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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05/ 24 부활절 7주 ( * 주의 승천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0. 5. 20. 22:29
성서일과
1독서 사도행전 1:6 ~ 14
응송 시편 68:1 ~ 10, 32 ~ 35
2독서 베드로전서 4:12 ~ 14, 5:6 ~ 11
3독서 요한복음 17:1 ~ 11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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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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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삶을 살아갈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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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든 싫든, 우리는 누구나 함께 살아가야만 합니다. 홀로 있을 수 없으니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데, 이때 범하기 쉬운 실수중에 하나가 마치 내가 다 아는 것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착각이고 오만함일 뿐입니다. 특별히 상대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더 문제가 됩니다. 저마다 사는 방식이 다른 것처럼 고통이나 고난도 또한 제 각각입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별것 아닌것 같아도 정작 당사자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극심한 고통이기도 한 것이지요. 상대가 겪고 있는 고난이 내가 경험했거나 겪고 있는 고난보다 결코 가벼울 수 없는 것이기에, 멀리서 볼 때는 가벼워 보여도 막상 직면하고 보면 누구에게나 태산처럼 큰 것이랍니다. 당사자만의 상황이나 사정이 되어보지 않고는 우리는 결코 고난을 직면하고 있는 이의 삶의 무게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섣부른 조언이나 훈계 보다는 되려 침묵이 유익한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성공한 사람도, 한껏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언제, 어디에서 불쑥 삶을 찾아올지 모를 고난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고난은 저 혼자 극복하고 통과해내야만 하는 외롭고 힘든 시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아침, 홀로 고난의 터널을 걷고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평화의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가 그 걸음위에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고난의 문제를 대할 때 먼저 이해하고, 인정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고난이 특별한 사람이나, 특별한 상황에만 찾아오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저 아무일 없는 것처럼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거나, 어쩌다 직면하게 된 고난과의 낯설은 만남안에서 괴로워하고 있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안타깝지만 고난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헤아려보려고 할 수록 삶은 답답하고 아득해집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한 답을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야할 인간이, 하나님없이 살아간 결과 ‘죄’ 때문이라고 선언합니다. 고난이 있다는 것이 깨어지고 상한 세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속좁은 생각일 수 있으나, 그래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죄’와 ‘사망’의 길을 벗어나, 구원을 얻은 이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으니 ‘죄’의 흔적과 결과인 고난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하는데, 삶에 드리워진 고난의 그림자가 여전히 눈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 이런 물음이 생길때마다 ‘믿음이 없어서일까 ?’ 혹은 ‘씻지 못한 해결되지 못한 죄가 있는 것인가 ?’ 우리 신앙은 낭패감에 사로잡히고 움츠려 들고 맙니다. 예수님이 구원이신데 왜 ? 우리는 고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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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독서 요한복음 17장은 전체는 제자들을 향해 중보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구절 구절, 이 땅에 남겨질 제자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이 절절합니다. 재미난 것은 이 절절한 스승의 기도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던 삶의 지경이 주님의 특별한 위로와 중보가 필요했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학설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요한복음의 기록시기는 AD70년 이후로 알려져있습니다. 이때 교회공동체의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로마에 의해 성전을 무너지고 예루살렘은 불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요한 공동체가 신앙을 붙들고 있던 때야 말로 참혹한 박해의 시대였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다시 오시마’ 약속하셨던 주님의 재림의 날만이 성도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안스럽고 처참한 날들입니다. 기다림과 실망이 반복되어지는 일상이 어느새 단단했던 믿음의 자리조차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겨우 겨우 버텨냈지만 또 내일은 어찌될지 자신이 없던 그들, 주님의 애절한 기도는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난이 치명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고난이 깊어진 것은, ‘박해’ 자체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곳에 임하였음을 알리는 예수님의 ’부활’ 경험이 지금은 잔상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과 ‘승천’의 놀라움과 아직 임하지 않은 ‘재림’ 사이에 머물고 있던 성도들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있는 우리도 역시 고난 앞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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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에 대한 기다림이 길어지고, ‘고난’이 뼈에 사무치게 되면 신앙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일그러지기 마련입니다. ‘오늘’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면, 신앙이 왜곡되어 믿음을 버리고 돌아서거나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종말에만 기대기가 쉽습니다. 그저 하루 빨리 이런 세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건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처절한 절망이 투영되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약속의 성취가 대체 ‘언제일까?’라고 하는 조급함이야 말로, 이런 일그러진 신앙의 모습을 양산시킵니다. 혹시나 약속이 깨어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지고, 약속에 대한 신뢰는 힘을 잃고, 조급하고, 허무해지는 것은, 약속이 파기되어서도, 믿지 않았기 때문도 아닌, 기다림이 길어졌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성서일과 본문 모두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요 17:1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 행 1:6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 벧전 4:13
십자가 죽음을 향해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는 주님의 말씀이 요한복음의 ‘때’이고, 사도행전은 주님의 승천후에 성령이 임하실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냐고 확인하는 제자들의 질문, 베드로전서는 고난속에서 믿음을 지켜가는 성도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때’가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약속의 ‘때’에 관한 말씀입니다. 기다려야만 하는 때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은 때를 기다리기 위해, 또는 기다리면서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현실을 포기하고 외면하려는 시선을 모두 왜곡된 신앙이라고 부정합니다. 오히려 ‘약속한 때’가 있으므로, ’이 땅’을 주목하고, ‘오늘’을 살아낼 것을 요구합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 요17:15
제자들이 남겨져야 할 곳이 바로 이 땅, 오늘의 삶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남겨진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 것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 행 1:11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 살아야 할 장소는 땅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실 곳도 이곳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떠나시는 주님을 향해 ‘때’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 속한 것’이니 ‘너희가 알바가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이 ‘언제인가?’ 라고 하는 ‘때’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한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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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언제인자를 자꾸 채근하는 것은, 아직은 맛보지 못했고, 지금은 미완성일 뿐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그 ‘때’, 그리고 그 ‘때’에 이루어질 온 교회와 성도들이 갈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 주님의 재림과 종말, 여기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것은 우리로서는 할 수 없고, 우리 시대에는 이룰 수 없는 것,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면, ‘그 때’는 이미 우리를 찾아왔었고, 종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는 이미 맛보았습니다.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 바로 주님의 ‘부활’입니다. 십자가를 향하실 때는 보이지 않던 ‘그때’인 부활이었지만 ‘십자가’는 ‘부활’의 전주곡이었고, 부활 승천하신 때에는 아득한 ‘그때’가 ‘재림’이지만 ‘재림’에 경험하게 될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올라가신 ‘승천’안에서 엿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 날과 그 때를 이루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되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바 아니라시던 주님의 말씀은, 바로 지금 예수님을 믿는 믿음안에서 경험하는 ‘부활’이야 말로 능력인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느냐?는 말씀인 셈인 겁니다.
