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19 주현후 2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1. 17. 19:05
성서일과
1독서 이사야 49:1 ~ 7
2독서 고린도전서 1:1 ~ 9
3독서 요한복음 1:29 ~ 42
응송 시편 40:1 ~ 11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open?id=1JuA6pM6EYEgOoaCnLVBtZJQP6KUd-m-t = '클릭' 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 주일 예배후,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zPeZyCEsBL8 = '클릭' 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 * 주일 예배후,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
'내 이름 아시죠 ?' He knows my name.
1
예전에 어떤 작가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글을 씀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이냐? 는 제 질문에 주저함없이 전해준 답은 ‘글의 첫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것’이라는 겁니다. 첫문장이 어려운 이유는 앞으로 어떤 주제의식을 가지고, 어떤 글을 쓸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잡는 막중한 역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면 성경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창세기 1:1도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습니다. 그 한 문장이야말로 성경 저자의 의지와 뜻이 온전히 담긴 정수일 테니 말입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을 지탱하는 핵심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이 첫머리에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에게로부터 비롯했다’는 이 말은, 그가 또한 모든 것의 주인이시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 것입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 ! 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재물, 시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 전체, 우리 모두가 다 여기에 포함됩니다.
여기에서 유념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윤기가 나고, 그럴 듯한 인생 만이 아니라, 아프고, 마음 상한 삶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소중하다고 놓지 못함도 없고, 천박한 것도 감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안에서는 누구나 존귀하고, 누구나 용납받으며, 누구니 평안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셔서, 조건없이 주어지는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기쁨과 자유함을 누리실 수 있기를 빕니다.
2
‘내 이름 아시죠’라고 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본래 ‘He knows my name’ 이라는 영어 찬양입니다. 이 찬양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이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지으셨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셨으니 비로서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되어질 수 없는,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일 수 있는 것임에도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가볍고 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여하튼 이처럼 놀라운 성경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분들은 터무니 없다고 말하고, 그리고 아이들은 믿일 수 없다고 불퉁거립니다. ‘나를 낳으신 분은 우리 부모님이신데 ?’ 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내가 부모님에게서부터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답해 주시렵니까 ?
그런데 오늘 성서일과에서 만나게 되는 선지자 이사야가 자신의 정체성을 이 익숙한 고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 _이사야 49:1b
태에서 나를 부르시고,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는 말씀은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계획과 뜻안에 있었다는 것, 그의 의지가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이 말을 허투루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이 말씀은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분명하고 선명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는 이 말씀이 선명하게 들려지십니까 ?
3
하나님의 뜻안에서 세워졌으니 나는 더 이상 우연성에 기댄 허무의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매우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이사야가 이 놀랍고 찬란한 신앙의 고백을 했던 당시는 이런 고백을 할 만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때였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고양되고 드높아질 때라면 무언가 큰 일을 이루거나, 남에게 인정받거나, 바라는 것들이 잘 이루어지는 그런 때일텐데, 이사야는 지금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유다의 선지자로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하는 이였지만 이미 유다는 망하였고,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 추락했습니다. ‘주님께로 돌이켜라, 주님이 구원이시다’라는 그의 메시지는 모두 부질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셨다면 망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이미 망해버린 삶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리가 없습니다. 엎지러진 물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그의 메시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 사람들의 평가를 그도 압니다. 스스로도 자신이 없습니다. 4절에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힘을 다하였다’
모든 것이 허사였다는 상념의 말입니다. 그가 직면하고 있는 그 허탈감과 공허함의 깊이는 또 얼마나 깊고 날카로웠을지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우리도 이럴 때가 있지요. 아니 이런 일은 늘상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 다닙니다. 불의한 땅에서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믿음의 길이 이렇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은 이어집니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_4b
메시지 성경은 4절을 이렇게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했다 내가 한 일은 다 헛수고였다 평생을 애썼지만 내놓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최종판단은 하나님께 맡기련다 그분의 판결을 기다릴 것이다’ _이사야 49:4 메시지 성경
반복되는 시련과 실패의 경험, 더욱이 자신의 선지자로서의 정체성이 무의미함을 경험해야만 하는 허무의 밑바닥을 치고 일어서는 그의 믿음이 부럽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바로 하나님 경험의 차이입니다. 이사야는 이미 하나님의 전능성과 구원의 능력을 엿보았기 때문에 다른 것에 기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맛보고 경험한 사람에게 세상의 가치가 무의미해질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절대적인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겁니다.
4
세례 요한도 이사야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_요한복음 1:36
이사야는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았고, 요한은 예수님안에서 그것을 발견했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삶에 채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치는 일상속에서 하나님을 포착하는 영적인 예민함이 있던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놀라운 영적 안목입니다. 그런데 놀랍기는 하지만, 이런 세계를 발견하고 본다고 실재로 삶이 뭐가 달라지기는 하나? 뭐가 대수인가 ? 라고 되묻고 싶으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건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세계는 경험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그저 이사야의 외침과 요한의 말을 다시 전해드리는 것 말고는 제 일천한 능력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손에 잡히게 해드릴 자신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 이제 허기가 일어날 시간대인데, 원숭이 골이라든가, 바퀴벌레 튀김, 거위 간 요리가 드시고 싶지 않으신가요 ? 이것들은 사실 최고의 요리라고 불리는 것들이지요. 그런데 왜? 최고의 요리이고, 배도 고픈데 여러분은 침을 흘리지 않으실까요 ? 요리 이름을 들으면서 인상을 찌푸리기까지 하시는 분도 계신 이유가 뭘까요 ?
