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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07/ 26 성령강림후 8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7. 22. 16:08
성서일과
- 창세기 29:15~28 혹은 열왕기상 3:5~12
- 시편 105:1~11, 45b 혹은 시편 119:129~136
- 로마서 8:26~39
- 마태복음 13:31~33, 44~52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Xy5zSwJxqCOIfWDWKJakg1PqVwCwQFNU/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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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안에 ‘이미’ 와있는 ‘나라’
1
예수님의 삶과 그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이 기독교 신앙이며, 또한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전부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으로,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장소로 이해할 것인지,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해석과 견해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 나라의 핵심이 ‘하나님’, ‘하나님의 통치’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리고 주님을 따른 그리스도인들은 왜? 하나같이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으며 살았던 걸까요?
오늘 세상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해 가고 있지만, 그에 반해 삶의 질은 상대적으로 피폐해져가고 있습니다. 개인의 행복이나 공의나 정의같은 가치는 땅에 떨어져버렸고, 환경오염은 인류의 내일을 염려해야만 하는 시점에 와있습니다. 저마다 옳다고는 하는데, 어느 것 하나 이전 시대보다 더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운 것은, ‘유토피아’라는 것은 이 땅에 없다는 사실 뿐입니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 본 분이라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것에 소망을 건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을 뛰게 하는 말인지 공감이 되실 겁니다. 우리의 방식이나 방법으로 인간 구원과 해방은 불가능합니다. 인간 구원의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2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가르쳐주고 계실까요? 오늘 3독서 본문이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천국 비유의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모두 직접적인 설명이 아닌, ‘비유’로 이루어진 말씀들입니다. 아쉽지만 천국은 이렇게 밖에는 설명해주실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어떤 수준보다 더 좋은 나라가 아니라, 이전에 한번도 그리고 누구도 경험해 본적이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치 어떤 것과 같다’라고 하는 비유의 방식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겁니다.
본문속에는 5가지의 비유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밭에 심기워진 겨자씨 한 알', '여인이 가루 서말 속에 넣어 부풀게 된 누룩', '밭에 감추어진 보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 그리고 '바다에 물고기를 모는 그물'이 그것입니다.
비유라는 한계 때문인지 언뜻 이해가 될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하기만 합니다. 과연 이 비유 속에 담겨진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3 -1
예수님이 비유로 설명해 주신 하나님 나라에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번째, 하나님의 나라는 감추어진 나라가 아닌, 폭로되어지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폭로’ 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가 ‘알려지지 않았거나 감춰져 있던 사실을 드러냄’입니다. 감추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 ‘폭로’의 핵심입니다. ‘진리’라는 헬라어 단어인 ‘알레테이아’가 바로 ‘폭로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진리의 핵심은 감추어짐이 아닌 드러나는 것에 있습니다. 꼭꼭 감추어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은 진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알 수도 없고, 경험하지도 못하는 것은 ‘없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겨자씨는 크기도 가장 작은 씨인 데다가, 밭에 심기워져있으니 뿌린 사람 말고는 겉모습을 보고는 아무도 알아 차릴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죽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싹이 돋아나게 될 겁니다.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가루 부대에 섞여진 누룩은 어떨까요? 가루속에 들어가있는 동안에는 가루와 누룩은 구분이 되질 않습니다. 누룩을 넣어둔 여인 말고는 아무도 부대 속에 누룩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곧 알게 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누룩이 부어졌다면 반드시 가루를 부풀게 해서 부대 전체를 채우게 될테니 말입니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평범한 밭일 뿐이고, 별볼일 없는 돌맹이 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에게는 보화나 진주는 폭로되어 있는 겁니다. 물고기를 모는 그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물의 줄눈보다 크기가 모자란 것들에게는 그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그물 눈보다 큰 것에게만 그물은 존재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무관심한 이들이나 이 세상보다 가치 없이 여기는 이들에게는 철저하게 숨겨져 없는 나라이지만, 반대로 그런 나라에만 희망이 있는 사람이나 세미한 눈으로 발견하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이미 폭로되고 실재하는 나라가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이들에게만 폭로되어지는 나라입니다.
3-2
두번째,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하여 있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우리는 낯설어 합니다. ‘천국’이라고 하면, 죽음 이후에 언젠가는 가게 되고 경험하게 될 나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이해가 여기에 그친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삶속에서 한번도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거나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 신앙이 지향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천국’을 맛보셨습니까? 어디에서, 그리고 어떤 나라로 경험하셨습니까?
그러고보니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사용하신 단어들은 모두 당시의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과 천국이 비슷하다는 것은, 그런 일상의 것들안에서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이미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제 우리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씨알 하나 심고, 가루반죽을 부풀리고, 밭을 일구고, 진주를 찾고, 그물을 내어던지는 일상의 삶속에도 우리를 구원할 하나님의 나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통치하는 방식이 깃들여있다는 말씀입니다. 주어진 일상을 허투루 살아서는 않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다보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엿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깃들여져있으니, 그 나라는 결국 소소한 것들을 가볍게 보지 않는 시선, 하나님의 일하심을 유념하고 바라보는 시선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또한 감사한 것은 온 맘으로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언제든지 기꺼이 폭로되어지고 발견되어지는 나라이니, 지불할 대가나 업적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누구라도, 발견하고자 하는 간절함, 하나님의 통치야 말로 소망이라는 마음만 있다면 그 나라는 기꺼이 그에게 열려집니다. 참 멋진 나라입니다.