씁쓸하지만 여전히 ‘그때’가 언제인지에 조급할 수록, 우리는 ‘예수 잘 믿어도 소용없더라....’ 넋두리에 익숙해져만 갑니다. 정말 소용이 없을까요 ? 정말 그렇다고 확신하십니까 ? 대체 그 판단은 어느 시점에 이루어진 것입니까 ? 몸이 아파서 먹어야 할 약을 입에 털어 넣고선,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일 뿐입니다. 가짜만 아니라면, 약을 먹었으니 분명히 몸은 나을 것이니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인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의 길 위를 걷고 있는가 ? 이 길이 맞는가 ? 그렇다면 ‘어떻게’ 진리안에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고 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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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진리에 기대며, 믿음으로 살 수 있을까요 ? 부활하신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의 구원이시며 길이라고 믿고 있어도, 어느 순간 ‘언제’ 이루어지는지를 되묻는 조급함에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삼킬 자를 찾는 마귀가 우리 곁에 있다고한 베드로 사도의 경고는 그러한 우려이기도 합니다. (벧전 5:8)
과연 우리가 어둠과 악을 무너트리고 믿음위에 오롯하게 설 수 있을까요 ? 세상의 어둠을 없애기 위해 인류를 위협하는 갈등과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 변혁, 제도나 시스템의 개혁,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 투쟁이나 혁명적 저항으로 세상을 구원하고 악을 없앨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런 것이 필요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인류의 걸음에 우리는 빚을 지며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이지 않습니다. 구원의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으며, 우리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부활하신 예수님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삶속에서도 믿음으로 성도의 삶을 지탱하고 지켜갈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시선으로 살아가는 것, 세상을 향하는 눈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는 방식으로 고난의 땅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영적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삶의 방식에 천착하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린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영적인 삶을 살아감으로, 고난 앞에 무너지고 마는 세상과 달리 반응하고,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사는 것을 뜻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요 17:17
‘거룩’이라는 뜻의 ‘하기오스’(ἅγιος)가 바로 그 말입니다. 남겨진 제자들, 교회 공동체는 진리로 ‘거룩’해진 사람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믿으며 살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성도들이 살아가는 방식, 즉 무엇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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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 요 17:1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 행 1:14
예수의 승천을 목격하고 돌아온 최초의 성도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마귀의 시험과도 같은 고난 앞에 서있는 성도들을 향한 베드로 사도의 권면도 역시 기도였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벧전 4:7
또 기도하라는거냐 ? 고 실망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기도하라거나 말씀을 읽으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왔던 말이라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둠에 매몰되지 않고 영혼을 지켜낼 수 있는 길은 이것 말고는 없습니다. 영적인 문제는 영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을 뿐입니다.
대형화되고 규모가 커져야 교회가 부흥하고 성공했다고 말하는 시대의 한켠에 동녘교회가 서 있습니다. 상가교회, 작은 규모, 그에 걸맞는 많지 않은 성도들 ! 때로는 목사 홀로 기도의 자리에 서 있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믿음으로 드려지는 기도와 찬양과 예배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우리의 드림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크시고, 또한 삶에 드리워진 시련과 고난이 여전하지만 여전히 영적인 것에 마음을 쏟고 하나님을 향한 나아가는 순간 만큼 악에게 물들지 않고 신앙을 지켜낸 것입니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만큼 작고 가냘퍼보이는 빛이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앙을 지키며 서 있는 순간 만큼은 어둠은 결코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어둠의 권세를 지워나가고 있는 겁니다.
악을 무너트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 그리스도이신 예수안에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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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 벧전 5:10
우리는 스스로를 굳건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굳건하게 해주실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고난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망이되고 낙담이 되어도 현실에 매몰되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으로 삶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과 삶을 끌어 안으셔야 합니다. 비록 깨어졌고, 상하여 있어도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셨던 세상이며, 형편없어 보이고 견디기 힘들어도 오늘 우리의 삶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내어주심으로 구원해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여전히 기도하십시오. 영적인 길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하나님이 우리 믿음을 단단하게 세워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그분께 ‘영광’이 있음을 기억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 연약함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그리하셨듯, 오늘도 우리를 위해 그렇게 기도하고 계시니, 아버지께서 반드시 그리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푸쉬킨의 시 한편을 읽어드리며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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