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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07/ 19 성령강림후 7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7. 15. 15:19
성서일과
1독서 창세기 28:10 ~ 19a, 혹은 이사야 44:6 ~ 8
응 송 시편 139:1~2, 23~24
2독서 로마서 8:12 ~ 25
3독서 마태복음 13:24 ~ 30, 36 ~ 43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FBCKpsi5TVu4KSdPrU5Sh3RN4XTGAMhe/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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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하는 종의 영
1
지난 한주는 참으로 정신없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정부에서는 여전히 잠잠해 지지 않는 코로나 확산세를 통제하기 위해 종교모임의 일부 제한 방침을 발표했고 교계는 이를 종교탄압이라는 이유로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사회적 책임에 더 솔선하고 희생해야하는 것이 종교의 본분이기에 좋게만 볼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 와중에 이름만 대면 알 수 있을 만한 유력 정치인은 자신의 허물을 덮으려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곳곳마다 갈등과 대립으로 혼란스럽게만 보이는 모습에 현기증이 날 정도였고, 둘러보는 곳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꼼작못하는 이들의 불안과 공포의 신음만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전교조나 진보 교육으로 나라가 망할 것이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동성애 합법화 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한 예배 금지 탄압이되면 교회를 망하게 할 것이다’, ‘좌파로 인해 나라가 공산화되고 망할 것이다’등등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도 알 수 없는 도시괴담 수준의 이야기들이 지금도 사회 곳곳을 멍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근거 없는 우려와 거짓으로 부풀어지면서 카톡과 문자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시끄러운 세상, 종말을 겁박의 수단으로 삼는 무서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모든 소란들은 모두 두려움의 광기에 삼키워진 연약한 이들로부터 비롯한 것일 뿐입니다. 그들의 외침속에서 구원하시는 생명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만 듣다보면 이제는 하나님도, 하나님이 하실 일도 순식간에 흔적없이 증발되고 만 것 같습니다. ‘대체 우리에게 언제 믿음이 있었는가?’라는 자괴감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내지 않으면 다 망할 것이라는 이런 섣부른 선동들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내지 못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자기 구원의 강박관념이 공동체안에서 강화되고 확장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빛으로 어둠을 물리치고, 구원의 빛으로 두려움을 몰아내야하는 신앙인들이, 교회가,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앞다투어 이런 공포를 세상으로 확장시켜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소망만 붙들수 있다면 죽음이라도 관통하며 나아가는 ‘십자가’의 사람들, 예수 부활의 ‘복음’을 들고 어둠에 항거하던 늠름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이제 빛 바랜 이름으로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도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롬 8장 22절) 라고 말했습니다. 예, 그의 말처럼 어디를 둘러봐도 고통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이런 겁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롬 1:17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사로잡혀 있었고,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세상을 향해 소망과 기쁨의 큰 함성을 외쳤던 것입니다. 말 뿐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살아내게 하는 ‘복음’을 믿었던 겁니다. 만약 바울이 다시 돌아온다면 오늘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를 향해 대체 어떤 ‘복음’을 믿고 있는 것인가? 호통을 칠 것만 같습니다.
