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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06/ 14/ 성령강림후 2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6. 10. 15:13
성서일과
- 창세기 18:1~15, (21:1~7) 혹은 출애굽기 19:2~8a
- 시편 116:1~2, 12~19 혹은 시편 100
- 로마서 5:1~8
- 마태복음 9:35~10:8, (9~23)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6wlgbnOl6bjr0WQIEdGuCsZ4HeG5uewe/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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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도 ‘소망’이 될 수 있습니까 ?
1
초기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웠습니다.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때, 로마에 의해 불순한 자로 처형당했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신들의 구원자로 믿으며 사는 그리스도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인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그들은 머물었던 곳이 어디든지, 반드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습니다. 요즘에야 부러 감추지는 않아도 그리스도인임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이 움츠려드는 형편이지만, 당시 교인들에게는 예수가 바로 삶의 정체성이며, 목적이었으니 언제, 어디를 가든, 또 무엇을 하든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아갈 수 밖에는 없던 셈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날 수록 본인들의 삶은 점점 힘겨워질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 (요15:19) 대로 세상이 예수님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힘이 세거나, 권세가 있는 자가 주인행세하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만이 주인이시’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셈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이 달가울리가 없습니다. 남들은 다 괜찮다고,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세상인데 그들만 나타나면 죄와 거짓이 여지없이 드러나고마니 기존의 질서나 가치를 고수하고 지켜내려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인들이란 여간 골칫덩어리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한 켠에서 그리스도인이란 그저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 (행 17:6) 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천덕꾸러기들입니다.
2
요즘은 핍박과 박해가 없는 세상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정작 과거나 오늘이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편한 걸음일리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에 매우 불편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힘 있는 자들은 권력을 사사로이 사용하고, 폭력과 악행을 일삼으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세상입니다.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덜 가진이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정당한 땀흘림의 대가를 요구하는 이들을 내치는 기업이 최고가 되어 버렸습니다. 돈벌이를 위해 미성년자들이나 여성들을 약취하고, 얼굴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악한 세상, 그렇게 저만 위하며 사는 이들을 마음 한켠에서는 부러워하는 비겁한 이들이 살고 있는 이런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 별 탈없이 또는 속편하게 살아가는데다가 어디를 가든지 거슬림 없이 살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이 병들어 있음이 틀림없지 않을까요? 진리를 모를 때에야 다 옳은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고 구원을 모를 때는 어찌할 수 없다 체념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을 주로 믿을 수록 세상의 악이 더 선명하게 보이니 가슴이 요동칠 수 밖에 없습니다. 갈수록 고통당하는 이들의 눈물이 크게 보이고, 그들의 서러움이 폭풍소리처럼 크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실과 믿음사이에서 무력하기만 한 자신에게 속상하게 됩니다. 어둠 가운데 빛처럼 살아가다보면 자연스레 어둠을 들춰내게 되고 그것 때문에 불이익을 받기도 합니다. 불의한 이들에게는 미움의 대상으로 미움을 받고, 반대편에게는 공연히 긁어 부스럼 만든다고 핀잔을 받기도 합니다. 어디에서든 환영 받지를 못합니다. 함께 하는 것을 꺼려하고, 불이익이나 제약도 따라옵니다. 때로는 이 길을 걷고 있기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모두 예수를 믿을 때 경험하게 되는 환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고, 그의 교회로 구별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환란을 직면해야만 하는 삶이므로, 초기 교회 공동체는 ‘핍박’이야말로 바른 신앙의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라 삼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저는 성경에서 만나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을 ‘정직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세상앞에서도 ‘정직한 그리스도인’이기를 소망합니다.
3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갈 때 뒤 따라오는 ‘환란’을 애써 무시하거나, 결코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치열한 신앙의 부침을 살고 있는 로마 교우들에게, ‘환란으로 인해 도리어 기뻐하라’고까지 강변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참으면 이제 곧 환란이 사라지고, 바라는 일들이나, 소원이 모두 이루어질 것이라는 맹목적인 기대감이 우리 마음을 흔들고 맙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고난을 이겨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환란이나 소망을 전혀 그런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정작 바울은 자신이 그토록 바라고 원하며 살던 것들을 ‘배설물’(빌 3:8) 이라고 까지 말했으니 말입니다. 대체 바울이 말했던 소망은 어떤 것일까요 ? 어떻게 환란이 소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인지, 마음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괴롭고 답답한 상황이 기쁨으로 뒤바뀐 사건들이 성경 곳곳에서 들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1독서 창세기 내용도 그런 사건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온전히 하나님을 믿음으로 재물도, 넓은 땅도 얻게 된 갑부가 됩니다. 요즘으로 치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약점이 있었는데, 자녀가 없다는 겁니다. 고대시대에는 이것은 치명적인 불행한 상황입니다. 다른 것은 노력으로 얻을 수 있지만 이것만큼은 하늘의 은혜를 입고 허락받은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어느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의 앞을 지나갑니다. 정성껏 나그네를 대접한 아브라함에게 보답이 주어집니다. 그들로부터 그의 아내 사라가 내년 이맘 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듣기만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나 아내 사라는 그 축복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12절에 보니 사라가 속으로 웃었다고 합니다. 터무니가 없어서 비웃고 만 겁니다. 이것을 두고 사라가 믿음이 없다고 타박하면 곤란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100세, 사라는 90세였습니다. 고령의 나이는 둘째치고 가나안에 들어올 때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겠다’ 약속하셨던 것이 벌써 25년 전 이야기입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을 빼고는 그들이 아들을 낳게 된다는 것은 모두에게 그저 터무니 없는 말일 뿐입니다. 그러니 맥없는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21장으로 넘어가면 이 축복이 결국 성취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았습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 창 21:6
얼마나 기뻤는지 사라가 웃음을 멈추지 못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의 옷을 붙들고 함께 기뻐하자고 재촉합니다. 말도 되지 않는다고 했던 ‘비웃음’이 이전까지 한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감격과 희열의 ‘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삼손’도 그러했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도 그런 경우입니다. 애타게 바라고 기다리던 자녀를 얻게된 놀라운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런 성경의 말씀들은 ‘기도를 많이 하면 태에 복이 임하여 자녀를 얻게 될 것이다’라는 믿음을 강요하는 근거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씁쓸하기만 합니다. 실재로는 이런 경험보다는 그렇지 못한 실패의 경험이 일상에는 더 많이 경험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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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핵심은 열심히 기도한다거나, 믿음이 좋으면 태의 복이 임한다거나,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세상의 관심, 세상이 가르치는 것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게 되었다는 성경의 핵심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경험했던 ‘하나님 경험’에 있습니다. 분명 이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스스로 체념하고 포기할 수 밖에 없던 현실에 있던 그들이 하나님을 경험한 이후에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을 웃음이 드리워진 복된 걸음으로 이끌어 내셨다는 고백인 겁니다.
