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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02 주현후 4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0. 1. 31. 23:28

    성서일과

    • 1독서 : 미가 6:1~8
    • 2독서 : 고린도전서 1:18~31
    • 3독서 : 마태복음 5:1~12
    • 응송 : 시편 15

     

    설교파일

    https://youtu.be/Xc_3-7eQN2M = '클릭'하시면 설교영샹을 나눌 수 있습니다

     

    설교음성

    https://drive.google.com/open?id=11kQu6VcS0XX8Kc7zfmq_S6B5gYyL_7KV = '클릭' 하시면 설교 음원을 나눌 수 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지다' _지거 쾨더

     

    "오늘, 그리고 낯설은 오늘"

     

    1.

    급격한 속도로 확산 중인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전세계가 불안과 두려움에 휩쌓인 요즘입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주님의 손길이 질병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과 가족을 잃은 이들, 그리고 두려움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이 땅모두를 구원하는 희망의 소식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중국 우환에서 발생했다고 알려지는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바라보며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의 공격에 전세계가 속수무책으로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부했던 부나 명예, 온갖 지식과 기술력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허무함과 알 수 없는 배신감 마져 느끼게 됩니다.

    상황이 급박해지면 우리 마음을 서글프게 만드는 웃지 못할 모습들도 눈에 띕니다. 이런 위기상황을 기화로 비싼값에 마스크를 판매해서 한 몫을 챙기려는 얄팍한 이들도 있고, 가짜 뉴스를 만들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국민들 마음을 분열시키는 못난 정치인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는 그곳에서 국가가 있기에 가까스로 탈출해오는 이들을 혹여 나에게 옮길까 싶어 받아줄 수 없다며 바리케이트를 치며 항의하는 혐오하는 속마음도 드러나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속에서 두 가지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첫번째,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성경의 진술이 옳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금 잘잘못이나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한쪽편에 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질책하는 입장에 있더라도, 상황이 조금더 악화되면 결국은 모두들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만 살고 보자는 유혹에 무너지고 말게 될게 뻔합니다. 본질은 우리는 이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상황에 속절없이 놓여있는,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윤리, 도적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말로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은 생명을 위해 정말 필요한 것들, 가장 본질적인 것은 결국 우리안에 없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들 일 뿐입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낯설은 환경과 삶에 직면하게 될 때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만 있다’고 하는 성경의 말씀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2.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오늘 성서일과 복음서의 ‘팔복’의 말씀을 접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참 재미있습니다. 성도라면 누구에게나 귀에 익고, 암송도 하고, 말씀에 감동도 받습니다. 그런데 삶에서도 이러한 팔복을 ‘복’으로 누리고 살아가고 있느냐?라는 물음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궁색하기만 합니다. 실재로는 복이라 여기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아무리 좋게 들으려고 애를 써도 가난은 불편하고 꺼려지는 것입니다. 가난함이 복이라던 예수님의 말씀은 일부러 가난해 지라거나, 부유함이 죄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기독교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윤리나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생명이나 구원은 무엇으로 경험하고 누리게 되는지를 알아가고 그 사실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다시금 예수님의 말씀을 보게 되면, 팔복의 핵심은 어떻게 살라거나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팔복의 핵심은 도대체 가난이 복이 될 수 있는 ‘나라’는 어떤 곳인지에 대한 가르침에 있습니다.

     

    돈의 가치가 작동하고 있는 세상에서 가난은 복이 될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들 삶의 모든 문제들은 먹고 사는 것의 문제들입니다. 그러니 이런 문제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경험할 수 있는 본질적인 길은 물질의 가치가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 임하고, 그런 나라를 경험하며 사는 길 뿐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전하셨던 ‘복’들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에만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가난이나, 의롭게 사는 것이나, 그 결과로 박해를 받게 되는 것은 ‘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나 복된 것이라면 예수님이 전하시는 팔복이라는 것이 이 땅의 삶에서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 아닌가 ?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정말 그럴까요 ?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 문제는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나, 그의 메시아로서의 삶이 오롯이 새겨진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 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해야 할 구원자가 세상 권세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예수님께서 잡혀 죽었던 십자가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메시아로서의 그의 길이 실패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야 말로 능력이라는 바울의 선언에 함께 ‘아멘’으로 화답하며 따르고 있습니다. 당장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으며,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한 것일까요 ?

