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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07/ 05 성령강림후 다섯번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7. 2. 22:01
성서일과
- 창세기 24:34~38, 42~49, 58~67 혹은 스가랴 9:9~12
- 시편 45:10~17혹은 시편 145:8~14
- 로마서 7:15~25a
- 마태복음 11:16~19, 25~30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g1oOAwPnmwANnrS0O_8B6reNY6wnXfff/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x0prXqSJp0w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 * 주일 예배후,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
예배실황 full
진정한 ‘쉼’을 누리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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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세끼’라고 하는 방송이 있습니다.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즐겨보는 편인데, 내용이란 것이 뭐 아주 단순합니다. 남자 배우들이 섬에서 음식을 해먹으며 지내는 모습이 다입니다. 아침을 만들어 먹고, 이제 다시 점심을, 그러니 설겆이가 마쳐지자 마자 곧장 다시 어떤 저녁식사가 차려질지 기대로 이어집니다. 저녁을 먹고 어둑해져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를 맺음하는 것, 정말 그것이 이 방송의 내용 전부입니다. 요즘의 방송 프로그램들이란 것은 카메라 앵글이 쉼없이 바뀌고, 음악이나, 사람들의 행동이 쉴새 없이 교차되니 시선이 따라가기에 너무 숨가쁜데, 이것은 호흡을 따라가기에 크게 무리가 없고 편안해서 좋습니다. 한가지 흠이있다면, 화면에 보이는 음식이 너무 맛있어 보여, 저도 모르게 야식에 손이 간다는 것 뿐입니다.
그러고보니 문득 하루 세끼의 밥 먹고 사는 것 만으로도, 아니 그런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저렇게 넉넉해질 수 있는 것인데, 대체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마음은 왜 이렇게 헛헛하기만 할까? 의문이 일어납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툭 떨어져 나간 그들을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들처럼 살아가야 하는 인생에서 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나온 것은 아닐까요? 아마도 요즈음 우리 현대인들의 눈에, 그들의 너무 단촐한 이런 일상은, 몇일 휴가라면 몰라도 너무 무료하고, 지루하며, 또 의미없게 보일 겁니다. 그러고보니 바삐 살아가는 우리가 제일 못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버텨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변화가 없고, 더디가는 것을 견뎌낼 진득한 힘을 우리는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밥을 지을 때에도, 성큼 뜨지 않고 ‘뜸’을 들일 만큼 시간을 멀리 보는 자신안에 채워진 여백이 많았는데, 더 채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에 내몰린 우리는 이제 뜸들일 여백을 잃어버린 불쌍하고 슬픈 이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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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른, 아이 할 것없이 모두가 힘들고 지쳐있습니다. 만성피로, 만성질환, ‘만성’이라는 말이 늘 따라붙습니다. ‘만성’이란 말이 ‘버릇이 되다시피 해서 쉽게 고쳐지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습관처럼 피로가 몸에 들러붙은 사회입니다. 그래서 다들 쉽게 짜증이 나고, 그 만큼 서로에게는 무관심해집니다. 그저 바라는 것은, 꿈같은 ‘휴식’뿐 입니다. 한해가 마무리되어질 때 즈음, 사람들은 내년 달력을 일월부터 십이월까지 서둘러 한눈에 훑어봅니다. 얼굴색이 밝지 않은 이유는 공휴일수가 적어서 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피로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요? 그 만큼 중요한 일들이 많아진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된 것일까요? 제 몸이 망가지는지, 사람 사이가 깨어졌는지도 모를 만큼, 아니 그래도 어찌할 수 없다는 듯이 앞만 보고 달려갈 정도로 말입니다.
‘피로사회’라는 책에서 한병철 교수는 우울증환자와 낙오자를 양산해 내는 것은 우리 사회가 ‘성과주의’에 길들여져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대단히 정확한 사회진단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그것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본질인 ‘죄’라고 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죄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성과주의, 업적주의, 자기스스로 성취하고, 자기 스스로를 구원해보려는 이런 노력에 매달리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 그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정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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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율법주의의 열차에 올라타버리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좀처럼 내려올 수가 없습니다. 내려서는 순간 뒤쳐지거나 도태되어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목덜미를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어찌할 수 없어 사력을 다해 치달아 가보았지만 정작 우리는 다시금 채워지지 않은 허무에 붙들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피로하고, 여전히 공허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이란 것을 세상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닮게 창조된 우리들 인간의 마음은 세상을 모두 담아도 채워지지 않을 만큼 터무니 없이 커다랗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다 가져다가 채워도 부족함을 느끼게 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제국을 이루었던 알렉산더, 나폴레옹, 징기스칸, 그들은 만족함이 없이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우리도 오늘 이렇게 살아갑니다.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예, 우리 영혼을 채우려면 하나님 정도는 되어야 채워지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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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가르쳐주는 ‘휴식’은 결코 우리 영혼에 ‘쉼’을 줄 수가 없습니다. 휴식이나 휴가를 다녀온 이후, 더 무겁고, 지치고, 곤해지지 않던가요. 우리는 휴가를 가서도, 근심하고, 고민하는 일을 멈추지 못합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모두 ‘이렇게 밖에는 살 수 없다’는 강박에 붙들려 있습니다.