사실 구약성경은 모두 이런 신앙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경험한 사관들은 ‘하나님 백성인 우리가 어쩌다가 망하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지나온 역사를 반성적으로 살펴볼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니 출애굽도 그러했고, 가나안에서 살아온 모든 시간이 실은 말도 되지 않는 것들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대제국 애굽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홍해를 건너온 일도 그렇고, 호전적인 민족들 틈바구니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도착할 수 있었던 것, 광야에서 살아낸 사십년도, 가나안의 강력한 국가들 사이에서 멸망당하지 않고 국가를 이루며 살게 되었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제외하고 보면 생각 조차 할 수 없던 아득한 일들 뿐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지나쳐왔던 일상이 모두가 ‘기적’이었고, 그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험한 역사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내 뜻대로 사는 거라 생각하며 몸부림치고 살았는데, 돌아보니 때마다 일마다 지키시고 베풀어주신 은혜로 살아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인생의 철이 들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5
3독서 마태복음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두루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던 예수님께서 ‘추수할 일꾼이 적다’라고 말씀하시던 9장 35 ~ 38절 부분에 이어, 곧장 12 사도를 제자로 부르시는 대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 이 본문을 ‘추수할 일꾼이 됩시다’ 라던가 ‘열심히 신앙생활합시다’라는 식으로 읽거나 설교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본문의 곡해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우리가 무엇을 하자’는 것이 아닌, '추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38절을 다시 읽어볼까요 ?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추수’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35절에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일들이 바로 그 일들입니다.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는 일들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사람을 ‘구원’해내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교회로 세움을 입었다는 것은 이 일들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하신 이런 일들을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요 ? 과연 우리 중의 누가 어느 누구인들 ‘구원’ 해낼 수 있겠습니까 ?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구원해 낼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는 일입니다. 추수할 때가 되면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일꾼들을 보내실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일꾼이 아닌 전적으로 주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설교 초입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환란과 고난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 했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삶에 도사리고 있는 환란이나 시험을 어떻게 감당해야할지 아득하가만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롬 5:3 ~ 4
결의에 찬 그의 믿음이 부럽습니다. 부럽다는 말은 여전히 이것이 우리로서는 않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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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설교를 갈무리 해야겠습니다. 9장 마지막 예수님 말씀을 다시 찬찬히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 마 9:38
해야할 것,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인에게 ‘청하는 것’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또 ‘기도’하라는 것이냐는 생각을 하시거나, 아니면 그러니 ‘기도만하면 다 된다’는 식의 ‘기도만능주의’에 빠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힘들면 기도할 수 있고, 핍박이나 환란을 당하면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말처럼 되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삶 가운데 감당하기 어렵고, 날카롭고 낯설은 일들이 찾아올 때, 우리는 낙망하고 실망하거나, 손을 놓고 포기하기 일쑤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게도 됩니다. 기도는 되지 않고,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닌,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신뢰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죽음앞에서도 생명을 맡길 수 있는,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몸짓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일이 찾아와도 주님이 나를 홀로 두시지 않을 것임을 믿기에 온전히, 끝까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은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또 그런 상태에서 하는 기도는 결국 속만 끓이며 자신안에 쓰디 쓴 상처만 남기게 될 뿐입니다. 바울은 환란 중에라도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관계를 ‘화평’이라고 표현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롬 5:1
그리고 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롬 5:8
그분의 사랑이 ‘믿음’으로 역사되는 관계를 이루셨고, 성령께서 나를 향한 주님의 넘치는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게 해주실 때 비로서 우리는 주님과 신뢰와 믿음의 관계안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사랑안에서 주님과 신뢰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주안에서 ‘화평’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7
왜? 성령은 어떤 사람은 깨닫게 하시고, 어떤 이는 깨닫지 못하도록 방치하시는가? 되묻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가 그 사랑안에서 평화하기를 바라는 분입니다. ‘구원’이야 말로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이 그를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살리는 역사에 관심이 없는 것이니 결국은 우리 편에서 성령을 거부하고 있는 것일 뿐인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아무리 ‘기도’의 자리를 지켜도 불안하고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상실감이나 허무가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은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건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도는 환란과 핍박앞에서 불안해 하거나 낙담해서는 않됩니다.
‘너는 왜? 이런 정도 밖에 않되었느냐?’ 타박하지 않으시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환란중에도 함께 하시는 주님만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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