2
3독서 복음서 마태복음 13장에는 밭에 관한 주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나누었던 네개의 밭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이야기에 덧붙인 말씀입니다. 주인이 애써 좋은씨를 밭에 뿌리고 난 후에, 어느날 원수가 슬그머니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결실 할때 보니, 곡식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가라지가 쑥쑥 자라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종들이 주인에게 달려가 가라지를 뽑아버릴까 여쭈었는데, 의외로 주인은 덤덤하게 놔두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곡식까지 다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씀에는 분명한 기한이 못박혀 있습니다. ‘추수 때까지’ 입니다. 주인의 말대로 추수할 때가 되면 곡식은 곳간에 들여지고 가라지는 뽑혀 불태워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쓸모 없는 것들은 다 뽑아 버려야한다’는 우리네 생각과 너무 다른 주인의 명령이 영 달갑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라지는 뽑아 버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원수의 행위가 괘씸하기만 하고, 괜시리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이 농사의 결과나 결실을 거두고 곡식들을 능히 지켜낼 수 있는 주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곡식에게 손해가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우리의 관심은 지금 가라지를 어찌할 것인지에만 온통 쏠려 있지만, 반대로 주인은 가라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곡식이 잘 자라는지, 다치지는 않을런지만 관심사일 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속에서 만나는 주인의 이 넉넉한 품 때문에 한 없는 위로를 경험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곡식 중에는 분명히 가라지만도 못하게 된 것도 있을텐데 기다려주는 마음이 고맙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는 추수때 뽑아내 버려야하는 무익한 ‘가라지’일지 모른다는 부끄러움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주인의 말이 고마운 이유입니다. 그저 가라지일 수 밖에 없는 나를, 귀한 곡식처럼 추수때까지 용납해주고 계시는 주인의 넉넉한 품에 감사하는 것만이 우리 몫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감이 나고보면, 옆에 자라고 있는 것이 가라지인지 아닌지가 눈에 들어올 여유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아직은 힘들고 어렵지만 더 익어야 하고, 더 영글어야만 합니다.
3
따지고보면 그만 두고 보지 못하고, 함께 자라고 있는 가라지를 불편해하고 ‘뽑아내 버려야한다’는 이 불편한 마음은 ‘그것만 하면 살 것 같다’는 탐욕과 ‘그것을 못하면 망한다’는 강박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내일이면 자신의 인생이 깨어지거나 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생기는 것들입니다. 죽음이 초래하는 공포입니다. 이 공포에 사로잡히는 순간부터 삶은 그렇게 ‘불행’으로 내몰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말은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힘들고 지쳐도 애써 돈을 버는 이유도, 불만족스럽고 불행해도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내는 이유가 여기에서 떨어지게 되면 내일은 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염려, 근심만 가득한 삶이 행복할리가 없습니다. ‘두려움의 영’은 ‘스스로를 구원해 내라’는 시대정신을 강요함으로서 우리에게서 돌봄과 평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빼앗아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여기 배에 힘을 주고 외치는 바울 사도의 힘찬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15절 다음에 14절을 순서를 바꾸어서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4절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으로 인해 이제 자신은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외침입니다. 실감이 나시나요?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그 뜻입니다. 15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는 문장에서 ‘부르짖느니라’는 부분에서 바울은 헬라어 ‘크라제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큰 소리로 환호를 지른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것은 종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종에게 있어서 주인은 아무리 친절해도 자신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녀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집니다. 자녀는 오히려 아버지의 책임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애쓰고 수고함으로 스스로를 구원해 내야만 하는 강박과 두려움에 내몰렸었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제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책임져주신다는 절대적 위로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환호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아마도 어떤 분은 바울이 얼마나 기쁨으로 충만한지 공감이 되시는 분도 있을테고, 반대로 크게 실감이 나지 않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 스스로 닥쳐올 내일을 책임지며 살아가야만 한다는 두려움에 내몰리면서도 ‘내가 아무리 애쓰고 수고해도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처절한 무력함을 경험해보신 분이라면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게 되었다는 말씀이 담고 있는, 이제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주신다’는 약속이 얼마나 큰 기쁨과 위로가 되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양자의 영이 자신의 걸음을 인도하시니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내일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설령 죽음이 찾아온다 해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사실만 붙들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게 됩니다.
4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놀라운 약속을 능력으로 누리며 살수 있을까요? 양자의 영이 인도하시는 삶,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시나요?
