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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7 성령강림후 17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9. 23. 13:17
성서일과
1독서 | 출애굽기 17:1 ~ 7 혹은 에스겔 18:1 ~ 4, 25 ~ 32
응송 | 시편 78:1 ~ 4, 12 ~ 16 혹은 시편 25:1 ~ 9
2독서 | 빌립보서 2:1 ~ 13
3독서 | 마태복음 21:23 ~ 32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Tl77-QR8H3VCJw38eeRivdz7KTRr2BX3/view?usp=sharing = '클릭' 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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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향한 방향전환, '순종'
1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아마도 믿음이 흔들릴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이 두쪽이 나도 변치 않을 것만 같던 믿음이 어느 순간 물을 가득 채워둔 독에 밑둥이 터져버린 것처럼 흔적조차 보이지 않을 때 성도의 마음은 비참해집니다. 문제는 이런 경험이 너무 자주 우리를 찾아오고,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구원으로 믿으며 살아가고는 있지만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이고, 도리어 엄습해 오는 삶의 무게가 더 없이 무겁게만 느껴질 때 우리는 다시금 믿음 없음의 밑바닥에서 신음하고 맙니다.
염려는 쉬이 사라지지 않고 마음은 불안에 사로잡혀 있으며, 내일은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만나는 삶이 이어집니다. 이런 시간이 계속될 때 사람들은 애써 무관심하려고 하거나,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거나 넘어지기도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는가?’ 그리고 이런 발칙한 도발에도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결론을 끌어안고 무너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차마 믿음을 져버릴 수 없는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흔적을 발견해보려는 몸부림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치 일방적인 짝사랑처럼 아리고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무언가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가 주어지길 바라고 그런 현상에 쉽게 의존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믿기 위해 ‘표징’을 구하는 것이나 반대로 증거가 없으면 도무지 믿지 못하는 것을 모두 ‘불신앙’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양보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시험해본다는 것이, 상대가 온전하지 못하고 믿을 수 없어 혹시나 떠보려는 마음에서 비롯하는 것이고 보면, 애당초 믿을 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겁니다. 대단히 무례하고 모욕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심하고 시험합니다.
이런 일들이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던 이스라엘 진중에서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그들안에 다시금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매일이 위태롭고 불안한 걸음입니다. 신광야를 떠나 르비딤까지 도착했는데 광야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실망하고 분노하게 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본문은 분명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대로 이곳까지 이르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17장 1절) 하나님이 이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형통하고 탄탄한 대로를 생각하던 그들의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그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릅니다. 드러내놓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으니 비난할 대상이 필요했던 그들이 모세에게 몰려가 분노를 쏟아냅니다. 죽고 사는 생존이 걸린 문제이니 단순히 불평하는 수준이 아니었을겁니다. 성서기자는 2절에 ‘모세와 다투어’라는 대목에 돌을 던지고, 주먹으로 치는 ’폭행’까지 포함하는 ‘리브’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당시의 험악했을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호렙 산 반석을 침으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다는 이야기로 사건은 일단락이 되지만, 놀라운 방법으로 광야에서 물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불순종이 마음에 걸립니다.
2
오늘 우리야 성경을 통해 이 일을 점잖게 읽고 있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누구나 똑같을 겁니다. 광야의 척박한 삶에 내몰리면 누구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지, 과연 자신들을 돌보고 구원하고 계시는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고, 시험하고 싶어지기 마련입니다.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과연 이 길이 맞는 것일까?’ 회의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를 향한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하나님을 시험하고 다투었다’라고 정의함으로써 ‘맛사’, 와 ‘므리바’앞을 지나는 우리를 급하게 멈추어 세웁니다. 모세를 향한 원망과, 자신들이 옳게 나아가고 있는지 표징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다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 그들이 모세를 향해 쏟아 놓은 원망의 내용은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여기에서 우리를 죽게 만들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성서기자의 눈에 이런 원망이 가볍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투 속에서 그들의 속 마음이 드러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지금 그들은 누가 뭐라해도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지만 몸은 하나님을 따르고 있지만 그들의 얼굴은 하나님이 아닌, 애굽을 향하고 있습니다. ‘물’은 애굽을 의존하게 하는 매개체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애굽’에는 그 모든 것이 있다! 는 그들의 생각을 부추기고 사로잡히게 하는 것들일 뿐입니다. 배부름, 평안, 행복을 정의하는 모든 기준은 여전히 ‘애굽’이며, ‘애굽’만큼 되어야만 그들의 불평이 멈추어질 것 같습니다. 홍해를 건넌지가 벌써 오래인데 이처럼 애굽이 부럽기만 하다는 것이, 그들이 아직도 애굽의 신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평과 불만속에서 애굽과 비교당하고, 시험받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다르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과연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앞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구원으로 생각하는 ‘무엇’과 비교하거나 시험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물음,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해서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으로 죽음과 생명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인식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말을 대단히 피상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런 식으로는 생존의 문제 앞에서 불신앙으로 떨어지고 마는 우리 영혼을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보십시오. 돈이 많거나 성공을 이룬 사람이나,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나, 또 10년을 사는 이나, 타고난 운이 좋아 100년을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인간은 결국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실존적으로 경험하고 실감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만이 애굽의 떡을 부러워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거나 원망하지 않으며 살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 있으니 그렇습니다. 이런 삶의 전환을 성경은 ‘회개’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메타노이아’라고 하는 ‘회개’는 ‘후회’나 도덕적 윤리적 반성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물론 열심히 일을 하고, 각자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이루며 살기는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생명’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신뢰하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이고 믿어지면 삶의 내용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를 비교의 대상으로 내어주지 않고, 비굴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리어 주어진 것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만을 신뢰하며 사셨던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셨습니다. 부활은 죽음을 무효화시키는 ‘능력’과 ‘권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으로, 우리도 ‘부활’을 능력으로 경험하며 살 수 있는 걸까요? 모든 삶에 드리워진 모든 결핍과 두려움을 무효화시키는 환희와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광야에서 애굽에서 우리는 이 물음을 붙들고 씨름을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믿음은 외식으로 포장되어지고, 결국은 또 어떤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믿음없음으로 추락하고 말것이 뻔합니다.
