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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06/ 07 삼위일체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6. 3. 22:49
성서일과
1독서 창세기 1:1 ~ 2:4
응송 시편 8
2독서 고린도후서 13:11 ~ 13
3독서 마태복음 28:16 ~ 20
설교 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J3NWbkje11rg21qkfCul4ctmxU_Zue0e/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 영상
https://youtu.be/SmTQ4UPUk1E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우리의 '하나님'
1
이런 문제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 ‘아침에는 넷, 오후에는 둘, 저녁이면 셋인 것은 무엇인가?’ 나그네들의 생명을 빼앗았던 ‘스핑크스’라는 괴물의 수수께끼입니다. 이와 비슷한 질문이 있습니다.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인 것’은 무엇일까요 ?
무엇을 말씀드리려는지 눈치를 채셨지요? 한분이시지만 ‘성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을 가지신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는 제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속시원하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능력과 세계를 뛰어넘어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헤아리고 이해하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일 뿐입니다. 천문학자가 우주 상수를 설명해주고, 의사들이 인체의 신비를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일반인에게는 알아 들을 수 없는 소음일 뿐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떻게든 삼위일체를 풀어서 설명해 보려했던 신학적 이론과 해석들은 많았지만 결국 모두들 하나님을 정의할 수 없다는 한계를 드러낸 채 이단으로 내몰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교회 전통은 목숨을 걸고 이 교리를 지켜왔고, 그 덕에 교회는 오늘도 ‘삼위일체’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대체 무엇이 담겨 있길래 교회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
2
사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드러내는 성경의 직접적인 근거는 희박합니다. 몇 몇 구절을 통해 삼위일체의 개념을 헤아려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본래부터 삼위일체는 ‘교리’로 정리된 개념였습니다. 교리로 정리되었다는 것은 교회 역사속에서 수 많은 신학적 논쟁을 통해 정립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인데, 그렇다면 교회는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왜 여기에 집중하였던 것인지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초기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있을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예수님 안에서만 일어났음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초기 교회 공동체들이 예수님을 덮어놓고 ‘하나님’이시라고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이 우리와 다를 바가 전혀 없으신 ‘사람’이었다는 확신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Vere Homo(온전한 사람), Vere Deus(온전하신 하나님)’ 이라는 교리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온전한 사람안에서 일어났으니, 그것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건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야 특별한 거부감 없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라는 신앙의 고백을 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와 결별했던 결정적 원인도 이것 때문입니다. 결국 오랜 진통끝에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역사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상 동일’ (호모 우시오스)하시다라는 결론을 맺습니다. ‘본질상 동일하시다’라는 뜻은, 능력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같으시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스스로를 그렇게 밝히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주셨으니’ | 마 28:18b
결국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과연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권세를 가지고 계신가?’, ‘과연 그 권세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이시고, 구원이십니까 ? 교리적인 고백이 아니라, 정말 그 능력있음이 실감이 나시나요 ? 정말 여러분의 인생을 모두 걸어도 좋을 만큼 충분한 능력인가요 ? 이건 정말 실재적인 질문입니다. 이런 신앙의 용어들이 실감이 나고 삶에서 체험되는 것이야 말로 신앙이 깊어져가는 것입니다.
3
예수님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첫번째 드러나 있는 것이 ‘창세기’입니다. ‘삼위일체주일’ 성서일과 1독서로 채택되어 있는 창세기 본문은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일단,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창조의 이야기를 과학교과서를 보는 것처럼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태초’라고 하는 그 까마득한 시간도 그렇지만, 존재를 있게 하는 ‘창조’라고 하는 힘도 우리로서는 헤아릴 수 조차 없는 ‘아득함’일 뿐입니다. 그러고보면 세상안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주어진 것들 뿐입니다. ‘모든 없는 것을 있게 하는 힘’인 ‘창조’는 대체 무엇일까요 ? 과학자들이 열심히 연구를 해서 지구와 우주의 기원이 언제인지를 추정해내고 생명체안에 담긴 유전적 정보를 모두 해석해내었다고 하여도,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게 하는 ‘생명의 힘’이 무엇인지를 그것만으로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반해 제자들과 교회 성도들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의 부활 사건만이, 모든 것을 존재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충만한 ‘힘’과 ‘권세’가 임한 충분한 증거였습니다. 예수부활의 경험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세상을 호령하는 로마 제국의 실질적 권세의 틈 한켠에서 그들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 세상의 모든 권세가 있다니, 물질에 경도된 채 살고있는 우리에게는 여간 와닿지가 않습니다. 그저 말 한마디면 세상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정치권력이나 재벌 총수의 재력 같은 것을 권세라고 생각하고 그 힘에 주눅들고 마는 우리로서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그들의 신앙이 대단해 보일 뿐입니다. ‘아멘’이라 말은 하지만, 예수님안에 있다고 하는 그 권세를 삶에서 발견하지 못하니 여전히 마음을 졸이고, 자꾸만 빈말처럼 생각되니 신앙과 믿음을 극단으로 몰아세우고 마는 스스로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성경은 세상이 보여줘왔고, 또 우리가 세상안에서 찾으려 애쓰는 그러한 힘들을 권세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만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입니다. 이 권세만이 본질적으로 권세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힘같은 것이 쓸모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세상의 힘은 여전히 유용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삶과 영혼을 구원해낼 수는 없습니다. 땅의 권세나 돈을 모두 가질 수 있다고 해도, 가녀린 생명의 단 하루도 구해낼 수가 없습니다. 결코 얻을 수 없던 그렇게 엄청난 가치인 생명을 거져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조금도 그것을 기뻐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영혼은 형편없이 무뎌져 있습니다. 이것을 ‘타락’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에 반해 의로움, 행복, 사랑, 생명같은 것이야 말로 성경이 말씀하는 삶을 구원해 내는 본질적인 권세입니다. 이것을 잃으면 인간 삶은 비참해 지고, 반대로 이것을 얻으면 세상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을 때만 깨달아지고, 실감하며, 누릴 수 있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4
