 헐벗고 굶주린 가난한 이들의 삶이 불쌍하기만 합니다. 사실 땅을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에 겨운 일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 내일은 과연 것인가라고 물을 밖에 없는 삶이란 그냥 고통일 뿐입니다. 더욱이 한끼의 식사를 걱정해야만 하는 이들에게가난이라는 말은 결코 누군가의 낭만 정도로 이야기 없습니다.
      마태의 눈에는 로마의 피지배지로 다함께 힘들던 그때에도 유대의 변방인 갈릴리 부근은 가난하고 불쌍한 땅이었음에도 소명을 받으신 예수의 걸음이 이곳을 향하였다는 것은, 메시아 ! 하나님의 구원자가 찾아가는 곳은 이런 곳임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땅에서 가난하여 하늘의 것으로 채워주지 않으면 않되는 사람들, 하늘의 위로가 아니면 땅에서의 슬픈 눈물이 마를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분이 하나님의 구원자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14절에서 예수의 걸음이야말로 이사야를 통해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전합니다. 오늘 성서일과인 이사야 9장입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_이사야 9:1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 구백년이나 이전의 예언입니다. 히스기야의 때로 추정되는 때는 아람이 북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유다를 침공하던 우환에 더불어, 불의한 탐관오리들과 기득권자들이 기승을 부리던 절망스러운 시대였습니다. 흑암! 짙은 어둠과 절망으로 뒤덮였던 세상에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때에도 갈릴리는 여전히 흑암과 어둠에 덮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쪽 변방 가버나움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의 걸음안에서 마태는 마침내 하나님께서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이사야가 전한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안에서 성취되고 있음이 보이십니까 ?


    4. 빛을 발견하는 기쁨을 이해하려면어둠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눈앞이 캄캄하다라는 말이있습니다. 너무나 익숙하게 들어왔고, 우리가 사용했던 말입니다. 어떨때 쓰는 말인가요 ? 뜻이 좌절되거나,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을 , 또는 가능성이나 소망이 없는 절망앞에 섰을 , 혹은 감당할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사용하는 말입니다. 자녀들이 시험에 떨어졌을 , 사업이 망했을 , 가난한 삶이 나아질 기미가 없을 , 건강을 잃어버렸을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일들 앞에만 서면 그렇게 쉽게 어둠과 절망, 흑암에 사로잡히고 말게 되는 것일까요 ? 성경의 정의는 명확합니다. 생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서, 건강이 없어서, 유명해 지지 않아서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믿음이 없으니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나아지고, 소유가 많아진다거나 유명해 지는 것만으로는 삶이 행복해질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런 것이 없어도 불행해져서는 않되는 것이어야만 함에도 여전히 우리는 불행합니다. 괴로워하고 슬퍼합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어둠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지점에서예수를 믿는다는 무엇인지를 다시금 직면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께만 있으며, 예수야 말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생명이 있는 곳에는 어둠은 사라집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아를 발견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고, 삶이 윤택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강화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적으로 의존하는 겁니다. 사실을 모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이미 들어왔고, 이미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예수님을 알고 있고 믿는다고 말하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자기 자신을 향한 열망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5. 내가 있는 것이 믿음의 자리인지를 확인해볼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삶에이냐는 물음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예수가 생명이시다라거나, 모든 생명이 주님께 있다는 고백은 예수의 생명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는 말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 예수 안에 하나님만이 하실 있는 일과 능력이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가난하고, 깨어지고, 뒤틀리고, 아프고, 상한 , 그대로 어둠이 가득한 것만 같은 그런 생을 지나고 있을 , 그런 답답하고 어두운 인생을 밝히는 빛으로 예수를 경험하는 ,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둠에 삼켜지지 않을 있었고, 입에 찬양이 터져나오고 있고, 불평과 불만이 아닌 감사가 외쳐직곡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 기독교신앙이 말하는믿음입니다. 예수 생명이 나의 영혼과 삶을 비추지 못한다면, 내가 예수를 믿지 못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어둠속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두려움에 삼키워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둠을 밝히는 빛되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
      어둠에 짓눌려 살아가던 갈릴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찾아가셨던 예수께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17절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어둠의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으니 회개하라는 복음의 선포였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이 상투적으로 들리지 않기를 빕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의 외침을 들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의 빛이 임한 순간부터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시작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폭력의 땅에서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방식으로 예수님 안에서 어둠을 통치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바실레이아 우라논이라고 불리우는 천국의 핵심은 불의함이나 사특함이 없는 공평과 정의이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저는하나님의 통치라는 말속에서 통렬한 구원의 기쁨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선포했습니다. 불의한 땅에 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 로마의 정치세력이나 유대의 권력자들은 예수를 싫어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기득권을 부정하고 그런 삶의 방식이 불의하고 악하다는 것을 들춰내는 예수가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키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여기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백성답게 사는 ,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하셨듯,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메타노이아라고 불리우는회개입니다. 지금까지 살던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6.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예수의 빛이 여러분의 삶을 비추면서 이전까지의 반응과 삶의 방식이 바뀌었습니까 ? 세상을 보는 눈은 어떻습니까 ? 증오와 미움, 시기와 질투, 나와 관계 없는 이들에게 무관심해 하는 마음은 어떻습니까 ? 내게 주어진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습니까 ? 원망하고 불평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어떻습니까 ? 원수를 대하는 방식은 어떻습니까 ? 연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습니까 ? 나보다 힘이 없는 이들을 대하는 말씨가 아직도 매정하고 여전히 날카롭지는 않습니까 ?