오히려 칼칼한 김치찌개나 구수한 청국장, 순대국이라든가, 갈비라든가 생각하시면 어떤가요 ? 이런 상반된 반응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바로 경험의 차이입니다. 맛을 보았으니, 그 맛을 알고 있으니 반응하는 겁니다.
이사야나 요한에게서 경험되었던 것들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거나,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고 하는 인식,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은 대단히 놀라운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에 대한 흔들릴 수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삶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믿을 때에 주어지는 이런 믿음에 사로잡히면 두려움도, 염려도, 슬픔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것은, 택함을 받은 자인 ‘종’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택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 뿐입니다. 종이라는 사실이 아닌, 누구의 종인지가 중요하고, 보냄을 받았다는 것보다 누가 보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 ‘누구’라는 말안에 권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보여주고 있는 삶이란 어떻습니까 ? 그냥 잠시 우리 주변만 돌아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돈과 소유로 가치를 규정하는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사람도 수단일 뿐입니다. 쓸모로 사람이 평가를 받습니다. 많이 가지고 유명하고, 자신이 대단한 것같아 보여도, 어느 순간 쓸모가 없어질 뿐입니다. 왜 ? 사람이 돈이 없어서 불행해야하고, 왜 사람이 남보다 못하다고, 남보다 늦는다고, 남보다 가난하나다고 목숨을 끊어야 합니까 ? 이걸 모르지 않습니다. 모두들 세상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그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 안에 권위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보다 더 큰 힘이니까 거절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세상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이 땅에 보내셨다는 영적인 경험이 일어나게 되는 순간부터는 세상의 권위는 하나님앞에 산산 조각나버리고 맙니다.사도요한은 하나님께서 이런 권위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_요한복음 1:12
여러분은 이 권세를 실감하며 살고 있습니까 ? 세상이 열광하고, 모두가 굴복하는 것에도 내 영혼이 흔들림이 없다면 이것보다 분명한 증거는 없습니다. 이 아침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그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꼭 발견하고,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5
사도 바울은 선교여행 기간동안 3 ~ 4일에서 길게는 몇달 정도 머무르며 60여군데의 도시들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이례적으로 일년 육개월을 머물렀던 도시가 있습니다. ‘고린도’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고린도교회는 다양한 은사로 무질서하기도 하고, 파가 나누어져 여러가지 소란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사랑이라던가, 은사, 그리고 부활과 같은 바울 신학의 핵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써 보냈던 것을 보면 고린도 교회를 향했던 바울의 열심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 써 보낸 첫번째 편지의 첫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누릴 수 있는 놀라운 은혜에 대해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쓴 편지의 첫머리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신 뿐만 아니라, 고린도의 교회 성도들과 또한 각처에 있는 이들이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셨다 ! 이사야와 세례 요한에 이어 동일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이렇게 부름을 받고 택함을 받은 기쁨을 발견하고 누리게 하는 것일까요 ?
9절 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익숙한 단어가 눈에 띄입니다. ‘교제’ 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코이노이아’라 씌여진 이 단어가 핵심입니다. ‘교회’를 뜻하는 다양한 용례중에 비교적 성도들에게 익숙하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교회 공동체를 뜻하는 말인 ‘코이노니아’를 사람들안의 친목이나 교제 모임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코이노니아’의 핵심은 이런 저런 사람들의 모임도, 개교회를 뜻하는 말도 아니며 또한 서로의 친분이나 사이가 좋은지, 잘 섬기는지 여부도 아닙니다. 다시 한번 9절을 눈여겨 살펴보세요. 교회로 택함과 부름을 받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누구와 ‘교제’ ‘코이노니아’를 이루게 하셨습니까 ?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입니다.
사람들과 좋은 만남을 가지고, 친절과 봉사, 섬김을 한다고 해서 영적인 자유의 경험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여지고, 들리지 않는 것이 들려지게 되어, 어느새 ‘불립문자’의 세계와 조우하게 되는 기쁨은 오직 예수와의 교제안에서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늘 우리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끌어안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실제의 사실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길입니다. 말씀을 보는 것,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사실이 되어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주님과 교제를 나누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주님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찬양이나 퍼포먼스같은 것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끼리 친목모임을 하고 우리들 만의 교회를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 ! 주님과 ‘코이노이아’를 이루는 교회란 ? 예수는 말씀이시고,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 !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고백을 담은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세상의 소문과 나의 경험과 지식, 감정의 흐름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나아오신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셨고, 하나님이 세우신 그 한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라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삶의 중심을 주님께로 향하고 오직 그만을 ‘길’ 삼아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그 길을 걷는 것만이 말씀이 내게 들어와 세상을 이길 능력으로 역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것입니다. 절대의 것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모든 상대적인 것들은 무의미일 뿐입니다. 그것이 모든 불의함과 사특한 어둠의 세력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주님께서 당신과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어가기를 갈망하며 믿음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여러분의 닫힌 눈과 귀를 열어주시고 하늘의 기쁨과 소망을 맛보게 해주심으로, 예수 생명을 경험한 자 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때마다 일마다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2/02 주현후 4주 (0) 2020.01.31 20/01/26 주현후 셋째주일 (0) 2020.01.24 20/01/12 주현후 첫번째 주일 | 주의 수세주일 (0) 2020.01.09 20/01/05 신년주일 (0) 2020.01.04 191229 성탄후 첫번째 주일 (0) 2019.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