     

     

    3.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의 믿음을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_고전 1:18

     

    •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_고전 1:24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세상이 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예수님이 잡혀 죽은 십자가야 말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이 여전히 와닿지 않는 이유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상이 가르쳐주고, 경험해왔던 ‘능력’이나 ‘지혜’같은 것들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은 정치적인 힘을 가지고 남위에 군림하는 것, 누구보다 더 화려하고 부유해지는 것이 승리이고 능력이라고 말하고, 유대교는 세상 모든 권세를 뒤엎을 만한 것들이 힘이나 일들이 드러나야 능력이라고 보는 세상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세상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지향하고 있는 길은 이와는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니, 십자가가 능력이라는 말은 아득하기만 한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더 나아갑니다. 고린도전서 1:27 ~ 29절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와 강한 것들 모두를 부끄럽게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세상이 비웃을 법한 말들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어쩌면 힐끗 바라본 세상의 모습에 비추어지는 자신의 믿음의 길을 부끄러워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대체 바울은 어떤 근거로 이렇게 외칠 수 있었을까요 ? 세상의 권세와 힘이 살해했던 예수님을 죽음에서부터 일으켜 세워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본다는 것은, 전적으로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어떤 기준을 따르며 살아가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생명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과, 세상의 능력과 지혜로는 생명을 구원할 수 없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다른 능력, 다른 지혜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며,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배설물과 같다’고 말했던 바울의 고백은 허투루 뱉어지는 종교적 언설이 아닌, 예수 생명이야 말로 그의 삶을 지탱하고 살아낼 수 있게 하는 능력으로 경험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우한 시내에 고립되어 있다가 주중에 국내로 귀환한 교민들에게 이 말씀은 남다르게 들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에 둘러쌓여 있는 그곳에서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에서 비행기를 투입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이야기해주던 구원이란 것들은 본질적인 문제앞에 직면했을 때 그 한계와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하지만 돈은 살아가는 수단이나 방편은 될 수 있지만, 결코 능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의 십자가 때문에 온 천하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힘과 지혜를 부끄럽게 만드셨다는 바울의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안에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단순한 교리가 아님을 깨닫고, 그 사실을 불붙는 마음으로 붙들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운명처럼 찾아드는 어떤 문제와 상황앞에서도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능력과 지혜가 다 무릎을 꿇고 벌벌 떠는 죽음의 위용앞에서도, 의연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이런 힘이야 말로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외한 길은 존재할 수가 없으니, 다른 힘이나 지혜에 마음을 빼앗길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 예배 가운데 참여한 우리 모두가 조급함에 내몰리고, 불안함에 허둥대고 억눌린 삶에서 자유케 하는 십자가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4.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변함이 없는 삶에 실망스럽고, 때로는 아직 오지 않은 나라에 대한 허무함이 밀려들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곳에 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믿어지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이 사실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십시오. 십자가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두 나라가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광복이 되고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으니 이 땅에서 일제의 지배권과 영향력이 존재할 수 없게 되었던 것 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으니 세상 나라와 그 통치의 힘과 지혜들은 종말의 그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에 의해 모두 폐하여지고 말 것입니다.

     

    종말이 가리키는 ‘기다림’이라는 말에 실족하시지 않기를 빕니다. 이 벅찬 기다림안에서 소망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과 배가 부른 사람이 최고급 식당에 초대를 받게 된다면, 당연히 배고픈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기쁨이나 행복감이 월등할 것임은 명백합니다. 이 세상의 능력과 지혜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에 낙망하거나 슬퍼하지 마시고 오히려 천국백성이 되었음을 기뻐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기쁨과 능력을 누리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제공될 그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아직 음식이 나오지 않았다고 자신을 불행하게 여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기다림은 달콤할 것이고, 모든 상황을 잊을 만큼 꿈만 같을 것입니다. 믿음의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약속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우리의 걸음을 지켜주는 능력으로 경험해가는 것입니다.

     

    예수 생명을 발견하고 누린다는 것은 인생의 어느날 불쑥 찾아오는 낯설은 사건이나, 중대한 갈림의 길에서, 특별한 결단이나 각오를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원전 700년, 지금으로부터 2700년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했던 미가 선지자는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_ 미가 6:8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대단히 정의롭거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처럼 정의를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며, 그분의 손길과 계획, 그분의 함께 하심을 마음에 담아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일의 걸음을 주님과 일치시키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특별한 위기라고 해도 달라질 것은 별로 없습니다. 거센 물살이 밀려와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의연하고 차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능력이 된다는 것도 결국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상황을 뒤엎을 만한 힘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말과 생각, 살아가는 삶의 궤적을 십자가에 잇대온 사람만이 위기의 때에도 예수 생명을 붙들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짓된 구원을 이야기하는 세상의 지혜와 능력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말씀만 붙들며 살아가십시오. 예수의 십자가를 능력으로 붙들며 살아가는 오늘이, 또 다른 ‘낯설은 오늘’ 우리의 걸음을 지켜내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그곳에서만 삶의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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