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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16 주현후 여섯 번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0. 2. 12. 17:25

    성서일과

    • 1독서 신명기 30:15 ~ 20
    • 2독서 고린도전서 3:1 ~ 9
    • 3독서 마태복음 5:21 ~ 37
    • 응 송 시편 119:1 ~ 8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open?id=1XJdhpJ_owKMu0jU29zPOitCaTxhEbNMv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137YbvjH7oY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말씀'앞에 '복' '화'가 있습니다

     

    1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얼핏 봄이 오는 기운이 엿보여지는 한주였습니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보여도, 지금쯤 산위에는 새로운 생명의 숨들이 꿈틀대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힘이 절로 납니다. 들리워지는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삶을 역동하게 만드는 능력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메시아로서 예수께서 찾으신 곳이 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 이스라엘은 막상 노예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얻었음에도 광야의 현실앞에 움츠려들고 굳어져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원망하는 밖에는 없었습니다. 거친 운명앞에서 아무것도 없어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던 히브리 노예들에게구원이 되어주시겠다, ‘함께 하시겠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언약을 맺으셨던 곳이 바로위였습니다. 

    산위에 먼저 오르신 예수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에 잊고 있던 역사의 기억이 다시금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이들이 하나 , 삶에 체여 신음하던 아래에서 일어나 위를 향해 오르기 시작합니다. 땅이 끌어당기는 힘을 거슬러 예수의 말씀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이마에는 아마도 송글 송글 땀방울이 맺혔겠지요? 잊고 있던 , 잃어버린 소망을 다시 되찾기 위해 꿈꾸는 자에게 주어지는 몫은 반드시 스스로의 걸음으로 위에 올라야 한다는 그것입니다. 그렇게 산위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꿈꿀 없는 현실과 이미 끝나버린 인생이라는 저주를 끊은 셈입니다. 하늘의 복은 이런 이들의 것입니다. 

    땅의 저주를 끊고 세상을 거스르며 하늘을 바라보며 오르는 이들의 꿈을 예수님은 지지해주셨고, 산위에 오르는 걸음마다 하나님을 기억할 있는 그들이야 말로 복된 사람들임을 가르쳐주신 내용이 바로 마태복음 5 ~ 6 전체입니다. 

    본문 5장에서부터 6장까지의 내용들은 파편적인 별개의 단락들이 아니라 모두 호흡에 읽어나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전하신 말씀들의 중심에 놓여진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새로운 세상천국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늘 보좌를 뒤로하고 산위로 내려오셔서 언약을 주셨던 하나님처럼, 산위에 서신 예수님이 주님을 향해 나아온 이들에게 주어진 메시지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하나님의 나라 이전까지 만났던 나라들과는 전혀 다르고 대단히 새롭습니다. 때로는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만큼 따듯하지만, 그의 나라는 기존의 있던 모든 질서와 가치를 파괴시키고 무력화시킬 만큼 과격하고 혁명적인 나라입니다. 이런 것이 운명이라고, 이렇게 밖에 있는 것이 없다고, 다들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포기하고 체념한 살아가던 이들의 무력하게 꺾어지고 마는 무릎을 붙들어 세우고, 또한 그렇게 사람들을 몰아가는 세상 모두에게, ‘그럴 수없다 !’ 라고 가로막는 나라입니다. 

     

    2

      좀더 내용을 살펴볼까요 ? 5장의 시작부터, 복없다, 불쌍하다, 실패했다는 낙인에 눌렸던 이들과 그런 강요가 단단하게 굳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의 평가는아니다 !’ 반전의 정의로부터 시작합니다. 

