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05/ 31 성령강림절성서의 거울 앞에 2020. 5. 28. 17:00
성서일과
1독서 _ 사도행전 2:1 ~ 21 / 민수기 11:24 ~ 30
응 송 _ 시편 104:24 ~ 34, 35b
2독서 _ 고린도전서 12:3b ~ 13 / 사도행전 2:1 ~ 21
3독서 _ 요한복음 20:19 ~ 23 / 요한복음 7:37 ~ 39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KECm7xSVaRxQkgvT2XLcS1RIgwIVyn0z/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EbUIe_Np5VU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술 취함' 그리고 '성령'
1
어느덧 부활절 절기가 끝나고 교회력은 오늘을 시작으로 ‘성령강림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은 오늘도 성령안에서 유효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야 우리와 같은 온전한 사람이시니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따라갈 수 있지만, 성령은 도무지 손에 잡히지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 수 없는 ‘바람’같은 존재(요14)라는 주님의 설명도 성령을 이해하는데 쉽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때는 봄날 훈풍의 따스함으로 찾아와 겨울을 깨우고 얼음을 녹이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흔들고 잎새를 깨우는 모습이 살갑다가도, 어느 순간이면 그 작은 바람이 태풍이나 광풍이 되어 모든 것을 날려버릴 만큼 두려운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할 수도 없을 뿐더러, 도무지 그것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이런 현상을 일으키고 저런 모습을 남긴다는 말로 ‘바람’이 무엇인지를 정의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령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성령은 이런 존재이다’라고 자신있게 정의하지 못합니다. 그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저 성경안에서, 또는 신앙의 삶 가운데 남겨진 흔적을 통해 ‘성령께서 이런 역할을 하신다’라는 말로 성령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목격하는 현상을 통해 한 걸음씩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를 좇아가야만 하는데, 우리는 자꾸만 그가 남기신 흔적에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입신, 방언, 예언, 병고침, 지혜와 지식등 다양한 은사나 현상에 열광하고, 반대로 그런 것이 없으면 성령이 부재하신다는 상실감이나, 은사 열등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식으로라도 이해하고 싶은 조급증인 걸까요 ? 여튼 성령의 능력이 무엇인지, 성도는 또한 왜 그 능력에 사로잡혀야하는지도 모른채 성령에 열광하는 모습이 기형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2
성령행전이라 불리우는 사도행전의 내용은 주로 바울의 선교로 이어지는 복음 전파와 그에 따라 세워진 교회들의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말씀을 따라가다보면, 예수님의 승천이후 남겨진 제자들이 어떻게 증인 공동체가 되어갔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 그러니까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파되며, 부활의 증인으로 세워져가는 모든 일들은 바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성령임재 사건에서부터 비롯합니다. 성도의 삶이나 교회의 정체성을 성령안에서 찾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성령’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교회는 역동성을 가질 수 없는 사교모임 수준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개인의 신앙도 예외는 아닙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구원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신앙은 성령을 포착하고, 오직 그에게 사로잡혀야만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 또는 성령충만을 어떤 신비적인 현상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생각할 뿐, 정작 ‘성령’을 경험하고 알아가는데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령이신데, 정작 눈에 보이는 것만을 구하려고 하는 신앙적 미숙함을 벗지 못합니다. 성령은 대체 어떤 분일까요 ?
