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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08/ 02 성령강림후 9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7. 29. 18:41
성서일과
1독서 창세기 32:22 ~ 31 / 이사야 55:1 ~ 5
응송 시편 145:8 ~ 89, 14~21
2독서 로마서 9:1 ~ 5
3독서 마태복음 14:13 ~ 21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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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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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저는 사람들
1
구약 성경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패망한 이후 성경에 능통했던 서기관 그룹에 의해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문화’라는 것이 먹고 살만할 때 번성하는 법인데, 민족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과할 때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고, 성경을 왕성하게 기록했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묵직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고대시대에는 나라간의 전쟁이라는 것은 곧장 그들이 믿고 있는 신들의 대리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이긴 나라의 신은 진짜 신이 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현실은, 결국 그들이 믿고 있던 하나님이 바벨론의 ‘마드룩’보다 무능하고 열등한 신이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믿음이 패배했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바벨론은 포로들에 대해 굉장히 유화적이었기에, 포로라고는 해도 일정한 주거의 자유도 있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남부럽지 않게 살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이방신 마드룩이 그들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희미해져 갈수록, 포로로 끌려온 바벨론에서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의 문제가 삶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믿음생활을 하다가 세상에 이리 저리 채이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으로 떨어지고마는 안타까운 모습처럼 말입니다. 바로 그때!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의 역사속에 새롭게 발견되고 기록되기 시작했고, 예언자들의 외침이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식민지 삶에 길들어지고 익숙해져가던 그들의 정체성을 일깨워내고, 패망한 이스라엘을 역사안으로 다시금 불러내었던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의 이름은 창세기에 기록된 ‘야곱’의 이름에서 유래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 (하나님과 다투어 이긴자) 로 불리우게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조상인 ‘야곱’에게서 스스로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담아내었다는 사실을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성서안의 수 많은 인물들 중에 하필이면 ‘야곱’을 자신들의 신앙 정체성으로 삼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유래되는 말씀을 좀 살펴봐야할 것 같습니다.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쳤던 야곱은 세월이 흐른뒤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돌베게를 베고 잠을 자야할 만큼 황망하게 도망쳐나올 수 밖에 없던 그였는데, 네명의 아내와 자녀들과 많은 재물까지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감 넘쳐보이던 그의 걸음이 고향집을 지척에 둔 ‘얍복강’ 앞에서 갑작스레 멈추어졌습니다. 남부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그였지만, 고향집이 가까워질 수록 그의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재물과 아내들과 자녀들까지 모두 먼저 강을 건너가게 했는데, 정작 ‘야곱’ 자신은 강가에 남아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정도면 살만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던 두려움의 그림자가 다시금 그를 삼키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이 밤이 새기전에 그를 삼켜버린 두려움이 다시금 처자식을 팽개치고 도망치는 자로 내몰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32장) 24절에 보니 그런 심각한 상황에서 뜬금 없이 야곱이 어떤 낯선 사람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낯선 사람과 씨름이라니 이게 무슨 일일까요? 또 그 사람은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난걸까요? 우리 나라에도 도깨비와 씨름하는 이야기들이 내려오는 것처럼, 인생의 절체절명의 위기였던 그 밤에 야곱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여하튼 그 씨름은 날이 샐때까지 계속되었지만, 야곱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그 사내는 갑작스레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어긋나게 만들었습니다. 비겁한 반칙입니다. 씨름이라는 것이 제 다리에 힘을 주고 서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야곱 입장에서는 이길 수 없는 승부입니다. 하지만 그대로 포기할 수 없는 야곱입니다. 자신을 축복해주어야만 놓아주겠다며, 낯선이를 붙들고 있던 손을 악착같이 움켜쥡니다. 얼마나 간절했고, 얼마나 치열했으면 그랬을까요? 그 몸부림이 안쓰럽지만, 역시나 야곱입니다.
3
이미 부족한 것은 없어 보일 만큼 일가를 이룬 야곱입니다. 형 ‘에서’에게 먼저 보냈던 예물만 봐도 그가 얼마나 큰 재력가가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내도 있고, 자녀들도 많습니다. 모두 고대시대에 부유함과 성공한 인생의 상징과도 같은 것들인데, 야곱은 이미 이런 것들을 다 성취한 겁니다. 어쩌면 그가 형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때도, 또 삼촌 라반의 집에서 악다구니처럼 삼촌을 속여가며 재물을 얻어낸 것도 사실은 이런 삶을 이루기 위했던 것들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것을 다 떠나 보낸채, 사력을 다해서 ‘복’을 구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야곱에게 하나도 ‘복’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체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 버린 고통을 꾹꾹 참으면서까지,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구했던 ‘복’은 무엇이었을까요?