    대체하나님 나라에서 복있는 이들이란 누구인가?라고 하는 질문에, 세상을 향하여 보냄 받은빛과 소금들이라는 예수님의 설명이 뒤를 잇습니다. 또한 세상을 향한 빛이고 소금이니, 세상의 빛과 소금 노릇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움 보다 더하여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 하나 하나가 이들보다 못하다는 생각, 그들의 빛나는 삶에 주눅들고 부러워하며 살아왔던 그들의 삶의 정체성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의 단락은 빛과 소금으로서 세상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아야 ,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얻어야 하는의로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일단의로움이라는 말을 먼저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의로움이란 말은 쉽게 설명하면인정받음정도로 해석하면 좋을 같습니다.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은 세상이 인정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앞에서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께 인정받았다, 하나님 나라에서 인정받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어디에서 인정받는 사람, 인정받는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

     

    3

      본문은하지 마라’ , ‘하여라 율법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을 듣다가 보면 마치 모세가 산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아들던 때의 모습과 자연스레 겹쳐집니다. 이것은 율법을 생명처럼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율법의 주인이심을 전하려는 마태의 복음만의 특별한 장치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금과옥조 붙들고 있던 율법을 조목 조목 해석하고 새롭게 풀이해시지만 가르침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21절부터 시작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옛 사람에게 말한 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하는 비교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고도 믿는척 해왔던 그릇된 신앙에 대한 타박이요, 거짓을 붙들고 살던 걸음으로부터 돌아설 것을 요청하는 꾸짖음이며, 그런 무거운 짐을 짊어지우려던 이들의 종교적 위선과 허위에 대한 설은 고발입니다. ‘나는이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말씀의 권위가 날카롭기만 합니다.

     

    빛과 소금인 예수의 제자로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 자랑하는 의로움보다 더해야하는 것들에 대해, 예수님은 6장까지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원수사랑’ 6가지의 예를 제시하십니다. ‘이것만 아닙니다. 이들의 의로움의 수준을이것만큼 넘어서야 한다는 최소의 기준입니다. 이번주일 성서일과에는 앞의 가지만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강령들은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서 비롯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계명들은 , 무엇을 주목하게 하려고 주어진 것일까요 ? 

     

    살인하지 마라거나, 간음하지 마라는 , 이혼증서를 써주어야만 이혼할 있다거나, 맹세하지 마라는 율법들이 지향하는 목적은 모두 힘이나 권력에서 소외된 이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주기 위해 하나님 백성 공동체가 마음으로 지켜내야만 하는 최소한의 울타리로서의 기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살인하지 마라하셨으니, 이스라엘 안에서는 폭력이나 불의함에 의해 죽어나가는 사람이 있어서는 않됩니다. 간음하지 마라 하셨으니, 이스라엘에서 만큼은 여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호받아야 합니다. 이혼 증서 없이 함부로 여인을 내칠 없고, 이혼증서를 받고 돌아온 이가 있다면 누구든 따듯하게 용납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된 만큼은 진실하여야 하고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만 합니다. 모든 율법은 나와 너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평안과 행복을 지켜낼 있도록 주어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본래의 목적인 향해야하는 율법을, 자신들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을 감추는 도구로 사용하는데 익숙해져만 갔습니다. 속으로는 숱하게 타인의 인격을 살해하고, 무시하거나 경멸하면서도, 곁에서 헐벗고 고통당하며 죽어나가는 이들을 외면하면서도 손에 피를 묻히진 않았으니살인하지 말라 율법을 지켜낸사람좋은 의인이라 인정받습니다. 경제적 수탈에 내몰려 몸을 팔게 이들, 불의한 권력과 폭력에 의해 내몰린 이들을 외면하고, 그렇게 만드는 폭력앞에 비굴해지면서도, ‘나는 간음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냅니다. 상대방은 없으니 가뭇없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함으로 주저함없이 자신의 이익을 취하거나 면죄부를 받아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율법의 형식과 종교성안에 숨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통해 면죄부를 받은 이들은 대담하고 뻔뻔해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말하고 자랑하는의로움이란, 그들이 원하는 의로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아닌, 겉모습에 현혹되고 마는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로부터 얻는 것이면 그만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속이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움을 가로채는 그들의 어둡고 음습한 모습을 예수님은 주저 없이 들춰내고 있습니다.

    우리안에서도 이런 모습은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하나님 아닌 사람들을 속이며 얻은 의로움에 우쭐대거나, 한편으로는 그런 의로움을 얻고 싶어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기대어 하나님의 의로움앞에서  도망치고 숨어드는 우리들 모두에게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천둥처럼 들리워져야만 합니다.

