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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 성령강림후 18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10. 1. 22:03
성서일과
- 1독서 | 출애굽기 20:1~4, 7~9, 12~20 혹은 이사야 5:1~7
- 응송 | 시편 19 혹은 시편 80:7~15
- 2독서 | 빌립보서 3:4b~14
- 3독서 | 마태복음 21:33~46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i6kQhw2bWmN3GtmGW4ZsnYvicCjAMn8L/view?usp=sharing = '클릭' 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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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주님' , 우리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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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좋은 포도원을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산을 따라 너른 울타리도 두르고, 포도즙을 짤 수 있는 틀도 만들고, 망대도 지어 제법 그럴 듯하게 포도원을 꾸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멀리 타국에 갈 일이 생겼고, 아무래도 직접 포도원을 돌볼 수가 없으니 세를 받고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포도가 주렁 주렁 익어갈 무렵이 되었지만 일이 마쳐지지 않아 아직은 돌아올 수 없던 주인은 수확한 열매를 거두려고 대신에 하인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쳐서 내쫓은 겁니다. 하인을 또 보내보았지만 그들은 더 거세고 험악하게 저항한 채 주인의 것을 내어 주려고 하질 않습니다. 곤란한 상황이 벌어진 셈입니다. 주인은 주인대로 내 것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아들 만큼은 함부로 대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포도원 주인이 아들을 보내는데, 아뿔싸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아들이 물려받게 될 유산 그러니까 포도원을 빼앗는 것에 눈이 멀은 그들이 결국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겁니다. 대체 이 포도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전하신 비유입니다. 실재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럴 듯한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인지 알아채야 하는데, 언뜻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보통 우리에게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 죽임당한 아들은 예수님이구나’, ‘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아들까지 보내셨는데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마셨구나’라는 관찰자적 해석이 익숙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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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지금 이 비유를 듣고 있는 이들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었다는 사실과, 하나님 나라를 그들은 빼앗기고 말 것이고, 열매맺는 백성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 이유입니다.
‘악한 자들은 빼앗기고, 새로운 농부들에게 주어질 것’이며, 빼앗기게 될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던 41절과 43절의 내용은 결국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주류였던 유대교이며, 하나님 나라를 받게 되는 새로운 농부들은 절대적 소수였던 교회 공동체라는 긴장으로 읽혀져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의 비유안에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신앙과 예수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기독교신앙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점이 보이시나요? 교회 공동체와 이들의 근본적인 신앙의 차이는 무엇을 ‘절대화’하고 있는가로 나뉩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을 절대화합니다. 성전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백성의 장로들, 바리새인들에게는 ‘율법’이 절대의 기준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 백성이라는 증거이며,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 단순함이 그들의 신앙을 열정적으로 만드는 이유였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이런 열정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절대화시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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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것들, 그러니까 ‘성전’이나, ‘율법’을 목숨처럼 지켰습니다. 요즘도 우리 주변에서 ‘목숨걸고 믿는다’거나, ‘목숨걸고 지키자’라는 이런 말을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절대화가 이루어지는 순간, 이 기준은 자신 뿐 아닌 모든 이들을 향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어긋나는 누구라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사실 그런식의 절대화는 주어진 상황을 지켜내고 잃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내일이 불안하고 두려워 자신이 없는 사람들일 수록 ‘오늘’ 을 지켜내는데 힘을 쏟게 되고, 극단주의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현상유지에 매달리다보면 경직될 수 밖에는 없고, 신앙의 내용과 의미는 간 곳 없는 애궃은 긴장감만 남게 됩니다.
‘절대화’는 주로 ‘정치 권력’과 ‘종교’에서 쉽게 드러나곤 합니다. 정치가 절대화되는 순간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파괴하는 독재권력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나마 정치는 저항이나 개혁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종교가 절대화되면 그 폐해는 훨씬 더 심각해집니다. 절대화의 근거가 ‘신’이기에, 반기를 들거나 저항하는 순간 곧장 신앙심이 없다고 정죄당하거나, 불순한 악의 세력으로 매도되고 말 뿐입니다. 성경은 신의 뜻이라는 명분 아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노예처럼 굴복시키는 모든 사특한 힘들을 ‘우상’으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이야말로 ‘하나님’을 절대적 권세로 여기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타당한 의문입니다. 실재로 성경안에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에 순종해야한다는 식의 내용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독재자처럼 권위를 주장하시는 분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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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독서 본문인 출애굽기 20장 말씀에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장 1절을 통해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광야에 이른지 삼개월 즈음 지난 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애굽의 손에서 벗어나는 일에 급급했지만 이제는 정말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한 본격적인 행진을 시작해야합니다. 모세는 모든 것을 내려두고 시내산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애굽의 노예는 아니라지만, 그들은 정착할 곳 없어 광야를 떠돌고 있는 영낙없는 떠돌이 집단,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이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안쓰러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인정받아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이 물음에 하나님이 주신 답변이 바로 모세가 받은 십계명이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 출 20:2
