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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 성령강림후 14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9. 2. 11:53
성서일과
1독서 출애굽기 12:1 ~ 14 혹은 에스겔 33:7 ~ 11
응 송 시편 149
2독서 로마서 13:8 ~ 14
3독서 마태복음 18:15 ~ 20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wZFUJedqidT92yi4TjioErOrLefYFgfX/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Wvw7mm47ptI = '클릭'하시면 설교영성을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에 사로잡히다
- •#01
’사랑’은 기독교의 핵심가치이며, 실천적 신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도 결국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사랑’으로 존재하시고 일하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랑’하는 것을 새계명이라 말씀하신 것도 사실은 유대인들이 접하고 있던 구약의 내용과 전혀 다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의 계명들의 내용이나,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결국은 ‘사랑’이시다는 것을 정의해주신 것 뿐입니다.
우리는 늘상 입만 열면 ‘사랑’을 말하고, 노래하고는 있습니다. 실천은 논외로 해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 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아할 때가 참 많습니다. 이런 모습을 대변해주는 것이 요즘 코로나 정국속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는 한 교회의 이미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름이라는 것이 그 공동체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내 맘에 들지 않고, 내 뜻에 거슬리면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없고, 누구라도 용납할 수 없고, 내 편에 서지 않으면 기꺼이 증오하고 저주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 그런 모습속에서 도대체 어떤 사랑을 제일로 삼는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런 교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헌신과 봉사의 삶을 지향하며 제법 이웃들에게도 인정받는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실천적 삶 자체로서의 ‘사랑’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것들로 ‘구원’을 담아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02
우리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처음보는 사람이라도 기꺼이 손을 잡고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기도 합니다. 소외된 이웃을 섬기고, 봉사와 헌신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교회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온 정성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고 있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이며, 오히려 세상은 교회의 사랑을 의심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사랑’의 자리를 찾던 이들이 어느 순간 자신의 이익과 탐욕을 구하다가 그만 넘어지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 뿐 아닙니다. 기특하게도 올곧게 사랑의 자리를 지켜가고 있지만, 이것이 늘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로마서 13장 10절에서 바울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롬 13:10
바울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정의합니다. 너무 소극적인 것이 아닐까 싶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온통 악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속에서 이보다 더 적극적인 사랑의 정의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세상속에서 경험하는 이웃과의 관계는 늘 깨어져있습니다. 부러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이들도 있지만 실재로 선한 의지로 또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해도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아픔을 주는 경우도 허다하고, 죄인을 사랑하려고 했지만 더 큰 악이나 피해가 초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 앞에서 우리는 힘이 부칩니다. 이럴 때 우리의 사랑이라는 것이 도울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한계 너머에 있는 이들에게 차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열심히 섬기고, 진실되이 사랑하려고 애를 쓰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실망과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정죄감이 우리를 자꾸만 피로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며 사는 길 끝에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또 얼마나 사랑해야하는 것인지의 물음앞에서 당혹스럽기만한 우리이기에, 언제나 ‘사랑’ 을 직면할 때마다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 뿐입니다.
- •#03
그런 우리에게 바울은 사랑이야 말로 ‘율법의 완성’(10)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이 매우 실제적인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의로움’입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 혹은 용납받을 수 있는 자격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용납받기 위해 율법을 지켜내려 애를 쓰지만, 결국 율법은 그것은 오직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엄중하게 가르쳐줍니다. 무엇인가 제 손으로 해내야만 율법을 지켜냈다 생각하는 우리, 그런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우리에게, ‘사랑’이 율법을 완성한다는 말은 도무지 와닿지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고 난해합니다. 여전히 ‘사랑’은 이해하는 것도, 행하는 것도 모두 너무 어렵게 느껴집니다. 마태복음 18장17절 후반절에서 예수님은 범죄하고도 마지막까지 권면을 듣지 않는 형제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꼭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공동체 안에서 내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끝까지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도 어찌하실 수 없으신걸까요? 하지만 뒤이어 2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거나, 끝까지 용납해주라는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대하라’는 것이 결국은 너희는 끝까지 용서하고 하나님께 맡겨두라는 뜻임을 알게 됩니다. 주님 말씀대로라면 상대가 잘 못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지 끝까지 그를 용납해주라는 것이 ‘사랑’인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은 곧잘 부당하게 느껴지고 거북하고 부담스럽습니다. 다시금 말씀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정죄감’에 사로잡히기 맙니다. 그것이 우리입니다.