영혼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과주의라고 하는 자기성취와 구원의 늪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우리의 삶과 죽음, 화와 복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또 그를 향한 믿음으로 우리안이 채워져야만 하는 겁니다.
일단 주님을 향한 믿음이 채워지면, 내 마음대로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도, 실은 그저 조금 불편해지는 것 뿐임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다른 한편으로보면, 조금 더 얻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돈이 아니면 않된다는 극단적 사고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가만히 보면 돈이 조금 부족한 것은 조금 더 불편한 것 뿐입니다. 오히려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그만큼 짓눌림으로부터 누리는 자유는 커집니다.
문제는 이것이 맞는 말이지만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것이 않된다는 겁니다. 아니, 실은 우리 힘으로는 이런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늘 우리 삶이 똑같은 겁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 롬 7:15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애를 써도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다시금 늪으로 빠져들어가는 자신에 대한 이 절규와도 같은 고백을 여러분도 경험을 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아무리 애를 쓰고 또 마음을 다잡아 보아도 어느새 다시 그 자리에서 마주하게 되는 자신의 모습은 참담하기 까지 합니다.
바울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롬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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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일 구약 본문 창세기 24장을 보면, 오늘도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또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은 끔찍한 시험따위의 내용은 없습니다. 귀한 아들 이삭이 어느새 결혼을 할 나이가 되어, 믿을 만한 종이었던 ‘엘리에셀’에게 이삭의 혼인 상대를 찾는 일을 맡기었고 마침내 며느리 감인 ‘리브가’를 얻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지금이야 결혼 정보회사도 있고 결혼 상대를 찾을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있지만, 그 당시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웃들에게 수소문을 하거나 소개를 받아도 될 텐데, 굳이 떠나온지 수십년이 지난 고향땅에서 며느리감을 찾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곳에 어떤 며느리감이 있는지도, 그런 여인을 만날 수나 있을런지 아무런 확증도 없습니다. 그저 다른 말 없이 기꺼이 이곳까지 따라와준다면 하나님이 짝지어준 인연으로 삼겠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은 주인의 말대로 멀고 먼 아브라함의 고향 ‘하란’ 땅까지 찾아가서 마침내 그 곳에서 그런 여인을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속에 성서기자가 숨겨둔 몇가지 재미난 장치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아브라함의 종인 ‘엘리에셀’의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두번째는 며느리를 찾기 위해 찾아갔던 고향땅은 나홀의 성이 있던 ‘하란’입니다. 이 두가지 장치가 본문의 핵심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헤브론에서 하란까지는 800키로미터가 넘는 먼길입니다. 이런 여행길을 요즘과 같이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고대시대에 이런 여정은 자칫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게다가 ‘지체하다’, ‘낭비하다’라고 갈대아어로 ‘하란’의 지명 뜻처럼, 정말 이 길은 말 그대로 지나치게 터무니 없고 낭비적입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가던 여정을 멈추었던 곳도 바로 이곳 하란이었고, 이 정도면 살만하다고 안주하고 만족하던 안주하다가 아버지 데라를 잃었던 곳도 바로 하란이었습니다. 하란은 아브라함에게는 ‘실패의 상처가 고스란히 새겨진 장소였습니다. ‘하란’은 그저 꺾여지고, 실패하고, 지체되어진 손해보는 장소일 뿐입니다. 지우고 싶은 실패의 자리, 아무리 해도 이해될 수 없는 지우고만 싶은 시간들이 쌓여 있는 곳이 ‘하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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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의 소중한 아들의 베필을 구하는 중요한 일을 위해 다시금 하란을 찾았습니다. 믿고 의지할 것 하나없던 가나안에서의 수십년 동안, 걸음마다 자신을 지키시고 길을 예비하시던 하나님 경험이 쌓일 수록 지나온 시간이 달리 보였습니다. 아무리 기억해보아도 한번도 자신을 실망시키신 적이 없으셨던 하나님입니다. 모리아산에서도 이삭을 기필코 지켜주셨던 예전의 사건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마침표로 쌈으며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인생의 길이 하나님께 있음이 믿어지니 이제 하란은 더 이상 실패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하나님이 되시고자 이곳까지 이끌고 오셨던 여정이었을 뿐입니다. 어느새 종을 떠나보내며 ‘하나님의 천사가 앞길을 인도하실 것이다’라고 말할 만큼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깊고 단단해졌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축복했던 대로, 하란을 찾아간 엘리에셀은 그곳에서 이삭의 베필인 ‘리브가’를 찾게 되었습니다. 재미난 것은 종 ‘엘리에셀’의 이름 뜻이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고보니 믿음으로 반응하는 걸음은 모두가 하나님이 도우시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엘리에셀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나홀의 성에 도착하고 나서 그는, ‘물 길러나오는 여인들에게 마실 물을 달라했을 때, 낙타에게 먹일 물까지 건네주는 여인이 있다면 이를 하나님이 예비하신 신부감으로 믿겠다’는 터무니 없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은 아무렇게나 표징으로 삼고 하나님을 협박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혹여 정말 그런 여인이 나타난다고 해도 정작 우리의 기준에 터무니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인도해주실 분이심을 믿겠다는 의지인 샘입니다.
