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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 07/ 12 성령강림후 6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0. 7. 7. 21:35

    200712 주일 설교문.pdf
    0.17MB

    성서일과

          1독서     창세기 25:19 ~ 34 / 혹은 이사야 55:10 ~ 13

          응  송    시편 119:105 ~ 112

          2독서    로마서 8:1 ~ 11

          3독서    마태복음 13:1 ~ 9, 18~ 23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3i6Ynq0mIHXyCLmUPTuBcorT0uGMiz-8/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wQR4598Sz0U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예배영상 full

    https://youtu.be/870YW5Db4KA = '클릭'하시면 예배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팥죽 값' 얼마면 됩니까? 

    1

    어느새 지나온 시간의 흔적이 꽤 많이 쌓여 버린 나이가 되었습니다. 교회학교 반사 선생님의 풍금 소리에 맞추어 따라 부르던 찬양과 넋을 잃고 들었던 성경이야기들 중에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으니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습니다.

    팥죽을 파는 야곱에게는 열두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 하나 키가 크고요 나머지는 작데요….

    들어보셨나요? 그때, 속으로 ‘이스라엘 사라들도 우리처럼 동지팥죽을 먹는가 보구나’라던가, ‘야곱은 장사를 잘하는 사람일까?’, ‘열두 명이나 되는 자식들 먹이려면 장사가 잘 되어야 하는데’라는 엉뚱한 생각에 신기해 하던 그 때의 기억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크고 나서 다시 읽은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참으로 어렵기만 했습니다. ‘대체 하나님은 왜? 야곱을 선택하였을까?’, ‘야곱의 무엇이 맘에 들으셨던 것일까?’ 답을 찾아보려 혼자서 끙끙대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답을 아시나요? 원래대로라면 전통을 따라 첫째 아들인 ‘에서’가 장자로 세워지는 것이 마땅한데, 흠 투성이인 ‘야곱’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중심에 놓이게 되고, ‘에서’는 하나님이 써 내려가시는 역사의 한켠으로 빗겨나고 맙니다. ‘야곱’과 그의 계보를 중심으로 씌여지는 역사속에서, ‘왜 야곱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겨집고 판단하고 헤아리실 수 없는 분이 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은 우리와 생각이나 뜻 자체가 다르시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 55:9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헤아리고 타당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선하심에 기대어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믿음’ 뿐입니다. 어떻게 믿을 것인지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입니다.

     

    2

    ‘야곱’과 ‘에서’의 운명은 참 기구합니다. 그들 사이의 일그러진 운명은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야곱은 형의 발뒷굼치를 붙잡고 나왔다고 합니다. ‘야곱’은 치열한 인생, 날 때부터 경쟁에 내몰린 인간 삶을 상징하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결국은 오늘 ‘팥죽’ 사건으로 이들 형제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깨지고 맙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날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에서’는 배가 고팠습니다. 자신이 입으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정말 몹시 시장했던가 봅니다. 때마침 ‘야곱’이 쑤어둔 팥죽을 보는 순간 그만 ‘에서’의 눈이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당장 한그릇 좀 달라했지만, 야곱은 대가를 요구합니다. 참으로 계산에 빠른 인정머리 없는 ‘야곱’입니다. 그가 요구했던 팥죽 값은 ‘장자의 명분’입니다. 너무 배가 고파 이것 저것 생각할 틈이 없던 터라, ‘에서’는 덜컥 거래에 응합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 25:32

     

    문제는, ‘에서’의 시장기가 어느 정도 해소되자 정신도 돌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결국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빼앗겼버렸고, ‘야곱’은 가문의 장자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세워집니다.

     

    장자의 명분을 팔고 맛있게 팥죽을 먹고 있는 ‘에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동생이라면서 계산적인 ‘야곱’을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에서’의 행동을 참으로 ‘어리석다’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어리석다라고 생각하셨나요? 아마도 팥죽 한그릇에 비하면 장자의 명분이라는 것이 터무니 없이 소중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장자의 명분이 그렇게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 가치는 얼마나 되는 걸까요?

     

    3

    성경 기자는 34절 후반절에 오늘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에서’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비난합니다.

     

    …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대체 장자의 명분이 무엇이고, 얼마 만큼의 값어치가 있길래, 성경은 ‘에서’가 이것을 가볍게 여기었다고 비난하고, 우리도 그의 행동을 어리석다고 동조하게 된 걸까요?

     

    이스라엘에서는 모든 첫 새끼, '장자’는 태생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의 기원은 출애굽기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출애굽기 13:12

     

    사실 ‘장자’는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자’의 명분의 의미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자격,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있는 대상으로 여겨졌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복은 장자를 통해서 전해지는 겁니다.