종교개혁의 문을 열어젖힌 루터는 요한복음 4:24을 주석하면서, ‘영’이라는 뜻의 헬라어 ‘프뉴마’를 ‘정신’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가이스트’ (Geist) 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깨닫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식고, ‘성령충만’이라거나 ‘성령임재’라는 말은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것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실재로 성경에서는 영적이라는 말자체를 삶을 벗어나는 초월적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 도리어 그렇게 몰아가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바르고 합당한 마음을 가지며 진리에 잇대어 사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라고 하는 로마서 12:2의 ‘이 세대’나, ‘그 때에 너희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라고 하는 에베소서 2:2a 의 ‘세상 풍조’ 와 같은‘세상의 가치관’ 즉 ‘시대정신’은 사람들의 삶을 몰아세우고 강요하는 영적이지 않은 힘입니다. 누구나 그런 힘에 굴복할 수 밖에 없을 만큼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오늘의 시대정신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 남이야 어찌되든 ‘나’하나 잘되면되고, 불의한 걸음이라도 제 배만 불릴 수 있다면 만족하게 여기는 것이 시대의 정신이고, 가치관입니다. 하늘을 잃어버린 삶이 우리를 지옥으로 몰아넣습니다. 너나 없이 이런 세상을 살게된 이유는, 모두가 ’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이런 ‘시대정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시대정신에 사로잡혀 있는 포로된 우리 영혼에 생기를 북돋아주시고, ‘예수 생명’안에서 일어서도록 일깨우는, 영적인 삶을 이끄시는 이가 바로 ‘성령’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그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던 꿈도 열정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압도적인 세상의 힘이 가져다준 절망감이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패배감으로 그들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곧장 갈 길을 잃어버린 그들을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던 것처럼, 제자들을 깨어진 세상으로 파송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리라’ | 요 20:22
사람들을 절망과 좌절의 늪으로 빠트리는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고 자유롭게 해주는 일을 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다 깨어져 쓸모 없어 보이는 그들을 일으켜 세우려면 반드시 그들안에 애써 심기워두었던 하나님 나라 정신, 하나님을 향하였던 믿음을 다시 일깨워 주셔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 요 20:21
주님의 간절한 ‘숨’이 들어간 이후에 제자들은 다시금 하나님 나라를 향한 새로운 꿈과 기대를 품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내쉰 ‘숨’은 혼돈의 땅위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던 창조의 호흡 ‘르아흐’입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들숨’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겁니다. 패배와 절망으로 몰아세우는 시대정신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꿈, 예수님의 정신을 생명의 들숨 삼아 살아가는 겁니다. 그것이야 말로 예수를 증언하며 사는 삶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령을 경험하면 보다 근본적이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 요 7:38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자신의 배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이리 저리 방황하고, 무엇을 채워도 채워지지 않던 결핍 때문에 방황하던 우리인데, 이제는 목마른 사람이나 곤비한 이들의 목을 축여줄 ‘생수’로 채워진 사람이 되는 겁니다. 흘러 넘치는 것이 생수인 것을 보게 되면 이미 그 안에 생수가 충만하게 채워진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허허롭던 우리의 삶이 세상에 짓눌린 누군가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소망으로 채워져있을 때에야 성령의 충만을 실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이천년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있던 사람들에게서 이 놀라운 일이 나타났습니다. 때마침 오순절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외지인들이 각각 저마다의 지역과 나라 말로 기도하는 이들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외국인들이거나 외국어에 능통했던 것일까요 ?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촌구석 ‘갈릴리’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행 2:7) 이들의 방언은 성령이 이들 가운데 임하신 이후에 일어났던 첫번째 사건입니다. 성령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없던 외부의 사람들에게는 마치 ‘술에 취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모습이었던 겁니다.