두번째 어려움은, 율법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은 누구보다 율법적 의를 얻고자 열심을 다해 살다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는 ‘복음’을 발견하고 평생을 한결같이 살아냈던 사람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외에 행위로 의로움을 얻고자 하는 모든 인간적 시도를 이단적이라 여겨왔던 그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랑하며 살라’는 그의 권면이 마치 다시금 ‘행위’로 돌아가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과연,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도 결국은 율법과 행위로 결론을 맺는 것일까요? 사랑하며 살자는 식의 말은, 성경외에도 곳곳에서 찾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말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랑은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약해 보인다는 것도 ‘사랑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입니다.율법주의, 업적주의에 길들여져있는 우리눈에, ‘사랑’은 실재로 무엇인가를 바꿀 힘이 없는 이들의 변명처럼, 그도 아니면 맘편하고 느긋한 모습으로만 보입니다. 사랑 안에 세상을 구원하고, 악을 무너트릴 능력이 담겨 있을까요?
- •#04
인간은 결코 ‘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정의입니다. 제 아무리 선해보이고, 또 그런 삶을 추구하며 살아도 어느 순간 내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분노와, 절망, 허위, 거짓, 미움과 증오, 얄팍한 이기적인 마음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와 달리 예수님은 일곱번씩 일흔번씩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고, 본인 스스로 그 말씀 그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는 순간까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끝까지 용납하시고 용서하신 겁니다.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사실 그 말씀을 듣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일곱번씩 일흔번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일곱번씩 일흔번을 용서받고도 또다시 넘어지고 마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용서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사랑은 전적인 주님의 능력이며, 우리를 향해 부어지는 하늘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라’거나 ‘용서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율법의 완성을 위해 사랑을 해내야한다는 압박감으로 받아들여지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말씀은 우리야 말로 하나님 품안에서, 하나님 사랑안에 있는 존재임을 천명하는 우주적 차원의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조금은 쉽게 이해가 되실 것 같습니다. 갓태어난 젖먹이 아이는 율법적인 기준과 눈으로 보면 아직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닙니다. 혼자 힘으로 걷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합니다. 제 힘으로 한 사람의 몫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사랑안에서 보면 아이는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귀한 생명입니다.
마지막으로 과연 ‘사랑’을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랑을 통해 구원이 경험되거나 세상이 바뀌고, 악의 문제가 사라질 수 있겠습니까? 사랑에 무능한 우리눈에는 여전히 ‘사랑’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것으로만 보입니다. 그런 식으로 바뀔 것은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힘으로, 재력으로, 집단의 위세로 해치워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황제의 세상에서 통용되는 제국의 통치방식일 뿐입니다.