사실 오늘의 세상은 지금까지 인류 역사중 그 어느 때보다 부유하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발전된 문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중에 가난한 이들이나, 낙망하며 사는 어떤 사람이라도, 이전 시대의 그 어느 누구보다 비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만큼만 되면 살만하고, 행복하겠다던 간절했던 삶을 이제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를 불행하게 여기고 우울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이 자랑하는 권세들안에 진정한 구원의 능력이 없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없어서, 저 사람은 가지고 있고 저 사람은 이루었는데 나는 그렇지 않으니 스스로를 불행하다 여기는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 주님의 구원이 너무나 필요한 이들입니다.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우리는 창세기의 우렁찬 외침을 들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이야 말로 진정한 구원의 능력을 잃고 살아가는 우리를 일깨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기사에 따르면 혼돈이 지배하던 땅을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으로 정복하셨고,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보시기에 좋았더라’였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끊임없이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세상을, 그토록 우리가 원망하고 불평했던 세상을, 오히려 성경은 긍정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면 만물들은 비록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도 주어진 세상을 끌어안고 살아가는데, 유독 인간만이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세상을 원망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어디를 보아도 볼품없어 보이고,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늘 깨어지고 상해있던 모습, 이런 우리가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이 신앙의 틀을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할 가치관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와 관계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창조행위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때 우리의 허락이나 동의가 전혀 필요 없었던 것처럼, 선하신 하나님의 의지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본질)으로 창조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세상, 그런 세상에 내던져진 인생이라고 좌절할 수 밖에 없던 우리가 비로서 하나님안에서 무한한 긍정과 가능성의 세계와 인생으로 용납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돈이나 물질의 가치로 재단하는 세상은, 모든 것이 당신의 소유임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모든 것이 다 소중하고 귀합니다. 풀 한포기, 나무하나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사람은 존재할 가치를 지니게 되었으니, 창조의 능력이야 말로 세상의 권세를 박탈시키는 진정한 힘과 권세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께 있다는 것이 ‘삼위일체’가 주목하는 목적지입니다.
5
3독서 마태복음 28장 16절 이하 단락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신 이후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17절을 보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놀라운 자리이지만, 여전히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 마 28:17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목격하였음에도 대체 이것이 어떤 능력인 것인지, 주님이 맞는 것인지, 주님을 따르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아직 확신이 없었던 겁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늘상 증거만 있으면 믿겠다고 하지만, 내 힘으로 얻을 수 없는 생명 조차도 감사할 수 없는 우리이니 그렇습니다. 다들 쭈볏거리고 있었던가 봅니다. 참지 못하시고 주님이 먼저 말씀을 던지십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 마 28:18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께서 곧바로 이렇게 지시하셨다’
여기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라는 부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처럼 믿음도 변변치 않은 사람들을 부활의 증인이 되어,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켜 나가야하는 막중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할 사람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 만일 저런 사람들을 어떻게 쓰시느냐?라는 생각이 되신다면 여전히 예수님도, 또한 하나님의 나라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사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이런 사람들은 사명에서 제외시켜야하는 일순위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그런 약점들, 하다못해 ‘믿음’의 수준조차 당신의 사람으로 세우는데 있어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있는지, 힘이 있는지, 유능하고, 똑똑한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28:20b
세상을 가로지르며 증인으로서 살아갈 능력이나 힘이나 권세는 주님이 감당해 주시면 그만입니다. 주님이 내 힘이 되시고, 주님이 내 길이 되어주시면, 그거면 충분한 겁니다. 우리의 모남이나 깨어짐, 씻을 수 없는 상처나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평판이나 능력에도 주님은 우리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아무말 없이 손을 끌고가시는 주님으로 인해 그때야 비로서 우리는 부끄럽고, 창피하고, 주눅들어 있던 패배자에서 ‘보시기에 좋았던 그 한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일상에서 구원해 내는 창조의 능력입니다. 세상의 어떤 편견이나 기준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힘찬 걸음을 생각만 해도 힘이 납니다. 주님안에서는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6
교회 역사속에서는 ‘삼위일체’ 논의로부터 발발한 분열과 갈등, 심지어 이단 정죄로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 전통이 ‘삼위일체’의 교리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삼위일체의 논의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라는 질문에서 비롯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께서 한분이시라는 말씀은 성부와 성령께서 오직 예수님안에서만 역사하신다는 것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경험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우리를 구원해줄 능력이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에만 주목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고후 13:13
당시의 고린도교회는 서로가 잘났다고 하는 교만과 독선, 은사주의로 가득했습니다. 오늘만 같으면 혀를 내 두르고 돌아서버렸을지도 모를 만큼 형편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신통치 않습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그는 권면의 편지를 축복으로 갈무리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참을성이 많고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그랬을까요 ?
바울의 축복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성자의 은혜와 성부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있는 한, 교회는 여전히 부활의 증인으로 세워질 소망이 있는 겁니다. 돈이 많고, 건물이나 규모가 크고, 조직이 튼튼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만이 소망입니다.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끝까지 붙들었던 이유는, 이것이야 말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복판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목하고 있는 한, 바로 그곳이 성부와 성령이 신비 가운데 함께 하시는 은혜의 발원지가 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나는 ‘복된 사람’인 겁니다. 세상 무엇보다 놀라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나의 인생을 둘러싸고 있으니 그렇습니다.
세상의 권세, 강요에 힘에 내몰릴 때마다 창조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세상의 권세에서 벗어나,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과 세상을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 시 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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