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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3 성령강림후 15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0. 9. 9. 15:39

    성서일과

           1독서 출애굽기 14:19 ~ 31 혹은 창세기 50:15 ~ 21

           응송 시편 114 혹은 출애굽기 15:1b~11, 20 ~ 21 혹은 시편 103:1 ~ 7 (8~13)

           2독서 로마서 14:1 ~ 12

           3독서 마태복음 18:21 ~ 35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qrPNwA6UUxmsfLLMsGiw1KpBASBxCsZr/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W-ZusRsHsN4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경외'하며, 믿었더라

     

    1. 하나님의 구원
      1
      독서 본문인 출애굽a 14장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바로의 추격을 피해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스팩타클하고 웅장한 장면이 영화로도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본문을 읽을 때마다 바다가 갈라지고 벽처럼 있던 영화의 특수효과의 잔상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게 되는 오늘 본문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두고 신학은 다양한 의견으로 나뉩니다. 기적사건을 문자적으로 것인지, 아니면 은유적인 이야기로 읽을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문자적으로 읽는 분들은 이것을 있는 그대로 읽는 것이야 말로 믿음인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믿는다고 해도 상식과 보편이 마음을 힘들게 하고, 그럴리가 없다고 하면서도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지팡이를 바다를 향해 들고 있는 모세의 모습이 대단해 보이고 놀라운 사건이 자꾸만 마음에 남는 것은, 어쩌면 홍해가 갈라지는 것처럼 인생과 삶에도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일들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간절함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기자는 과연 출애굽 사건속에서 무엇을 보았고,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요? 오늘도 우리는 본문속에서 낯설은 기적에 시선을 빼앗겨버리고 말았지만, 성서기자는 지도자인 모세의 활약이나 기적 사건 자체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14 말씀의 마지막 결론은 성서기자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에만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 14:31

      가지 재앙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풀어줄 밖에 없던 바로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스라엘의 뒤를 쫓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이 결코 이길 없는 낙망할 밖에 없는 힘과 권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넜고, 애굽은 오히려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의 핵심에하나님께서 애굽과 싸우셨다 사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로서는 어찌할 없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애굽이 이스라엘의 뒤까지 바짝 쫓아왔지만, 하나님의 구름 기둥이 그들을 가로막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애굽과 싸우시기로 결정하셨으니, 그들이 자랑하던 병거와 마병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2. 경외하고 믿었더라
      따지고보면 홍해 앞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서기자는 그저 그들이 승리를 얻고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바닷길을 걸어갈 있었던 이유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었기 때문이라고만 전합니다. ‘경외하다라고 씌여진 히브리어야래두려워하다’, ‘경배하다 뜻입니다. 경외함에 기저에 있는 감정은 두려움인데, 공포영화를 보거나 귀신과 맞닥트려졌을 때의 무서움과는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무엇인가 너무나 크고, 압도적인 앞에서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려 굳어진 상태와 같다고 해야할까요. 산이라고 하면 동네 뒷산만 보던 사람이, 백두대간에 오르게 되었을 경험하는 감정과 비슷합니다. 그에게 사람들이 아무리 다른 이야기를 해도 귀에 들어올리가 없습니다.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설명할 없는 압도적인 존재와 경험앞에 서게 되면 이전의 경험과 지식안에 있던 모든 것이 작아보입니다. 그때 가지게 되는두려움 감각이 경외심과 유사합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뵈었던 이사야의 고백도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 6:5

      이런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절대적인 의존성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때는 몰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한 이후로는 다른 어떤 것도 능력이나, 구원이 없는 법입니다. 크고 안전한 유람선을 타본 사람이 작은 돛단배를 선택해 바다에 뛰어들리가 없고, 시한부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치료제가 아닌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올리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즐거움이나, 혹은 힘들고 어찌할 바를 몰라 고통 조차도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듯, 상대화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께만 매달리고 집중하게 되는, ‘절대적 의존성이것이야말로 지금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가장 확실한 삶의 증거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생명사건이나 구원의 경험이 바로 주님을 향한 절대의존성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3. 구원 경험
      14
      2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진을 치라 명령하셨던 곳은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바알스본 맞은 바닷가였습니다. ‘비하히롯 뜻은하토르에게 가는 이며, ‘바알스본바알이 내려다보는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굽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싶었는데 뒤로 돌아가면 다시 애굽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곳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바알에게 엎드려야 하는 곳입니다. 사이 홍해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 셈입니다. 애굽의 핫토르를 섬길 것인지, 북쪽의 바알을 섬길 것인지를 강요받는 상황입니다. 다시금 애굽의 노예의 삶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힘과 권세 앞에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갈 것인지 말입니다. 자본의 힘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속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우리네 모습과 같습니다. 이것 없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만큼 해내지 못하면 실패하고 뒤쳐질 밖에 없다는 불안감 앞에서 우리의 믿음은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능성이 끝나고 마는 막다른 , 홍해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목격하게 된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집니다. 이제는 비하히롯과 바알스본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면 홍해 바다가 자신만을 위해 열려진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삶속에서 행복을 일구어내고 넉넉한 삶을 살아가는 가는 이들이라면, 핫토르나 바알이 약속하는풍요 부러워하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구차함에 떨어지지 않고 생명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행복 됩니다. 절대적인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러니 홍해앞에 있는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하나님뿐입니다. 여전히 오늘 삶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비하히롯이나 바알스본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홍해를 건너지 못한 것일지 모릅니다.

