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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 부활절 5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5. 7. 15:05
성서일과
- 사도행전 7:55 ~ 60
- 시편 31:1 ~ 5, 15 ~ 16
- 베드로전서 2:2 ~ 10
- 요한복음 14:1 ~ 14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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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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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것은 ...
| 예수 논쟁
우리는 그리스도, 다시 말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따르는 이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 어떤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받는 것이나, 혹은 죽어서 지옥이 아닌 천당에 가는 수준의 구원을 생각하고 계신가요 ? 성경이 전하는 예수께서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말씀은 어떤 영역에서만의 구원이라던가, 구원을 이루는 수단으로서가 아닌, 세계와 삶 전체의 구원이시라는 정의입니다. 건져올리다, 구출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구원’ 이라고 하는 헬라어 ‘엑사고라조’ (ἐξαγορἀζω)가 억압에서의 자유, 해방, 질병의 치유와 같은 실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주님은 내세 뿐 아니라 삶에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로부터의 구원자이셔야만 합니다. 이 사실이 온전히 믿어 지시나요 ?
오늘 우리의 문제는 안타깝게도 살아가는 형편이 늘 믿음 없음의 수렁으로 몰아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과 오늘은 여전히 달라 진 것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실재로 세상에는 여전히 악이 득세하고 있고, 고통과 신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믿고 구하는 것은 당신께서 모두 다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우리의 경험은 내가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는 것만 기억하게 해줄 뿐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종교는 절대자에 대한 의존감정’일 뿐이라고 말했던 슐라이에르마허나, ‘민중의 아편’이라고 말했던 마르크스의 도발이 무조건 허무맹랑하다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과연 기독교 신앙은 실제 개인적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무능력하고 허무만 나뒹구는 종교적 선동일까요 ?
| 예수를 믿는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라는 우리의 간절함과는 달리, 초기 교회 공동체 성도들의 믿음의 자리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셨고, 부활의 목격자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버린 이후에 신앙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오늘 우리 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치명적?이었을 겁니다. 교회에 나간다고 해서 예수 믿는 것에 자신의 삶을 걸어야만 하는 수준도 아니고, 반대로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요즘과는 그 무게가 같을리가 없습니다. 그 시절에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자칫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인생에 실패하고, 망하고 마는 것에 운명을 거는 것처럼 여겨졌을 겁니다. 느슨한 신앙임에도 ‘정말 예수를 믿는 것이 옳은가 ?’ 혹은 ‘예수님이 정말 구원자이신가 ?’ 라며 믿어지지 않고 흔들릴 때가 있는 우리인데, 모든 것을 걸고 예수를 따르던 그들의 삶은 얼마나 간절하고 치열했을까요 ? 한번 뿐인 삶이 송두리째 부정될 수 있는 형편이니 그 믿음의 부침이 얼마나 심했을까요 ? 동거동락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십자가를 등지고 도망쳤던 것이나,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도 그렇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씨름하다가 믿음에서 실족했던 이들도 있다는 것이 이런 상황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하나님과 사이의 관계’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 것인데,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시나요 ?
성서일과 3독서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은 십자가를 앞두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던지신 고별설교입니다. 그들의 곁을 떠나신다는 말씀에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아무것도 바뀐것이 없는데, 그렇게 떠나신다니 당황스럽고 허망하고 허무했을 겁니다. ‘어디로 가시느냐?’,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는 제자들의 급한 물음이 안스럽게 보입니다.
떠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동안 보여주셨던 세상을 바꿀 꿈을 모두 포기하신 것처럼 들렸으니, 이제 모든 것이 끝장나 버렸다는 생각에 제자들은 그만 두려움과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 요14:10
자신의 인생과 삶을 하나님을 향해 일치시키며 살아오셨던 예수님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삶처럼 고스란히 동일화시켜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아들로 삼아주시고 함께 하심을 누리며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시며,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님안에서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 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안에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볼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더 이상 하나님이 도우시고 행하실 증거나 표징은 필요치 않게 됩니다.
| 부활을 새기다
초기 교회 공동체들과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고, 또 우리도 세상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이 물음을 수 없이 되내이고, 확인하고, 씨름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어질 때야 더없는 소망이 일어나지만, 그렇지 못할 때면 허무하고, 두렵고, 힘이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라는 뜻인데, 알게 모르게 우리 안에도 유대인들처럼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굳어져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만물의 주인이 되려고 하고, 인생과 운명도 마치 저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 실재 스스로 살아가는 방식은 오히려 인간이 신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탐욕에 휘둘리며 생을 낭비하거나, 혹은 자신의 생을 염려하고 걱정하며 소비하는 것이 또한 우리 입니다. 믿음이 필요하고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결국은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니요 ?’ 라는 이 의심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절망에 자포자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 놀라운 기적들과 이사가 그 증거일까요 ? 그런 이야기는 고대 설화에도, 다른 종교에도, 혹은 오늘 사이비 교주들 사이에도 들려지는 것들입니다. 오히려 성경안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무력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절망하고, 실패하고, 무너졌으며, 결국 십자가에서 처형되고 마셨습니다. 더욱이 그의 성품이나, 고매한 인격도 그가 하나님이신 증거는 아닙니다.‘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누가 보더라도 ‘아 ~ 이건 분명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구나’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일만이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안에 단 일회적으로 유일하게 발생하고 드러난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것말고 다른 것은 없느냐 ?’고 되묻고 싶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부활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부활의 의미가 선명해지고, 구체화되는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온전한 ‘믿음’ 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요체와 능력이 바로 ‘부활’에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되어 주시는 하나님
부활의 경험은 반드시 ‘죄’와 ‘죽음’의 흔적들을 깨트리는 능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구하고,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 없어서 괴롭고, 죽을 것 같고, 절망스러운 그런 것들이 우리 손에 쥐어져도 생명을 잃게 된다면 그런 것이 과연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 그런 것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어서 대부분 없어도 무방한 것들입니다. 오히려 생명이 있으므로 다른 모든 것들도 의미있어지는 겁니다.