하지만 실재로 세상은 그런식으로 발견되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대가가 존재해야만 마음이 편합니다. 대가를 요한다는 것은 그것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별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만 얄팍한 찰라와도 같은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의 마음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물, 공기, 생명처럼 정말 가치있고 귀한 것은 다 거져 주어진 것들인데도,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값’을 요구합니다. 세상 이치가 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너무나 무지합니다. 그닥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다고 여기고, 오히려 없으면 않되는 것은 싸구려처럼 함부로 대합니다. 그러니 하루 세끼의 식사 앞에서 드리는 기도가 상투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어쩌면 내가 값을 치루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4
1독서 구약 본문으로 추가로 주어진 것은, 열왕기상 3장의 12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소원을 하나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백성의 송사를 의롭게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고 그런 마음을 기뻐하시면서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까지도 덤으로(?) 복으로 주신 사건이 내용입니다. 지혜를 구한 그가 대견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지혜보다는 부귀와 영광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렇게 물으신다면 여러분도 ‘지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분명 부귀나 영화, 아니면 그런 것들을 얻어 낼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똑똑한 척은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어찌할 수 없는 우리네 한계이며 실존입니다. 꼭 필요하다고 그것 없으면 않될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고나면 오히려 발목을 잡을 때가 있고, 사람 좋다고 여겼는데 실은 악당인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 유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어느새 낭패를 경험하고 허망한 걸음으로 터벅거리며 우리는 걸어갈 뿐입니다.
성경은 솔로몬의 이야기를 통해 지혜와 부귀와 명예까지 얻었으니 그야말로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라거나, 그를 복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서기자는 그의 인생의 결말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에 마음을 빼앗겨 덧없고 덧없는 생의 허무 가운데 내몰리고 말았고, 더욱이 그로부터 이스라엘은 찢기고 패망의 길을 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그의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형편 없었는지를 가감없이 들추어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인간상으로 솔로몬을 소개할 뿐입니다. 부귀나 명예가 많이 쌓이고 주어지는 것이 ‘복’이 아니라는 분명한 메시지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참된 ‘복’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만이 우리의 복이 됩니다. 그것만이 답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너무나 상투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있습니다.
5
또 다른 1독서 창세기 29장 본문을 보면, 무언가 이전에 우리가 알던 모습과 달라진 야곱을 만나게 됩니다. 형을 피해 밧단아람에 사는 삼촌 라반의 집까지 겨우 겨우 도망온 그는 삼촌의 집에서 유숙하게 됩니다. 라반에게는 딸이 둘이 있었는데 첫째는 레아이고, 둘째는 라헬입니다. 야곱이 첫눈에 반했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라헬의 용모가 레아보다는 훨씬 아리따웠는가 봅니다. 라헬을 아내로 달라는 그의 요구에 삼촌 라반은 자기 밑에서 칠년을 일해주는 대가로 라헬을 주겠다고 합니다. 야곱은 성실히 약속을 지켰지만 라반은 야곱을 속이고 잔칫날 라헬이 아닌, 첫째 딸 레아를 야곱의 침실로 보내었고 이를 모르던 야곱은 레아와 하루밤을 보내게 됩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던 야곱인데, 그만 삼촌에게 속고 만 겁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다시 칠년을 더 일해주고 난 후에야 라헬을 아내로 맞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라헬을 위해 일해 줄 때마다 ‘칠 년을 하루 같이 여겼다’라고 말합니다. 두번이니까 무려 14년을 하루처럼 여겼다는 말입니다. 삼촌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났으니 하루를 더 견디는 것이 마치 일년처럼 느껴졌을 법도 한데, 하루처럼 여겨졌다고 합니다. 속고, 채이고, 넘어쳐도 또 다시 삶을 기대감과 기쁨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시간입니다. 태생적으로 유익이 되는 것만을 택하고, 그럴 수 있다면 속이는데 익숙한 그를, 우직하게 기다림안에 살게 해준 것은 모두 라헬을 향한 ‘사랑’때문입니다.
솔로몬에게 복을 주시던 하나님 께서 말미에 복을 복으로 누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유일한 전제 조건’ 하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솔로몬의 삶이 불행으로 치닿게 된 이유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 왕상 3:14
솔로몬은 부귀나 명예가 없어 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다윗이 행함’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던 겁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다윗이 행하였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 뿐이었습니다.
6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것의 수준에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또한 안다고 해도 불행하지만 그렇게 하나님만을 사랑할 능력이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다윗이 행하였던 것,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그의 길로 행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사랑했기에, 다윗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사랑인 겁니다. 그에게만 온 맘을 쏟으며, 그를 위해, 또 그를 향해 살아갑니다. 그를 믿으니 또한 그가 나와 함께 하시니 칠년을 하루같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칠년이 하루처럼’이라는 말은 이미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는 있지만 아직도 ‘하나님만으로’는 부족하게 여깁니다. 삶의 대부분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기고, 그러니 칠년이 하루가 아니라, 되려 하루가 칠년인 것처럼 힘들고 답답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허구여서도 아니고, 은혜가 없기 때문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삶의 기쁨을 모르기 때문이고, 이것은 그 나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라지 않고,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 못하는 연약함에 낙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구원의 가능성을 지탱하는 모든 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레아를 보십시오. 그녀는 껍데기 뿐인 남편 야곱과 살아야만 했던 안타깝고 비참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을 잃었던 야곱을 택하셨던 것처럼, 남편의 사랑을 잃은 그녀를 하나님이 택하시고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를 낳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얻게 된 겁니다. 헐벗은 우리를, 복없는 삶에 내몰린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 롬 8:32
바울은 이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삶에 찾아 오셨다는 말씀을 믿었고, 주님때문에 천국을 누리며 살수 있었던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깨어진 삶으로 내몰려 있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해주시는 주님이 계시고, 무엇이 중요한지 알 수 없는 암담한 현실앞에 내 던져진 우리를 위해 연약함을 도우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주억거리지 마시고, 오히려 더욱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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