‘복’의 우리말 사전적인 뜻이 ‘생활에서 누리게 되는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 그리고‘어떤 대상으로 하여 만족과 기쁨이 많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그가 제 손으로 일구어낸 그 모든 것들이 이 순간 만큼은 그의 삶에 전혀 기쁨이나 만족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재물도,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도 그의 심연을 침범해온 고통에서 그를 건져줄 수 없습니다. 강 저편에 있다는 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모두 지나온 시절, 없을 때는 그렇게 간절했던 것들인데 막상 가지고 난 이후 아무런 만족도 기쁨도 줄 수 없으니, 그것들은 진짜 ‘복’이 아닙니다. 야곱은 지금 홀로 남겨진 이곳에서도 두려움과 불안이 아닌, 만족과 기쁨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그런 ‘복’이 필요한 겁니다. 그것만이 ‘구원’을 경험하게 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복’을 구하는 야곱에게 ‘축복’부터 해주지 않고, 대뜸 그의 이름을 물어봅니다. 그리곤 또 뜬금없이 그의 이름을 이제부터는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라 말해주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낯선 그 사람이 야곱에게 주었던 ‘복’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인 셈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고, 이것이 이 민족의 정체성과 이름이 됩니다. 이런 것이 무슨 ‘복’인지, 너무 허무하게 여겨지시나요?
4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도대체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다’는 것이 가능한가? 이고, 두번째는 이름을 바꾼다는 것이 무슨 ‘복’이 되느냐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답을 찾으셨습니까?
우선 사람이 하나님을 이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둘째쳐도, 전능하신 창조주를 피조물이 겨루어 이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않되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져주시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은 져주셔야할 의무나 책임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져주시지 않는 것이 더 당연해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꺼이 야곱에게 져주심으로 우리에게 져주시는 하나님이 되신 겁니다. 하나님이 씨름에서 져주셨다는 말은, 제 힘으로 살아내어 보려고 악다구니를 쓰며 몸부림치는 속이는 사람 야곱에게, 스스로가 복이 되어주시기로 결정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제한’이고, ‘사랑’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생존과 복을 위해 아버지와 형, 삼촌, 사람들과 다퉈왔습니다. 자기 자신과 다투었고, 제게 주어진 거칠은 인생과도 끊임없이 다투어왔습니다. 어디를 가도 만족이 없고, 머무는 곳마다 늘 갈등과 불안, 두려움에 휩쌓인 채 살아왔고, 뒤쳐지고 빼앗기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평생을 시달린 삶이 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 된 겁니다. 하나님이 기꺼이 져주시기로 결단한 단 한사람이 된겁니다.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이 져주셨으니 이제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툴 필요가 없고, 속이거나 상처입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그를 문제와 대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시는 손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이것이 단순히 신앙적인 의미 이상의 ‘복’이 될 수 있을까요?
히브리어로 ‘복’이라는 단어 ‘바라크’(ברך)의 뜻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다’, ‘찬양하다’, ‘복을 빌다’ 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나님께 무릎꿇을 수 있다는 것, 또한 그렇게 꿇는 무릎 앞에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인생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복’인 겁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복이라는 말은 바로 ‘나에게 져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믿는 겁니다.
브니엘에서의 하나님 경험 이후에도 야곱의 상황이나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바뀐 것은 오직 그의 이름뿐입니다. 하지만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기고 싸우고 채워야하는 삶을 투쟁하듯 살아온 그의 실존이, 이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며, 그 사실에 기대면서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야곱의 ‘하나님 경험’이 가져다 준 인생의 변화로서의 ‘복’입니다. 예언자들이나 서기관들이 말씀을 통해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고 뒹구며 함께 할 때만 ‘이스라엘’일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 ‘이스라엘’일 수 있다는 사실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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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영적인 경험을 한 이후, 야곱은 아무말 없이 강을 건너 형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루 전만해도 죽을 것처럼 무서워 몸서리치던 길이었는데, 벌써 저멀리에서 몰려오고 있는 형 에서와 사백명의 장정들의 모습이 보이는데도 전혀 두려움이없습니다. 이제야 그를 짓누르던 두려움과 공포, 제 손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어내야한다는 그 쫓기는 삶에서 구원을 얻게 된 겁니다.