1독서 구약 창세기 28장이 힌트가 될 것 같습니다. 형 ‘에서’를 기만하고 우여곡절 끝에 장자권은 얻었지만 기대와 달리 야곱은 ‘밧단아람’에 사는 삼촌 라반을 찾아 야반도주를 하고 있습니다. 분노한 형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하루 아침에 도망자 신세로 내몰리게 된 야곱의 운명은 참담했습니다. 평생을 부모님 곁에서 살던 그였으니 이제는 생면부지의 삼촌에게 자신의 운명을 의탁해야한다는 것이 실감이 날리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어떤 인생을 살게 될른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누구도 자신을 감싸주고 보호해줄 수 없습니다. 그저 어떻게 해서든 제 힘으로 생존해야만 하는 현실에 떨어지고 만겁니다. 모든 것이 불안했던 그에게 내일은 두려움 자체입니다. 그러던 그가 ‘벧엘’ 광야 즈음에 이르러 피곤했는지 잠을 청하게 되었고, 그때 이상한 꿈을 꾸게 됩니다. 하늘에 맞닿아 있는 사다리로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꿈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땅을 그에게 주고, 그로 하여금 이 땅에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며 함께 해주시겠다는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자신의 조부 아브라함이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떠나기전 주셨던 약속과 같은 내용입니다. 의지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들, 그런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이들을 지키시고, 그 인생을 책임지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다 잃어버리고 다 깨어진 것 같아서 두려웠던 벧엘에서, 오히려 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주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는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 창세기 28:16
성도들이 제일 많이 오해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목사나 성직자들은 다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분명한 착각입니다. 목사에게도 두려움이나 걱정은 찾아옵니다. 어쩌다가 일년에 한번 쯤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이 주어지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찾아오는 일들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고통 받는 세상이, 성도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 뿐만 아니라 장기화되어가는 현실속에서 성도들이 얼마나 힘들게 지내고 있을지도 걱정입니다. 이렇게 이타적인 걱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재로 하반기는 어떻게 지내야하는지, 교회 재정이나 형편도 문제 거리가 됩니다. 제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니 떨쳐내지 못하면 생각의 끝은 여지없이 내일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으로 곧장 이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목사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런 일에 사로잡히는 시간이 비교적 짧다는 것 뿐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단순한 일상을 살고 있고, 또 가급적 그렇게 살아내려고 노력합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으로 삶을 구분하고, 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는대로 주님의 편에 맡기는 믿음으로 반응하려고 합니다. ‘그것 아니면 않된다’고 의지하지 않으니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자유해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주시는 분임을 믿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삶 가운데 불쑥 불쑥 가라지가 도드라져보일 때에도, 추수할 때까지 내 영혼을 붙들고 계시는 주님을 믿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단순하고 고독한 시간들입니다. 주님만 남기 때문입니다.
5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는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언제나 야곱과 함께 하셨습니다. 단지 믿고 의지했던 모든 것을 잃고나서야 비로서 야곱이 하나님을 발견한 것 뿐입니다. 손에 붙들고 있는 것이 있는 한, 하나님은 보이질 않는 법입니다. 현대 도시 야경을 얻은 대가로 은하수를 가로지르는 별똥별을 잃어버리고,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늦은 밤 적막 속에서 소리없이 봉오리를 틔우는 꽃의 개화를 들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일단 하나님을 경험하는 순간이면 ‘없으면 죽을 것 같던 것’들도 다 상대화되고 덧 없어집니다. 내 마음을 사로잡던 모든 것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영적인 고독’입니다. 죽게 되었다 싶으면 평소에 그렇게 중요하던 것들이 다 무가치해지는 것이나, 반대로 정말 좋은 것에 빠져들면 다른 모든 것들이 시시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외의 것들을 향한 ‘고독’의 경험입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강력한 은혜를 향한 갈망만 남아 있을 때, 그 고독 가운데서만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갈 6:14
그러니 무서워하는 종의 영의 그림자가 삶 가운데 엄습해 올라치면, 그런 것들을 의지하며 살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이 온 것이라 믿으시면 됩니다. 두려움과 염려, 걱정과 같은 소란함이 마음을 어지럽힐 때, 오히려 하나님만 계신 고독한 땅 벧엘을 찾아야 합니다. 뒤를 돌아보며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게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 다 무너져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과 ‘너의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주님의 신실한 약속으로 인해 기뻐하십시오.
이제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인생의 길을 빛으로 밝히시는 주님으로 인한 감격에 압도될 것입니다. 그 기쁨이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주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 아버지’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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