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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06/ 21 성령강림후 셋째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6. 16. 23:55
성서일과
1독서 창세기 21:8 ~ 21 ( 또는 예레미야 20:7 ~ 13 )
응송 시편 86:1 ~ 10, 16 ~ 17 ( 또는 시편 69:7 ~ 10 ,11 ~ 15 )
2독서 로마서 6:1b ~ 11
3독서 마태복음 10:24 ~ 39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0ZL9uLjUzfvKjUiU6H7bR2UUFuvDrYxS/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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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실황 F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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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브엘세바'에 새겨진, 두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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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가 제작한 ‘In to the Night, ‘어둠속으로’라고 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얼핏 짧은 소개 영상으로 내용을 보게 되었는데, 소재가 참신해서 호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태양의 이상으로 발생한 태양파가 지구를 덮치고 영향권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죽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비행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이 태양의 접근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어둠을 향해 도망친다는 설정입니다. 지구는 매일 끊임없이 자전하니 누구도 태양을 피할 도리는 없습니다. 지구가 자전을 멈추던가 태양파가 절로 사라지는 것을 기대하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없으니 그들이 처한 상황이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고, 도망치는 그들의 애쓰는 모습이 그저 절망스럽게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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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따지고보면 이것은 비단 영화나 드라마에만 존재하는 상황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아침이면 시작하고 밤이 되면 마무리되는 치열한 매일을 맞이하며 살고 있습니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이 말이 절망의 넋두리가 아닌, 소망과 기대감으로 인한 감탄이 되시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누구인들 특별나서 천국에서 살고, 누구는 못나서 지옥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원해서도 아니고 뜻해서도 아닌 그저 이렇게 우리는 모두 이 지구별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 채워진 삶의 질이나 농도 만큼은 전혀 같지가 않지요. 비교적 풍성한 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펼쳐진 세상을 지옥처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어떻게 저리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은데도 매일에 깃들어있는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저마다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통해 ‘지금’ 바라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주어진 자신의 인생과 삶에 동일하게 채우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시선을 바꾼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겁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정작 눈앞에 보여지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눈을 사로잡는 두려움이 밀려올 때 벗어날 수 있는 쉬운 방법을 한가지 가르쳐 드릴까요 ? ‘눈을 감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정말 눈꺼풀 하나 움직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평안할 때는 몰라도,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정작 눈꺼풀 한번 닫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두려움 앞에서는 모든 감각이 굳어지고 맙니다. 오늘에 눈을 감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나 자신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부정하는 ‘자기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산 사람이 죽음을 경험하려니 그 만큼 힘이 들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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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마음을 지켜내고 수련에 매진하는 노력도 결국 다른 누군가 보다 조금 더 도덕적으로 보일 뿐이고, 타인을 섬기고 봉사를 하고 사회개혁운동을 한다고 해도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의로워 보이는 것 뿐입니다. 건강을 잘 지켜내고 지금 별 이상이 없어 보여도 결국 다가오는 죽음을 거부할 재간이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손을 닦고 마스크를 쓰고 하는 것으로 코로나 비말 전염을 어느 정도 막을 수는 있어도, 백신이 만들어질 때까지는 코로나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이런 방식들의 열심은 본질적이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음이 가져다 주는 고통과 절망, 내일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살아가고는 있지만 실재로는 대부분 안쓰러운 몸부림일 뿐,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태양을 피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도망다녀야 했던 드라마속의 사람들처럼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국은 시간을 조금 더 지연시키는 것일 뿐, 시시각각 다가오는 태양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저 마치 몸부림칠 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모래늪처럼, 살려고 하면 할 수록 결국은 더 곤고해지고 허무하고, 지치기만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어느 순간 닥쳐오는 두려움앞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그저 드리워진 세상을 향한 ‘눈을 감는 것’뿐 입니다. 성경이 죽음외에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은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영원한 생명과 자유를 주목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 구원에 이르기 위해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십자가’라고 하는 ‘죽음’을 지나칠 것을 요구합니다. ‘살아라’ 라고 말하기 이전에 먼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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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마 16:24
예수를 따르는 길은 ‘십자가’ 즉 ‘죽음’을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려면 반드시 먼저 해야할 것은 죽어야만 합니다. 부활은 죽음을 지나야만 경험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복음’은 ‘죽음’을 이야기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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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성경의 ‘죽으라’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떤 뜻일까요 ?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주님을 만난 이후 제자들이 그물과 배를 모두 버려두고 따랐던 것처럼, 이전까지 살던 방식을 던져버리고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 가겠다는 겁니다. 내 기준과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방식을 따르며 사는 겁니다. 이것이 ‘신앙적 회개’입니다.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것, 그것이 예수믿음이고, 예수 믿음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버리고 말씀이 가르치는대로,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 그런데 그것이 쉽던가요 ? 세상과 다르게,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역시나 여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나 비난이 뒤따르고 자꾸만 비교가 되니 혼자만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것이 더 견디기 힘들고, 눈을 감는 것이 어렵습니다.