지금 그의 행색은 말이 아닙니다. 옷은 밤새 씨름하며 뒹굴어 헤어지고, 허벅다리는 어긋나서 절고 있습니다. 안스럽고 불쌍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얼굴에는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가득 맺혀있었을 겁니다. 인생의 답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평생을 다리를 절며 살아야만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겨루었던 흔적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디론가 제 뜻대로 가려고 할 때 마다 그의 걸음은 절뚝거릴 수 밖에 없으니, 앞으로 열려질 생의 길은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야만 합니다. ‘다리를 절고 있는 야곱’을 생각해 보니 괜시리 짠합니다. 마치 힘이 빠진 우리네 아버지 뒷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슈퍼맨처럼 보였던 아버지였지만 어느새 자식들의 도움에 기대야하는 힘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은 우리들 모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온전한 것 같지만 부족하고, 괜찮은 것 같지만 비틀거리고, 채워진 것 같지만 허무하며, 멀쩡해 보이지만 아프기만 한, 그리고 결국은 ‘죽음’앞에 놓여 있는 인생의 길을 절뚝거리며 걷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다리를 절며 걸어야 했던 그 야곱이야 말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면 됩니다. 저는 걸음을 온전해 보이려고 힘을 주지 않아도 괜찮고, 더이상 애써 채우고, 얻고, 이루려고 몸부림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비록 비틀거려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결코 뒤쳐지거나 넘어지지 않을 겁니다.
6
이쯤에서 이제는 야곱이 아닌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얼마나 크신지요? 야곱처럼 온 밤을 지새우며 포기할 수 없어, 온 맘과 삶을 다해 붙잡아야하는 하나님경험이 있으신지요? 다시말해, 하나님께 내 삶을 모두 맡기고 의지하며 살고 있느냐?는 겁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신앙인은 ‘나는 하나님께 삶을 맡기었다’고 쉽게 생각할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길입니다. 자칫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 평생 발을 절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안락함이나 성공을 보장하는 바벨론에서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포기해야만 하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재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좋지만,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하는 절뚝거리는 걸음을 싫어합니다. 여전히 제발로 걸어가는 이들의 삶을 동경하고, 그런 이들의 모습을 보면 똑바로 걸어보려고 힘을 주고, 그들의 뒤를 쫓으려고 애를 씁니다. 믿음을 가지면 가질 수록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는 것에 의존하고 집중해야하는데, 오히려 예수를 믿으니 다른 사람보다 더 부유해야하고, 더 출세해야하고, 더 잘살아야 한다는 허망한 걸음만 좇습니다. 그래서 ‘종교적 열심’을 위안이나 구실로 삼은 채, 정작 ‘하나님 경험’을 체념하고 포기하고 그렇게 잊어버린 채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말은 있고, 능력은 없는 종교로 전락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 성취로 이어지는 율법주의가 아닌, 저는 발을 이끌고 하나님의 은혜에 삶을 맡기는 여정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외에 삶의 구원하는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남을 속이고 남의 발 뒤꿈치나 붙잡고 살아야 했던 야비하고 얍삭한 야곱이, 처절한 고통의 밤에 찾아오신 하나님으로 인해, 이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살아가는 이가 되지 않았습니까? 예언자와 서기관들이 말하고 싶고 외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고, 포로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로 이 사실에 자신들의 공동체적 운명을 걸었던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이 되었고, 그들의 운명을 지켜냈습니다. 어둠의 밤, 인생의 절망에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진짜 ‘복’입니다. 그러니 지금 살아가는 길위에서 발을 절고 있는 제 모습에 부끄러워하거나, 불행해하지 마십시오. 외로워하거나 두려워하지도 마십시오. 절뚝거리며 걷는 우리를 재촉하지 않고 같은 모습으로 함께 걸어내 주시는 주님이 계시고, 주님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께 ‘이스라엘’로 받아들여졌으니, 그것만으로도 족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제발로는 걸을 수 없는 발을 저는 야곱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위로를 들으십시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 이사야 55:1 _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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