3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유대사회의 내노라하는 유력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앞을 가로막아 섰습니다.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권위를 어디에서 얻었는지를 따져묻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답변으로 두가지 이야기를 전하시는데 첫번째는 ‘요한의 세례’와 관련된 것입니다. 백성들로부터 선지자로 불리우며 신망이 두터웠던 요한을 끌어들임으로 공격하는 그들을 궁지로 빠트렸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던 것이라고 하면 그럼에도 요한을 박해했던 자신들의 허물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요한을 지지하는 백성들의 반감을 살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아무말도 못하고 말테니, 누구의 권위를 논할 자격 자체가 없는 이들이 되고 마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두번째 비유의 이야기는 그들의 종교적 외식함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첫째는 ‘예’라고 답하고는 실재로는 가지 않았고, 둘째는 ‘싫습니다’라고 하고는 마음이 바뀌어 뉘우치고는 포도원에 갔는데, 이들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는 물음이 그 내용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니, 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인가?라는 물음인 셈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던 그들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집니다. 분을 참을 수가 없었던 그들이 45절 이후를 보니 예수를 잡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이야기속에서 맏아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인 자신들을 지칭합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같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외식하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더 참을 수 없던 것은 둘째 아들로 비유된 이들이 세상이 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더러운 세리와 창녀들이라는 점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겉으로 거룩하고 의로워보이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고, 오히려 죄인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세리와 창녀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폭로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세리와 창녀들이 더 ‘의롭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들인 장로들은 어떨까요? 그들의 종교적 열심은 칭찬받을 만합니다. 사실 요즘같은 시대에는 이런 종교적 신실함을 지닌 이들을 만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책망받은 이유는 한가지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행위에 만족하고 있었고, 그런 자신들의 종교성만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국’은 그런 것으로 얻거나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생명’은 그럴 듯해 보이거나, 능력이 있거나, 존경을 받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전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있는 겁니다. 죄인이었던 세리와 창녀들은 무엇을 더 할 것도, 내세울 것도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는 것 뿐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었기에 천국에 들어간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그리고 이미 그리스도를 믿음안에 우리에게 생명이 허락되어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에 마음을 쏟는 것 뿐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생명’을 얻은 것은 모든 것을 얻은 것이라는 기쁨과 감격을 잃어버리는 순간, 모든 것은 무의미로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4
출애굽기 본문 1절(17장)에서 성서기자가 물없는 광야의 낭패로 이끄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주목하게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 없는 곳에서야 물의 소중함을 알 수 있듯, 생명없는 곳에 이르러야만 우리는 ‘생명’의 가치와 기쁨, 자유가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 그렇습니다. 생명이 은총임을 깨닫는 그곳에서야 비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존하고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그런 광야에서가 아니라 ‘애굽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살아도 되지 않느냐’ 반문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먹을 것과 물이 풍부한 애굽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존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헛된 신화일 뿐입니다. 노예들에게 그런 것들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 없는 곳으로 인도하신 주님께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 애굽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의 홍해를 건너지 못했으니, 하나님을 믿을 수 없던 겁니다. 예수님 앞에 섰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로 자신들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입니다. 광야에서 필요한 믿음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따르는 ‘순종’밖에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광야를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몸만 따라오고 얼굴은 애굽으로 향하고 있는 이들은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따르며 광야길을 걷는 이들만이 만나와 메추라기가 아닌 그것들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반석에서 터져나와 있는 물이 아닌 반석을 터트리시는 주님의 손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이 등돌리고 깔보니 주님밖에는 소망이 없는 세리나 창녀들을 자신의 천국으로 먼저 초대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런 죄인들이 부끄러움 당하지 않도록 자신의 생명으로 옷입혀 주시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광야에서 우리를 목마르게 하시거나 주리도록 버려두실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제는 삶의 구원을 위해 주님의 은총을 구하며 사는 삶으로 방향을 돌리십시오. 그곳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주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_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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