    4. 용서하고 사랑하는
      바울은 로마에 써보낸 그의 편지에서 로마 교우들에게 특별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 14:1

      교회안에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3절을 보니 상대방을 비난하고 비판하며, 더해서 업신여기는 일도 있었던 같습니다. 참담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당혹스러운 것은 이들 모두가주님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말만 그렇게 것이 아니라, 실재로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바울이 얼마나 난감했을까요? 오늘도 교회를 떠난 분들의 대부분이주님을 위하여라고 말하는 이런 열정적인? 분들에 의해 상처를 받은 경우들입니다. ‘주님을 위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책망하는 순간,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자가 되고 맙니다. 이런 열정은 목사도 어찌할 없는 노릇입니다. 바울은 문제를 그리스도와 결부시킵니다. 교회안에 이런 분쟁이 일어나는 ,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믿음이 연소한지, 무엇을 먹는지 또는 먹지 않는지와 같은 문제에 신경을 쓰고 비난을 하고, 갈등이 생기는 것은 스스로가 그리스도께 절대적으로 기대고 의존하고 있지 않은 탓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구원이심을 경험하고 나면, 지금 내가 그리스도께 붙들려 있는지 아닌지 보다 중요하거나 마음을 여지가 없습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외모나, 모습에 신경을 쓸리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교회는 다른 사람이나, 타종교를 어찌해야하는지에 시쳇말로 오지랖을 부릴 때가 많습니다. ‘복음 전해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지금 내가복음안에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께 잇대어있는지 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그리스도의 복음 분명하고 그것을 누리고 있다면, ‘복음 능력이 삶을 터트리고 흘러 나오게 겁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하심이라’ | 14:8b ~ 9



    5. 일만 달란트의
      3
      독서 복음서는 악한 종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주인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사납게 목을 잡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데나리온이 성인의 하루치 품삯이라고 하니 데나리온은 백일치 일당 정도가 됩니다. 이에 반해 달란트는 6 데나리온 정도가 되니까 일용 노동자가 푼도 않쓰고 16 정도 모아야 되는 양인데, 그것에 만배니까 이건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탕감될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자신은 이런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음에도 자신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주지 않으니 배은망덕하고 악한 종이라는 겁니다. 악한 종에게 주어진 주인의 선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
      |
      14:35

      그런데 어딘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나오는 대목과 같은 내용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6:12

      구원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라는 것이 마치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의미처럼 들리고, 한편으로는 선행조차 자신의 유익을 위함이라는 속내가 얄팍해 보여서 불편하게 들립니다. 문제는 비유의 악한 종의 모습에서 보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는 결코 용서할 없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말씀은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용서하는 요구합니다.
      사실 본문의 진짜 핵심은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자신에게 지고 있는 빚이 얼마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빚이 데나리온이었다고 해도 그는 자신에게 빚진 이를 용서해주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에게 유익함이 없이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없는 것이 우리에게 다른 사람이 내게 지고 있는 빚은 데나리온도 일만 달란트처럼 여겨질테니 말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관심은 악한 종이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았다는 것 있는 것이 아닐까요? 먼저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주고 오면, 자신이 지고 있는 일만 달란트도 탕감해줄 것이라고 했다면 악한 종이 기꺼이 그리했을 겁니다. 갚을 없는 빚을 조건 없이 모두 탕감받았다는 것이, 없는 것을 하게 해주고 다른 모든 문제를 상대화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앞서 주어진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말씀도 동일합니다. 조건없는 은혜, 무조건적인 용서,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은총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니, 슬그머니 보따리 생각이 나는 겁니다.

    6. 용서받은 사람
      본문에서 사용된용서하다’, ‘탕감해주다라는 헬라어 단어가 재미있습니다. ‘아피에미라는 단어인데, ‘보내다’, ‘버려두다’, ‘풀어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라는 것이 결국은 보내주고, 풀어주는 우리 스스로의선택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놓아주고, 누구를 놓아주라는 것일까요? 사실 용서를 선택함으로 놓아주게 되는 것은 내게 빚진 사람, 내게 잘못한 사람이 아닌, 용서하는 당사자 본인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미움이나 증오를 담고 있다는 것은, 그것에 묶여 있는 겁니다. 벗어나지 못하고 사로잡혀 있으니 정작 본인이 가장 힘든 사람일 밖에는 없습니다. ‘용서 해결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사로잡고, 묶고 있던 것들을 그저 풀어주는 겁니다. 사람이나 억울함은 모두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 집중하고, 그가 베푸시는 은혜에 휩쌓여 경외감이 생기게 되면, 우리가 붙들고 있는 손을 놓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편지 내내 다른 이들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 업신여기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고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은 홍해를 길로 삼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만 온전히 잇대어 사는 삶의 길이 얼마나 능력으로 이어지는 지를 보여주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비록 십자가 죽음이 그의 걸음을 가로막았지만, 하나님과 일치된 삶을 걸어가셨던 주님을 하나님은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그리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는 일에 맘을 쏟으며 사십시오.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께서 주님을 일으켜 세우셨듯이, 어둠의 시대 가운데서 우리의 삶을 능히 건져올려주실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8: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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