‘술에 취한다’는 말은, 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도 취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게 된 사람이 있으면 온통 그에게만 마음을 쏟게 됩니다. 사로잡혀 있는 셈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를 취하게 할 수 있고 사로잡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다는 것이나 경험도 이와 같습니다. 누가는 지금 제자들이 성령, 즉 하나님의 영, 하나님 나라의 정신, 예수 구원의 진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생수가 가득차면 흘러 넘칠 수 밖에 없듯이, 성령이 임하고 그에게 사로잡히게되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삶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의문이 한가지 있습니다. 과연 지금 우리가 성령을 따르고 있는 것인지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 사실 방언이나 입신 같은 성령의 은사나 엑스타시같은 현상들은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납니다. 기독교 신앙안에서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니, 이런 것은 성령현상의 결정적 증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비로서 우리는 힘있게 성령을 따르며 살 수 있을 텐데, 분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 사실은 성령 현상보다는 이 근거가 훨씬 더 중요한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고린도전서 12:3
바울은 성령 현상의 기준과 정당성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찾고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요한복음 14:26
요한은 그가 하시는 일이 모두 예수님께서 주님이시고 구원자 이심을 증언하시고, 또한 믿게 하게 하시니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과연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의미가 무엇을 말하는가 입니다. 베드로가 했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했던 이 고백을 주님은 하나님이 입에 넣어주시는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이 너무 상투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신데 주인으로 섬기려고 하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는 말씀을 뒤짚으면 ‘나는 주인이 아니라, ‘종’이다’ ! 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나는 무능하고 무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부어지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삶에 고백하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주인’이 참 많습니다. 아니라고 해도, 저마다의 주인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돈, 명예, 삶의 문제들과, 염려, 걱정도 다 우리가 섬기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도 다 지배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 주인행세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입니다.
5
앞서 성령은 바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직접 목격할 수는 없지만, 그를 인식하고 실감할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 요한복음 14:11
결국 그가 행하신 일들을 통해 우리는 성령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가 행하시는 일은 모든 죽어 있는 것들, 굳어지고 깨어진 영혼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에 마음을 쏟고, 생명에 관심을 가지면 ‘성령’이 더 직접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 오랜만에 교회 계단에 있던 화초들을 돌아보다가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창립 이후로 같이 했던 철쭉이 잔뜩 시들어버린 겁니다. 잎은 마르고, 가지는 모두 쳐져버린 것이 아무리 보아도 병이 들었거나 말라 죽은 것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도 물을 주고, 먼지 쌓인 잎을 닦아 주고 돌보고 보니, 뿌리와 가까이에 있는 가지와 잎들이 힘을 내는 모습이 보입니다. 보는 눈이 있는 이에게는 살아있는지 죽었는지가 보이겠지요. 하지만 생명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말라 죽은 나무 일뿐입니다. 성령도 이와 같습니다.
6
깨어진 세상을 괴로워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그런 세상과 시스템을 강화시키는 부역자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다고 애써 눈을 감고 체념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령은 너무나 필요한 분입니다. 그가 흘러넘치는 생수처럼 우리안에서 감동을 주시고 역사하셔야만, 우리는 깨어진 삶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낼 수가 있습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을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대해주셨던 예수님의 걸음을 기억나게 해주시고, 그 길을 따라 걷겠노라는 벅찬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우리 영혼과 정신을 깨우쳐주실 수 있는 이가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듣는다고, 본다고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깨닫는다고 또한 살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안에서만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 혼자 이렇게 산다고 세상이 바뀔까요 ? 세상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를 조롱할 겁니다. 성령충만을 경험했던 제자들은 다락방 밖에 있던 세상으로부터 ‘새 술에 취했느냐?’고 조롱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조롱이 오히려 찬사처럼 들리울 수 있습니다. 최후의 승리,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 주인이시니, 나는 종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종은 그저 주인을 신뢰하고,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애당초 무능했고, 본래 우리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사실이 땅의 주인 노릇하는 폭력의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꿀 수 있는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성령께서 주님의 길을 조롱하는 세상속에서 실패한 것 마냥 온통 비틀 거리며 걷고 있는 우리 걸음을 지지해주시고, 늘 예수 생명, 예수정신안에서 깨어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사로잡히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자유함’이 있습니다. 아멘.
'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 06/ 07 삼위일체주일 (0) 2020.06.03 20/ 06/ 03 삼일기도회 (0) 2020.06.03 20/ 05/ 24 부활절 7주 ( * 주의 승천주일 ) (0) 2020.05.20 20/05/10 부활절 5주 (0) 2020.05.07 20/05/03 부활절 넷째주일 (0) 2020.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