     

    4

      위에 오르신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진 이후로는, 이제 형제를 비난하고 핍박하고 증오하고 미워하는 , 인격을 부정하고 죽이는 것이야 말로 살인의 죄가 됩니다. 음욕을 품는다는 것이 여인을 소유와 쾌락의 대상으로 삼는 간음이며, 내일의 일도 없고 한걸음 조차 감당할 능력조차 없으면서도 맹세를 한다는 것은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죄라는 사실 앞에서 이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불의함을 거짓된 의로움으로 감추고, 사람들의 의로움속으로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부끄러움과 모욕감으로 얼굴이 붉어졌을 겁니다. 반면에 율법이 있음에도 권위자들과 권력자들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고 오히려 내몰렸던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하나님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보고 계신다는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 선포되고 폭로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의로움의 수준을 넘어서는 율법의 온전함을 이룰 있을까요 ? 나를 해코지 하는 이들, 억울하게 하는 이들을 향해 솟아오르게 하는 분노를, 내안에서 꿈틀거리는 음욕과 탐욕의 본성은 어떻게 있을까요 ? 당장의 이익을 얻거나, 위기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이라도 팔고 보는 연약함에서 우리가 어떻게 자유할 있겠습니까 ? 사람들로부터 인정에 기댄 의로움이 아닌, 우리 깊은 심중까지도 살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의로움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의 복을 누릴 자격이 없음을 고백하는 자리로 몰아갑니다. 우리는 무능하고, 무익한 죄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탈락입니다. 말씀앞에서의로움이란 아득하고 낯설기만 합니다. 

     

      이제 우리가 있는 것이라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로움이 주어졌다는 ,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시고 용납해 주셨다는 말씀을 믿는 뿐입니다. 내가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해주셨으니은혜임을 인정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시고 용납해주셨다는 사실만 믿게 되면, 율법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를 사람답게 있도록 하는 모든 생명의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믿게 되면,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 외에 소중한 것이란 있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게 되니 무엇도 우리를 억압할 없고, 두려움에 몰아세울 없습니다. 이제 율법은 삶을 짓누르는 짐이나 혹은 누군가에게 으스댈 있는 근거가 아닌, 우리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며, 말씀만이 모든 억압과 흉악의 결박을 풀어내어하늘의 누리는 자유함으로 역사합니다. 

     

    5

    광야를 벗어나 이제 새로운 가나안 시대를 살아가야하는 이스라엘 앞에서 모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_신명기 30:20a 

     

    모세는 ? 새로운 약속의 시대앞에 있는 다음 세대를 향해 말씀을 남겼을까요 ? 새로운 시대란 어떤 시대입니까? 여기에 임하였지만, 아직은 살아내지 않은 시대입니다. 이제 살아가야 내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때에 만나게 되는 새로운 시대앞에 무엇이 놓여 있을까요 ?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내 앞에 두었나니’ _신명기 30:15

     

    이미생명과 ’, ‘사망과 모든 것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무엇을 따라 사느냐? 어떤 의로움을 추구하며 것인지에 따라 결과와 운명의 끝은 극명하게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 앞에 두신 내것으로 누리며 사는 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버리고, ‘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저주하시지 않습니다.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릴 존재되었음을 선언해 주십니다. 

    이제 말씀이 들리웠으니 말씀을 따르며 것인지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안에 들어와 역사하실 것들을믿음으로 누리는 삶을 것인지는 여러분이 선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연애의 대상을 대하듯, 눈물을 흘리거나 감정적 고백을 쏟아놓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말씀을 듣고, 의지하고, 행하며 사는 것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람인지 아닌지는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두셨습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의 의로움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삼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말씀을으로 여기고, 말씀을 따름이 말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유일한 의로움의 길임을 믿으며 살아가십시오. 모든 죽을 것을 살리시고 자라게 하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더하심으로 빛을 잃고 맛을 잃어버린 세상에 빛과 맛을 더하는 하늘의으로 여러분의 삶을 세워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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