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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8 성령강림후 20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10. 14. 12:04
성서일과
1 독서 | 출애굽기 33:12 ~ 23 / 이사야 45:1 ~ 7
응 송 | 시편 99 혹은 96:1 ~ 9 (10 ~ 13)
2 독서 | 데살로니가전서 1:1 ~ 10
3 독서 | 마태복음 22:15 ~ 22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VLvE9r6h02C0TqACWdsOjIBQ78V_XuPa/view?usp=sharing = '클릭' 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qfzputCuCM4 = '클릭' 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누구'의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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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평상시 사용하는 것과, 독서를 할 때 사용하는 것, 이렇게 두개의 안경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평상시에 쓰는 안경은 조금 더 먼 거리의 모습을 깨끗하게 보여주지만 책을 볼 때는 오히려 성가시고 글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돋보기로 바꿔 쓰면 책에 적힌 글이 그렇게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책을 덮고 다시 조금 멀리 보게 되는 순간 모든 것이 희뿌옇게만 보입니다. 분명 똑같은 세상인데, 어떤 안경을 쓰는지에 따라 전혀 달라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실감나게 경험하는 셈입니다. 그러고보면 상황에 따라, 또 사람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안경을 쓴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보는 것도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 다릅니다. 이것을 가치관 또는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도 우리 편에서 본다면 이런 세계관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가 우연히 작동하고 돌아가고 있다고 보지 않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믿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겠다는 선택이 신앙입니다.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믿음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실재 삶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온 땅의 주인이시라는 믿음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믿고 있는 것과 산다는 것이 불일치하는 이분법적인 신앙은 자칫 현실에 대한 무관심하고 내세적 신앙에 천착하게 되거나, 반대로 모든 현실을 극복하고 정복하고 싸워야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공격적인 삶으로 몰아갈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신앙과 삶을 경계지으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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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고발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모함하고 넘어지게 해야할 만큼 그들은 화가 나있습니다. 앞서 그들의 종교적 가식을 들춰내고, 결국 천국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했던 예수님의 비난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으니 그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었던 겁니다. 로마와 결탁하는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며 얼굴도 마주하지 않았던 헤롯당 사람들과도 기꺼이 손을 잡을 만큼 예수님을 향한 미움과 증오가 컸던가 봅니다.
예수님을 넘어트리기위해 파놓은 함정은 ‘세금’문제였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진 겁니다. 세금은 늘 예민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도 세금이 오르면 정부의 인기가 떨어집니다. 더욱이 당시 유대사회에 있어 세금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유대 성인이 부담해야하는 세금은 ‘성전세’와 ‘십일조’로 이루어진 ‘종교세’와 로마의 속국이 내야하는 ‘속주세’, 사람 수대로 부과되는 ‘인두세’, 그리고 기타 ‘소득세’등입니다. 학자에 따라 당시에 유대사회에서 이런 세금은 적게는 소득의 30%에서 많게는 50%까지 이르렀다고 보고 있으니, 가히 살인적인 수치입니다. 이중에서 로마에 직접 내야하는 인두세는 소득의 10%정도인데, 독특한 것은 반드시 로마의 은화인 데나리온으로만 납부할 수 있었다. 19절에 예수님께서 '세금 낼 돈을 가져와 보라' 말씀하시자, 그들이 내민 것이 ‘데나리온’이었다는 것은 대화에서 문제시 삼고 있는 ‘세금’이 로마의 속주국 백성이 내야하는 ‘인두세’ 납부라는 것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주 영악하고 뱀처럼 악독한 질문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마라’고 말씀하신다면 당장 헤롯당 사람들이나 로마군인들에 의해 반역으로 고발당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불가합니다. 그 순간 바리새인들은 보란 듯이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라고 비난할 것이고, 실망한 군중들은 돌을 던질테고, 열심당 같은 사람들에 의해 배신자라는 미명아래 암살을 당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말 그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궁지에 몰린 셈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본문은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그들이 모두 할 말을 잃고 떠나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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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답변의 첫번째 내용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의기양양하던 그들의 처지가 곤란해 졌습니다. 주님께 내밀었던 동전이 오히려 그들의 올무가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인두세로 납부하던 데나리온은 로마에 의해 주조된 은화입니다. 그 앞면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흉상이 그려져있으며 ‘티베리우스 케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장엄한 아들’ 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 황제에게 주어졌던 칭호인데, ‘가장 존엄한 자’ 즉 ‘살아있는 신’이라는 말이니, 결국 ‘티베리우스 황제는 살아있는 신의 아들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동전의 뒷면에는 평화의 화신으로 묘사된 황제의 어머니인 리비아의 좌상이 새겨져있고, 그 위에 ‘Pontifex Maximus’ 우리 말로 하면 ‘대제사장’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동전이 지금 바리새인의 수중에서 나왔다는 것이 문제인 겁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황제에게 ‘인두세’를 낼 생각이었다는 발 뺌할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자신들이 로마의 속국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입니다. 게다가 종교적으로도 이것은 치명적 스캔들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신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 십계명의 제 1 계명입니다. 그런데 황제를 신이라고 밝히고 있는 이교도의 가증한 동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경건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바리새인으로서는 배교행위와 같은 일입니다.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주려고 했던 셈이니, 결국 황제를 신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백하는 꼴입니다. 주변에 많은 이들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제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신 차릴 틈도 없이, 곧장 핵폭탄 같은 주님의 두번째 말씀이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여러분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실감나고 통쾌하게 들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그들은 지금 온통 ‘가이사’의 것에만 생각이 쏠려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지 아닌지 문제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것은 미쳐 생각도 못했던 차였는데 허를 찔리고 말았습니다.