    무엇보다 ‘장자의 명분’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실체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인 셈입니다. 그래서 ‘장자의 명분’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바꾸어서 다시 34절 후반절을 읽어보면 아주 실감이 납니다.

     

    … 에서가 하나님과의 관계(장자의 명분)를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에서’의 실수가 어떤 것인지, 이제 눈에 들어오나요?

     

    4

    그러고보니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에서’의 처신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 틀림 없습니다. 이런 ‘에서’의 행동을 우리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이런 것은 늘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를 어렵게 만듭니다.

     

    장자의 명분을 값으로 요구하는 '야곱'에게 '에서'는 32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내가 죽게 되었으니…어딘지 모르게 귀에 익숙한 말입니다. 그러고보니 우리도 이렇게 불퉁 거릴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른다거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신앙을 가진다는 것’ 다 좋은 말이지만, 당장 먹고 사는 문제만은 못합니다. 당장 배고픈 현실에서,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은 너무 멀리 있습니다. 어리석은 ‘에서’라고 비난을 했지만, 실은 우리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이야기가 되고 보니 그렇게 삶에 내몰린 ‘에서’가 안쓰럽기까지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말하지만, 실은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방식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팥죽 한그릇이면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우리네 방식으로 살아가는데 익숙할 만큼 우리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눈 앞에 닥쳐온 먹고 사는 문제는 우리 마음을 혼미하게 만듭니다. 판단력도, 가치도, 삶을 향한 걸음도 망가트립니다.

     

    5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먹어야 살 수 있고, 이 땅에 살아가는 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이 문제에 빠져 벗어나지 못한 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뭐 대수냐?’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막상 추위가 가시고 난 이후가 되면 거추장스럽기만 한 아무렇게나 벗어버린 겉옷 같은 것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기 마련입니다.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돈이 중심이 되는 삶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고,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사람들의 평판이나 명성을 얻는 방법에 사로잡힐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를 받는 삶을 살 수 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이란, 스스로 가치 있다 여기지 않고 중요하게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결코 선택하지도, 또한 그런 것들 때문에 삶에 영향을 받지도 않는 존재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 돈 문제에 빠져버린 세상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다 보니, 병원은 돈이 없는 환자를 받지 않습니다. 학교도, 기업도, 사법부도, 그리고 심지어 교회도 돈의 가치가 이끄는대로 살아갑니다. 돈만 된다면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그것이 죄가 되는지도 모르는 세상입니다.

    오늘 무엇을 먹고 사는가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생명을 지탱하는 문제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6

    먹고 사는 문제보다는 오히려 신앙이야말로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이라는 말씀에 실감이 나고, 동의가 될 수 있다면 복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일단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구원의 방식이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고나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기쁨을 삶을 통해 경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3독서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그 유명한 ‘밭’에 관한 비유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해주셨습니다. 

    천국 말씀을 듣는 사람들중에 네가지 유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그리고 좋은 땅이 그것입니다. 길가는 무지해서 말씀을 들어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돌밭이나 가시떨기는 말씀을 듣고 가치를 발견하고 기뻐했지만 환란이나 박해,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앞에서 넘어지는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팥죽을 얻기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같은 사람들입니다. 가치를 모르니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좋은 땅같은 사람입니다.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육십 배, 또 어떤 것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삼십, 그리고 육십, 그리고 백배라고 쉽게 오해하곤 합니다. 백 배라는 수량에 마음을 쉽게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수의 크기는 가치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받은 몫이 다르고, 결실하는 몫도 다를 뿐입니다.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천국 말씀, ‘복음’은 일단 땅에 심기워지면, 반드시 그 몫 만큼의 허락된 열매를 맺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되고 좋은 소식’인 겁니다. 그런 말씀, 그런 하나님이 계시니 좋은 땅을 일구며 살아야 하는 겁니다. 

     

    7

    지금 우리는 지금 ‘야곱’처럼 살고 있을까요? 아니면 ‘에서’처럼 살고 있는 걸까요?

    혹시, 장자의 명분인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명분을 먹고 사는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떻게 하면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리지 않고, 결실하는 살 수 있을까요?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 환란이나 근심과 같은 팥죽에 복음이 가져다 주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쁨을 놓치지 않으며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성서일과의 본문들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며 사는 것’입니다. 팥죽이 아닌, 장자의 명분, 결실을 반드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고통과 환란, 원수들에게 둘러쌓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기울이겠다는 시편기자나, 하나님 입에서 나가는 말씀이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라고 외쳤던 이사야 선지자,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좋은 땅이나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았던 초기 교회 공동체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이 말씀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말을 깊이 새겨들으십시오 이것만 마음에 붙들고 계시면 됩니다.

    팥죽 한그릇에 팔지 마시고, 이 약속을 붙들고 사십시오. 이 약속을 하시고 이루시는 주님께 집중하며 사십시오.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반드시 결실하게 하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8: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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