이 말씀이 결론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한 하나님을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는 말씀으로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안에 계시고,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성육신에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온 삶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통치방식이 바로 ‘사랑’인 겁니다. 하나님은 이 언어안에서만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경험한 사람이라면, ‘사랑’의 방식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고, 그것외에 다른 어떠한 길도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안에만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것이 이와 유사합니다. 아이가 말이 느리고, 행동이 굼뜨고, 빠릿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세상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뒤쳐졌다고 말하고, 포기하고, 방치합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는 다릅니다. 아이가 ‘엄마’라고 말할 때까지,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남들 다하는 철자법이나 구구단을 뗄 때까지 기다려줍니다. ‘언제’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않되면 내가 데리고 살겠다고 말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아이는 온전히 성장할 수 있으며, 사랑안에서만 아들이고, 딸일 수 있습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살려내고, 지키는 유일하고, 가장 강력한 능력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가장 복된 소식은 하나님이 ‘율법’을 기준삼아 정죄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인간의 죄와 세상의 악을 사랑으로 통치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가로막을 수 있는 권세는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조건없이 용서하시는 사랑을 가로막고 죄인을 지옥을 끌고 갈 수 있는 힘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분이시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면, 홍해를 가르고 말과 기병을 무너트리시는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이 믿어질 수록, 결국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랑’의 통치가 세상을 이기고, 악을 무너트리며, 죄와 죽음에서 구원의 승리를 이끄는 능력이라는 사실에 비로서 환호하며 감탄하게 될 것입니다. 종말에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가 통쾌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숱한 무력과 폭력으로 세상을 휘져었던 제국의 역사가 먼지처럼 사라진 자리에, 여전히 하나님 사랑안에 걸어온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달려왔던 교회의 역사가 증언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 •#05
1독서는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마지막 여정속에서 경험했던 유월절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는 것으로 ‘죽음’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전승입니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애굽에 내려졌던 재앙의 마지막은 ‘죽음’이었습니다. 마실 물이 없어진 피로 변해버린 나일강부터 개구리와 이, 파리, 가축돌림병, 종기, 우박, 메뚜기, 흑암,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것들은 모두 어느 하나만 찾아와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의 대재앙들입니다. 특히나 고대시대에 이런 재앙은 한 나라와 문명을 송두리째 파괴하고도 남을 만큼의 폭력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재앙앞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 아무리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그런 재앙이 찾아오지 않기를, 찾아오더라도 별일 없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신이 있다고 믿었고, 그 신에게 복종하고 잘보여 재앙을 면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종교나 우상이라는 것이, 다 두려움안에서 그런식으로 생겨난 것들입니다. 조금만 하늘빛이 어둑해지고, 조금만 비가 쏟아져도 금새 두려움에 휩쌓이게 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게도 이런 재앙들은 예외 없이 위협적인 것들이었지만, 그들은 결코 이런 재해나 재앙앞에 주눅들거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피조물들일 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은 이 위협속에서도 자신들을 능히 건져내신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 수 많은 두려움과 절망과 또 그런 폭력의 신이 수두룩한 세상속에서, 세상 모두가 그 앞에 벌벌떨고 있는 그런 현실속에서 하나님 한분을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믿을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의 영적인 안목과 신앙이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는 그들의 믿음의 핵심에 있던 사건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유월절 절기를 지켜내면서 ‘하나님은 절망과 재앙에서 우리를 반드시 지켜주신다’는 공동체의 경험을 다시금 고백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통치 방식에 기대어 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마땅한 것이 됩니다.
유월절 어린양처럼,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그리하셨듯 모든 사랑은 피흘림, 즉 ‘희생’을 내용으로 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라는 말씀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부어주시는 은총과 능력에 휩쌓일 때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만 유효한 말씀일 수 있는 겁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듯, 주님 사랑안에 있는 사람만이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을 하라’가 아니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에 속하여 있음을 실감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는 곳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의 마지막을 이 권면으로 마쳤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롬 13:14
사랑할 수 없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 사랑없는 폭력의 세상에 갇혀 있는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사랑의 옷이 되어주셨으니, 믿음으로 그 옷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없는 육신의 일에서 지켜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 예수님이 덧붙이신 말씀의 마지막입니다. 둘 이상의 자리에는 늘 ‘관계’가 있습니다. 결국 살아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늘 관계 안에 있을 겁니다.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그렇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 그 모든 관계 안에서 육신의 일에 지배되지 않고, 사랑의 법에 지배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 사랑의 통치안에서 자유를 경험하고, 구원의 기쁨과 감격에 사로잡힐 수 있을까요? 마침내 너와 내가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음으로 세상이 변하여가고, 악이 심판받는 것을 볼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의 옷이 되어주신 주님이, 모든 불의함과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넉넉히 지켜내주시고, 우리는 할 수 없는 그것을 능히 이루시는 그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십시오. 그만이 사랑없는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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