리브가도 만만치 않습니다. 58절을 보니 ‘리브가’는 비교적 덤덤하게 엘리에셀을 따라 가겠다!고 결정하고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거는 일에, 생면부지 처음보는 이를 믿고 수백키로 떨어진 곳을 향해 길을 따라 나설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아무리 보아도 아브라함, 엘리에셀, 리브가 이들의 결정과 선택하는 방식들은 합리적이지 않고, 무모하고, 또한 현실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우연’이라하기에도 너무하다 싶을 만큼 딱 들어맞는 상황이 억지스럽고 이질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지체되고 낭비되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길이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묵묵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경험되어지고, 그 경험은 결코 낭비되어지지 않는 선한 결과로 다가온다는 것 말입니다. ‘필연’은 ‘우연’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옷’과 같다는 말처럼, 하나님의 필연은 그를 믿고 걷는 사람들의 우연같은 걸음위에 새겨지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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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삶의 방식이나 결은 모두 다르지만, 그들의 선택은 모두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그들의 경험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보면, 믿음의 길이란 우리에게 늘 너무 더디 가는 길, 어느 순간 멈추어선 것처럼 보이고, 실패가 뻔한 망하는 길처럼 보이니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하시다! 믿음을 가지고 보면, 믿음의 선택은 우리에게 늘 자유와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성과주의, 자기 성취, 자기 스스로를 구원해야만 한다고 내몰릴 수 밖에 없는 우리는 사라지고, 지키시고 인도하셔서 반드시 선한 결과로 이끄시는 하나님만 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더 복된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 하나만 붙들고 하나님을 따라야했지만, 우리는 길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영혼의 쉼을 얻을 수 있는지,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사망의 덫에 갇혀 있는 처량하고, 안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직접 ‘길’이 되어주셨으니 길을 찾아 헤매이지 않아도 되니 이보다 복될 수가 없는 겁니다. 길을 알고 있고, 더욱이 그 길이 분명하니 더 이상 불안해하거나 염려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이제 천천히 가도 괜찮고, 잠시 쉬었다가 가도 됩니다. 이 길이 옳기에, 이 길을 따라만 가면 그만입니다. 누구처럼, 혹은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길의 존재의 목적은 목적지까지 인도하는 것에 있는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어주신 생명의 길입니다. 구원을 위한 분명한 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어진 이 길,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고 이끄시는 ‘참되고, 분명한 진리의 길’이라는 사실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 때문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졌다는 말씀을 깊이 새겨들으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믿어질 때 비로서 하나님을 향한 ‘할렐루야’의 찬양이 터져나오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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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질문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수시 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한 학생에게 하루 하루 다가오고 있는 수능을 앞두고 공부하는 시간이 초조하거나, 불안하거나, 혹은 두렵거나, 괴로울까요?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믿음의 길을 걸을 때, 너무 더디다고, 다른 이들보다 늦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 길이 옳습니다.
길이 끊어질까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길이니, 이 길은 폐기되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주님과 함께 걷는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누리는 ‘쉼’과 ‘구원’ 만이, 성과주의의 피로로 우리를 내모는 세상의 권세를 깨트릴 수 있습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멘. | 마태복음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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