하나님은 모세에게 계명을 주시기 앞서 먼저 자신을 ‘너희를 구원해낸 여호와’로 소개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자가되려 찾아오셨고, 바로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계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관계성안에 존재하시고, 그 안에서만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심을 보게 됩니다. 십계명은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해석될 수 있고, 그 관계안에서 비로서 우리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십계명은 크게 1계명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마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4계명까지의 한 덩어리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5계명에서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마라’는 마지막 계명까지 한 덩어리로 구분이 됩니다. 첫번째 덩어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두번째 덩어리는 하나님 백성 상호간의 관계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그렇게 만나주시고, 또 이스라엘은 서로를 그렇게 대할 때만 하나님 백성일 수 있습니다. 각 계명은 ‘하라’와 ‘하지마라’는 명령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설득도, 타협도 아닌 하나님의 일방적인 명령입니다. 절대적 명령이니,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은 절대적으로 ‘아멘’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지키면 살고, 지키지 않으면 죽는 겁니다.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고압적입니다. 시대가 어느때인데 이런 무조건적인 신앙을 강요하느냐?고 따져 묻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그럼에도 십계명을 통해 우리가 만나게 되는 하나님은 반드시 절대적?이신 분이어야 합니다. 이런 말은 여간 마뜩지 않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를 해석하고 가치를 부여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것은 중요하게, 어떤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소홀히 다루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중요하게 여기는 실수를 반복하게 되니, 삶의 낭패감은 그 만큼 더 커져만 갑니다.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것들은 모두 공짜입니다. 돈이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식조차 하지 못하면서 살지만, 없어지고나면 지구 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멸종할 수 밖에 없는 물, 공기, 햇빛들은 지천에 널려있고 무한정이며 더욱이 모두 공짜입니다. 그런가 하면 없으면 생존에 불편을 초래하지만 그렇다고 죽고 못사는 것은 아닌 것들은 조금만 값을 지불하면 됩니다. 밥, 반찬 같은 부식이나 주식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없어도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는 것들은 엄청나게 비쌉니다. 명품, 보석, 골동품들이 그런 겁니다. 게다가 이런 것들은 아주 잠깐만 사용하고 아주 오랫동안 보관해두기만 합니다. ‘글쓰기의 공중부양’이라는 책에, 작가 이외수씨가 소개하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 보니 정말 중요한 것들을 이미 모두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렇습니다. 가치가 뒤죽박죽 전도되어 버리면 삶이 무질서해지고, 불편하게 됩니다. 반대로 가치를 대하는 태도가 정리되고나면 삶이 질서가 잡히고, 기쁘고 감사해 집니다. 이처럼 상대적인 것들을 상대적으로 보고, 절대적인 것은 절대적인 것으로 대할 수 있어야만 하는데, 삶이 그렇지 못합니다. 가치없는 것들, 없어도 무관한 것들을 절대적인 것처럼 여기며 그 앞에 주눅들고 굽신 거리며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절대적인 것으로 삼다보니 이리 저리 속절없이 끌려다니며 살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분의 절대적인 권세 앞에서 신 노릇을 하던 것들의 정체는 드러나고 맙니다. 삼킬듯이 삶을 사로잡던 모든 어둠들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임재의 빛안에서 힘을 잃고 사라지고 말 것들일 뿐입니다. 참된 구원의 절정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모든 것이 상대화되는 순간에 경험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모든 근심과 염려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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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하나님께만 속해있다는 사실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로는 여간 움직이질 않습니다. 우상들이 강요해온 자기 구원에 길들여진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상’들은 늘 우리에게 이렇게 해야만, 저렇게 해야만 한다고 강요해왔고, 우리는 또 그렇게 굴종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그런 방식으로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을 숱하게 들어왔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의 요청이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상대적인 우리의 행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절대적이신 하나님의 구원은 상대적인 어떤 것으로 여기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속에 예수님 앞에 섰던 대제사장이나 장로들, 바리새인들이 다 그런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구원이심을 절대적으로 믿어야하는데, 도리어 구원을 이루려는 자신들의 기대와 생각, 경험과 능력을 절대화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질 못했던 겁니다.
오직 성전과 성전 제사만을 구원으로 절대시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성전을 허물고 주님의 몸으로 다시 세우실 것이라 하셨지요. 율법과 계명을 절대시하던 바리새인들에게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적어도 예수님께는 하나님외에 어떤 것도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오늘 서신서(빌립보서) 3장 초반부에는 자신이 얼마나 할례와 율법의 의를 충만하게 이루었는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고 있는 바울을 마주하게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안에서 구원받는다고 힘주어 말하던 평소의 바울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7절 후반절에서 8절 상반절 말씀까지 읽어보면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바울은 누구보다 율법에 의한 자기의를 절대시했던 사람입니다. 율법에 반한다면,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는 일이라도 마땅히 여겼던 그도 예수앞에서는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어떤 ‘절대’의 이름도 허락하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삶의 터를 잃고 하나님외에 다른 소망이 없는 이들의 든든한 반석이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또한 주님은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모퉁잇돌이 되어 하나님 외에 절대로 바뀔 수 없고, 절대로 포기할 수 없고, 절대로 않된다고 말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남김없이 깨트려버리실 것입니다.
참된 생명이요 구원이신 예수를 만난 이후에 바울은 자신의 아집과 열심들이 오히려 생명을 얻음을 방해하는 배설물과 같은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광장처럼 넓어보이던 어릴적 학교 운동장이 이제는 아이들 놀이터처럼 보이게 되는 것처럼, 예수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고 난 사람이라면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했던 절대의 가치라는 것들도 속절없이 모두 상대화되고 마는 것들임을 알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하지 마시고, 구원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일에 목숨을 거시면 됩니다. 스멀 스멀 하나님의 은총을 대신하려고 하는 자신을 치는 일에 목숨을 거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받은 사람들은 그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입니다. 절대적이신 하나님께만 ‘아멘’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이며, 하나님 나라의 열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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