예레미야 20장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예레미야는, 평화를 이야기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온갖 박해를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도 예레미야의 심판의 예언을 듣기 싫어하고, 오히려 거짓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신뢰하고 그들에게 열광합니다. 사람들이 조롱하고,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고 마는 이런 상황은 견디기 힘든 겁니다. 오죽했으면 그가 하나님께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겠다’(20:9)고 까지 했을까요? 우리도 믿음과 삶의 틈바구니에서 이렇게 매일을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곧장 다른 말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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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 렘 20:9b
이런 대접받으면서는 못살겠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다시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밖에는 살 수 없는 것이 지금 예레미야의 삶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이후에 그의 삶이 온통 뒤바뀌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뒤이은 예레미야의 목소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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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 13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의 영광을 맛 본 사람이라면, 삶이 제 아무리 거칠고 투박하고 괴로워도 그의 영광의 능력을 찬양할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이것은 공허한 외침이나 허튼소리가 아닙니다. 세상에 대해 눈을 감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선해지고 어느새 고난 중에도 감사하고, 환난중에도 찬양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삶을 움직이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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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힘이 들면 술을 마시고, 심지어 마약으로 현재 고통을 잊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긍정적으로는 운동을 하거나, 정신없이 일에 몰두함으로 처해진 국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다 효과가 있습니다. 그것을 하는 동안에는 짓누르는 모든 공포와 힘에서 벗어나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잠시 동안 잊게 하는 효과만 있을 뿐이고, 육체나 영혼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것들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무엇인가 더 큰 기쁨과 소망에 빠져들수 있다면 고통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 집중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이전까지 땅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사건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온전히 빠져들 때 비로서 우리는 나를 압도하던 모든 것들이 상대화되는 ‘자유’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을 성경은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바울은 세상에 대해 눈을 감고, 주님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는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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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롬 6:11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사람’ 이 말은,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더 생생한 실재가 되셨다는 말이고, 그러므로 이제는 삶의 모든 의식과 에너지를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살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위로가 되고, 인생의 걸음을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조준하고 있습니까 ? 하루 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주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걷고 있는 구원의 여정이라는 것이 실감이 납니까 ? 이것이야말로 모든 악을 도말하고 절망과 두려움에서 삶을 구원해내는 능력이 됩니다. 저는 우리에게 이 은혜가 충만해 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 있는 이런 놀라운 구원의 사건을 어떻게하면 누릴 수 있게 되는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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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본문인 창세기 사건을 조금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마침내 성취되어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얻게 되었다는 사건을 살펴봤었습니다. 오늘 구약본문인 창세기 21장 8~21절까지의 내용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온전하게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삭을 얻기 이전에 이미 사라의 몸종인 하갈에게서 자녀를 얻는 인간적인 방법을 택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아내 사라가 이삭을 낳게 되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마엘은 이제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야 할 이삭의 앞날에 골칫덩어리일 뿐입니다. 