그들도 사실 어찌할 수 없었을 겁니다. 로마의 속국이니 부끄럽고, 화가나고, 분하지만, ‘가이사가 주인인 세상이니, 어쩔 수 없다’라고,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참 익숙한 말입니다. 우리도 늘 그렇게 말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면서도 어느새 우리도 이런 세상을 기정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었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세상살이는 별개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저 신앙은 언젠가 죽음이 찾아온 다음의 문제일 뿐이라 여긴적도 있습니다. 대체 ‘하나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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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 가운데 어쩔 수 없다며 가이사를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아왔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는 말씀이 어느 순간부터는 ‘너는 누구의 것이냐?’라는 엄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데나리온을 건낸 이들에게 주님께서 물으셨지요.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 마 22:20
주님 말씀은 황제의 표시가 되어 있으니 데나리온은 황제의 것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니 뒤짚어보면 하나님께 드려야할 것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시가 담겨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이 표시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첫장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만물을 있게 하시는 존재의 근거가 되신다는 장엄하고 대담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모든 것 중에서 유독 ‘당신의 형상’을 새겨 ‘내것’이라고 정한 존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창 1:27
아닌 척은 해도 늘상 우리는 이쯤은 되야하고, 저렇게 빛나야하고, 세상에서 인정받고, 성공했다는 찬사를 받는 사람, 아름답고, 흠이 없고, 그렇게 거룩한 것들만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곳에 늘상 넘어지고, 깨지고, 터진 채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나를,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에 더 익숙한 믿음 없는 죄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나’를 향해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 자식 자랑에는 창피한 줄 모르시는 우리네 어머니같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제 아무리 찢긴 인생도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엉터리 같은 세상, 조롱하고, 경멸하던 이 땅도 굳센 손으로 붙들고 계시는 주님의 소망이 담겨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니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져야만 하고, 하나님께만 바쳐지면 되는 겁니다. 가이사의 흉상이 새겨진 동전을 손에 쥔채 ‘가이사의 것을 어찌할까’ 고민하는 것은, 가이사를 신으로 섬기는 이들이나 하는 겁니다.
‘황제의 것이라는 표시 때문에 황제에게 바칠 것을 염려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너희 자신은 대체 누구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냐?’
천둥같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가이사가 신으로 군림하던 그 때처럼, 오늘 우리 시대는 돈, 권력, 명예 등이 신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유대인들이 가이사를 신으로 받아들이며 살던 것처럼, 우리로 이 시대의 신의 위세를 어찌할 수 없다고 받아들이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내것으로 만들려고만 하면서, 오히려 삶은 하나님 아닌 것들을 주인으로 섬기며 사는 모습입니다. 우리네 인생과 삶이 이처럼 복잡하고 무질서해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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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안에서는 ‘가이사’ 마져도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것에서 예외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손에 들려있으니 세상은 아직 희망이 있으며, 인생은 기대를 가지고 떠날 수 있는 여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고쳐내시고, 회복하시고, 구원해 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니 우리에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권세란 없습니다. 흐린 날도 맑은 날도, 어둠이 드리워져 있어도 슬픔이 밀려오고 고난이 가시덤불 처럼 얽혀있어도, 아니면 반대로 빛이 가득하고 웃음이 터져나오고 행복에 잠겨있어도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그리고 또한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것을 책임지시고, 빚어가실 겁니다.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이 창조해내신 세계와 삶을 향한 감탄과 경이로움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굳게 믿어야만 합니다. 주님 때문에 삶을 긍정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야말로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복음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온갖 시련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사도바울의 넘치는 기쁨의 이유가 될 수 있었던 근거는 , 그들이 주님의 통치안에 있다는 믿음으로 신앙과 삶을 분리시키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 살전 1:3 ~ 4
그들은 황제가 신처럼 추앙받는 세상속에서 주어진 삶과 스스로를 택하신 '하나님의 것'이라 믿으며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으로 인내했다는 말이 그 뜻입니다. 그들은 가이사가 통치하는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통치안에서 살아냈으며, 그 힘의 원동력은 자신들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은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외면하지 않고,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빚어가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한, 삶은 저주일 수가 없습니다. 거짓신들이 말하는 속임에 속아서는 않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포기하시지 않는 한, 이 땅은 하늘로부터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구원의 땅이 될 것이며, 주님만을 구원으로 믿으며 사는 우리의 삶은 빛날 것입니다. 죄와 죽음의 힘이 아무리 드세보여도 그 또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어둠의 힘을 인정하고, 거짓된 신을 인정하지 마십시오. 가이사의 세계를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 말씀을 듣는 겁니다. '너는 내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전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소외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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