전세계를 두려움으로 뒤덮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도 백신이 만들어지는 순간 단순한 감기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생명경험도 이와 같습니다. 여전히 두려움이나 불안, 염려와 같은 질병에 사로잡혔있다는 것은 아직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어떻게 염려나 근심을 해결할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의 고민이 아니라, 우리 신앙은 어떻게 ‘부활’의 경험안으로 들어갈 것인지에만 천착해야 합니다. 염려나 근심으로 내일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죽음의 권세를 무효화시킬 삶의 능력을 부활하신 예수님안에서 발견하는 길 위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능력을 찾고, 경험할 수 있을까요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요 14:6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 요 14:11
누군가 걸어보지 않은 길이란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시름에, 환란에, 역경에, 유혹과 시험, 폭력과 두려움앞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만 일치된 걸음,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시는 유일한 생명의 걸음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라 걸으면 예수님께 그리하셨듯, 하나님은 우리의 삶도 당신의 삶으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는 겁니다.
| 순교, 증인의 길
우리는 지금 예수를 따르는 길위에 서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뒤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혹은 어찌할 바를 몰라 멈춰 서 있을 때도 있겠지요.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고, 그의 부활을 보니 이 길을 따름이 맞는 것 같지만 믿음이 충만할 때는 모르지만, 혹여 갑작스레 두려움이라도 밀려오면 우린 또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을 칠지도 모릅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 과연 이 길, 잘 걸어갈 수 있을까요 ?
1독서 사도행전은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이시라는 그 말씀을 증거하다가 결국 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언제 들어도 ‘순교’라는 말 속에 담긴 비장함앞에서 우리 자신의 믿음은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평안한 믿음의 길을 걷기도 힘든데, 그는 어떻게 ‘순교’할 수 있었을까요 ?
‘순교’라는 헬라어 ‘마르튀스’에는 다른 뜻이 하나 있습니다. ‘증인’입니다. 그러고 보니 자기가 보고, 경험한 것을 포기하지 않고 증거하는 삶이란 필연적으로 ‘순교’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셈입니다. 세상의 주인행세하는 거짓 신들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은 세상을 거스르는 길입니다. 스데반이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거스름이 세속의 권세에 의한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행 7:55
부끄럽게도 오늘 우리에게는 낯설은 말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앙생활의 핵심은 ‘순교적 신앙’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를 따르고 증언하는 이들이니 순교적 신앙은 본래가 당연한 것이지만, 오늘 우리는 이런 신앙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살려고만 하니 증언할 수 없고, 증인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 그 이유는 증거의 내용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 알지도, 경험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증인으로서의 길을 온전하게 걸어낸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보면, 역으로 부활하신 예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 또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가까이 대하며 사는 것이 최선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슨 말일까요 ? 라틴어에 ‘메멘토 모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본래 죽음앞에 겸허하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나는 내게 닥쳐오는 죽음을, 죽음이 지배하는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죽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죽기를 각오하면,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순서에서 지키고 있는 ‘죄의 고백’ 시간도, 사실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앞에서 우리는 죄 아래 즉, 죽음아래에 있는 존재라는 통찰과 고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가까이하면 할 수록, ‘빛’은 더욱 선명해 지고, 그에 대한 갈망도 더욱 깊어집니다. 억지로 죽음을 외면하거나, 반대로 자신을 감추고 빛만 붙잡으려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죽음안에 처한 이 실존을 인정할 때, 그래서 주님만 믿으며 나아갈 때 가슴을 뛰게 하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목격하게 되는 법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외에 누구도 걸어가보지 못한 경이로운 길입니다. 처음 맞게 되는 낯설은 길입니다. 그러니 한번에 길 끝을 볼 수 없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시고 주님이 걸어가신 삶의 방식을 따라, 그를 길삼아 걸어가십시오. 두렵고, 혼란스럽고, 외로울 때, 눈 앞에 새겨진 주님의 발자취에 한걸음만 얹으시면 됩니다. 한걸음 만큼만 가시면 됩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당신께 그리해주셨던 것처럼, 비록 비틀거리며 나아가고는 있지만, 언제고 무너질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신을 삶의 길로 삼으며 나아가는 모든 이들의 걸음을 기꺼이 자신의 걸음으로 삼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그리하셨듯 우리를 자녀삼아 주셨다는 것, 우리를 용납해주시고 환대해주신다는 그 일을 믿고 즐거워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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