사라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고, 이삭의 앞날을 보장하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어좇는 겁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던 아브라함이 사라의 성화에 못이겨 이들 모자를 내어좇는 모습은 여간 실망스럽지가 않습니다. 게다가 이들을 내친 곳은 어디 살만한 곳도 아닙니다.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는 광야에 먹을 것 조금과 물 한부대만 손에 들리운 채 이들 모자는 황망하게 내어쫓기고 맙니다. 광야에 내어던져진 그들의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고 처량합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어제까지 보이지 않던 ‘죽음’이 그들 모자의 발앞에 찾아왔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봐야만 한다는 그 서러움 때문에 하갈이 이스마엘과 부둥켜 안고 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들 모자의 울음을 듣고 계신 분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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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 창 21:17b ~ 18
생부인 아브라함에게서 버려지고 내어좇긴 천덕꾸러기를 주목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광야를 헤매이며, 언제 죽게 될지를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마땅해보이는 버려진 이들을 찾아오신 이가 하나님입니다. 그리곤 그들의 생명을 두손에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제 목숨하나 건사하는 것 외에는 모두 배부른 소리일 수 밖에 없는 약속을 해주십니다. 훗날 큰 민족을 이루는 이가 되도록 해주시겠다 것입니다.
재미난 것은 곧장 이어지는 22절입니다. 22절은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때’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브엘세바 광야에서 죽게 생겼던 일촉즉발의 ‘그 때’이고, 인간에게 버려지고 죽게 된 그들의 울음을 듣고 하나님이 찾아오신 ‘그 때’입니다.
자신이 내어 좇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죽게 되었지만 아브라함은 그 일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광야에 버려진 연약한 이들이 죽게 될 것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을 텐데, 짐짓 잊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 때’ 그는 아비멜렉이라는 유력자에게 양 일곱마리를 주고 우물을 얻게 됩니다. 생존을 위협할 갈증에서 벗어나게 해줄 넉넉하고 풍성한 수단을 얻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 아득하게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31절을 보니 아브라함이 우물을 얻게 된 그곳의 지명이 ‘브엘세바’라는 것입니다. 브엘세바 한편에서는 마실 물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데, 브엘세바 또 다른 편에서는 더 바랄 것이 없는 평안을 얻습니다. 않되는 사람은 뭘해도 않되고, 잘 되는 사람은 더 잘되는 불편한 모습, 영락없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 씁쓸하고 불편해집니다.
그러나 본문에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브엘세바의 뜻은 ‘맹세의 우물’입니다. 제 힘으로 살만했던 아브라함은 사람과의 사이에 약속과 맹세로 자신의 삶을 보장해줄 우물을 얻어 냅니다. 그런데 시선을 돌려 바로 저만치에 도무지 제 힘으로 살아갈 힘도, 소망도 보이지 않는 버려진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는 하나님이 당신이 찾아오셨고, 당신께서 직접 그들의 인생과 삶이 되어주시마라고 약속을 맺어주셨습니다. 무력하고 절망스러운 실존에 무너진 나를 기꺼이 찾아내시고 살려내시는 주님을 믿는 것이야 말로 ‘구원’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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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죽는 것’외에는 다른 답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기 스스로 해결하고, 성취하고, 이루어 내려하는 모든 시도와 노력이 중단되어지는 절대적인 상황이 ‘죽음’을 직면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의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고 또한 그럴 수도 없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니 ‘죽음’을 뛰어넘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잇대는 것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죽음은 끝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끝이 아니니,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지 않습니까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모든 생명이 종말을 맞이하게 될 그 때,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자로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제 생명을 살려내보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그것을 약속하고 자랑하는 세상의 맹세는 깨어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구원이 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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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너희 존재의 중심인 영혼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너희는 너희 삶 전체 _몸과 영혼_를 그 손에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된다’ | 마 11:28 _ (메시지성경).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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