      하나님의 통치 방식인 사랑과 자비와 연민, 공의와 정의가 삶의 가치가 되어 있습니까 ? 돈이 되지 않고, 성공으로 우러러보이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 혹시 세상이 말하는 권세가 부러워 속상해하지는 않고 있습니까 ? 정말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져도 괜찮습니까 ? 이상 어둠의 힘인, 세상의 부와 명예와 성공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의연해질 있다면, 이전까지의 경험과 생각과 상황을 따르던 걸음을 멈추고 말씀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회개 삶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예수를 믿고 따르며 사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힘이나 의지로는 삶의 방식과 본성을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성경의 정의를 거스를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회개의 삶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 빛이 임하는 ,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 통치의 기쁨을 발견하는 , 그렇게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은혜로 비추어주시는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것을 이루시는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_요한복음 6:29

      바울은 이렇게 나로서는 없는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 그것이야 말로능력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_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믿고 따르는 말고는 우리에게 다른 능력은 없다는 바울의 외침은 절절합니다. 사실 고린도교회는 바울, 아볼로, 게바, 예수 파로 나뉘어져있었습니다. 패를 짓고 당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모습, 너는 나보다 못하고, 나는 너보다 낫다고 하는 오만함이 교회안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은 사실을 이해할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안에 있는 나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통치의 방식대로만 살아간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니라,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 주인이어야 합니다 !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 예수로 인해 자기가 부정된 사람, 예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은 사람이라면, ‘ 다른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세상을 구원합니다 ! 복음은 우리를 구원합니다. 죽음에서 삶으로 건져내었으니 그러므로 나를 변화시킬 없다면 그것은 복음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하나님 나라로 대체되지 않는다면, 삶을 살아가는 목적과 힘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두려움의 이유가 세상의 힘이라면, 반대로 예수께서 기쁨의 근원일 없다면 아직도 복음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7. 예수님은 빛입니다. 주현의 빛이 당신의 삶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빛이 어둠의 땅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럴 없다고, 그런 일은 있을 없다고, 이렇게 밖에는 않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회개하십시오. 지금의 삶에서 돌이켜 회개하고복음 믿으십시오. 변화될 없으며, 나아질 없다는 절망의 언어에도 귀기울이지 마십시오. 나는 원래 이렇게 사는 사람이라는 자기 중심에서도 떠나십시오. 원망과 불평의 길에서도 떠나십시오. 그것이회개 합당한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만 믿으셔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힘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 그것만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길위에서만 되신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역사를 힘으로 삼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이제부터는 물고기를 낚아야만 있다는 이전의 방식에서 벗어나, 사람을 죽음에서부터 길어 올리는 예수를 저들의 인생의 길로 삼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배고픔과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내몰린 삶에서 벗어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 용기를 내어 돌이키십시오. 구원의 빛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을, 우리의 땅을 능히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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