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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5 성령강림후 21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10. 22. 11:37
성서일과
1독서 | 신명기 34:1 ~ 12 혹은 레위기. 19:1 ~ 2, 15 ~ 18
응 송 | 시편 90:1 ~ 6, 13 ~ 17
2독서 | 데살로니가전서 2:1~ 8
3독서 | 마태복음 22:34 ~ 46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KCGdfJsiUXpxpSfTPJDI2OU1PB75-CDs/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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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1
오늘의 복음서의 말씀은 두가지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과,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첫번째 것은 율법학자가 주님께 했던 것이고, 두번째 것은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하신 질문입니다. 바로 직전에 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였다가 망신만 당하고 돌아갔다는 소식에 이제 바리새인들이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습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 말씀에 뛰어난지를 드러내려는 마음도 있겠지만, 주님을 망신주고 무너트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를 주님앞에 세웠습니다. 앞서 주님께 망신을 당했던 터라 각오를 단단히 한 것 같습니다. 율법학자는 바리새인중에서도 율법에 능통한 사람이니, 오늘날로 치면 지금 주님은 저명한 신학교수의 도전을 받고 계신 셈입니다.
늘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아닌지를 구분하고 나누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던 바리새인들이고, 더욱이 그들중에서도 권위자인 율법학자가 지금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몰라서 질문했을리가 없습니다. 주님을 떠보려는 뻔한 질문입니다. 그 속셈을 간파하신 주님의 반격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입니다.
질문 자체만 따지고 본다면 그들의 질문에 그릇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 말씀에 이런 질문과 갈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대견하게 봐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기자는 분명 예수님과 빚대어 그들을 우호적이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뒤이은 23장을 읽어보면 주님이 그들을 비난하시는 말씀을 통해 그들의 허물을 폭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 마 23:3
‘행함’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그들은 늘 말은 번드르한데 실천이 없는 사람들이 맞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다른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운다’는 말씀때문에, 아무리 보아도 지금 주님이 지적하고 계신 핵심은 행함이 없는 것이 문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일만 행하는 것이 문제라고 읽어야 타당해 보입니다.
2
바리새인들이 천착했던 것은 구별하고, 분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248개의 율법과 365개의 금지규정으로 구분하고 분석해 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잘 알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마치 오늘 우리가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성경을 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모양새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중에 중요한 것이 따로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까요?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 안에 어떤 말씀이 들어 있는가 보다는, 그것이 누구의 말씀인가에 달려 있으니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이 들려진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인 것처럼,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와 현현의 표상입니다. 여전히 말씀을 들을 때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므로 비로서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계명과 율법,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의 통치속으로 초대하신 하나님과 천국의 질서에 참여하게 된 우리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이 사실을 간과한 채, 말씀하시는 분과의 관계가 아닌 말씀 자체만 귀하게 여기고 집중하다 보면 겉모습이 아무리 대단하고 거룩해 보여도 결국은 마음 한켠에 도사리고 있던 사특한 함정에 빠지고 말게 됩니다. 그런 것만 마음에 담다보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일순간 가치 없는 것이 되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사이에 놓인 차이만 크게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사람이란 본래 더 많이 가지면 우쭐대고 덜 가지면 열등감을 견디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것을 견디지 못한 인간은 에덴에서 금단의 열매에 손을 대고 말았던 겁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자신들은 듣는 존재로서의 관계를 보증하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의 차이를 뛰어넘고 ‘하나님처럼’되려고 했던 것이 그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과의 차이를 뛰어넘어보겠다던 이 뿌리 깊은 죄의 기원은 ‘자기 구원’, ‘업적주의’ 로 드러납니다. 부모가 보살펴주는 사랑과 은혜가 거북하다고, 어린 아이가 제 스스로 독립해서 살아보겠다고 한다면 그것을 기특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자신의 부모를 무시하는 것일 뿐더러, 그렇게 할 수록 스스로를 삶만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처럼 율법주의로 표현되는 자기 구원의 영역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요원하고, 우리 삶은 피폐해져갈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생명을 위해 필요한 본질적인 것들은 모두 은혜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은혜는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에덴의 교훈은 선악과를 따먹은 발칙함의 고발이 아니라, 주어진 일상, 그 소소한 것들을 감사하지 않은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업쑤이’_ 않계신 것처럼) 스스로가 ‘하나님처럼’되려는 타락한 본성에 기인한 것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3
‘저들은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이들이라는 주님의 질책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미 내심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신들만의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르기 때문에 질문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자기가 생각하는 말씀을 기준삼고, ‘나 만큼 하라’고 채근하거나 ‘나 만큼 못한다’고 비난하면서 타인들에게 정죄감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질문은 그 사실을 꼬집기 위한 것입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안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나, 하나님 말씀의 권위안에 자신을 감추는 것이 아닌, ‘그 속에 품고 있는 네 생각, 네가 가지고 있는 가치는 무엇이냐?’는 속내가 담겨 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그 말씀의 다른 편에는 ‘말씀을 구분하고 나누는 네가 그 말씀속에 담겨있는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알고 있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는 알고 있는 것이냐?’는 그들의 기만적 신앙을 들춰내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남들앞에서 말씀의 권위를 드러내던 자신들이지만 스스로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좀 나은 사람이라고 자위할 수 있는 비교의 대상이 없는 곳에서는 부메랑처럼 돌아온 무거운 짐에 짓눌리고 맙니다. 제 스스로 쌓아올리는 것들이 무너지는 허무를 반복하면서도 그럴 듯하게 감추며 살았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용납의 기쁨은 실감해 본 적도 없고, 다른 이들도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이들입니다. 번드르한 겉모습에 제 자신도 속고, 다른 이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지켜내기 위해 그렇게 포장해야만 하는 위선적 신앙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교회의 위세와 학식, 경험, 능력, 주변의 평판에 매몰되어 있는 오늘 우리의 목회, 우리 신앙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느닷없는 질문에 자신의 민낯이 들여다보게 된 순간,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자신의 허물이 몽땅 드러나게 되었던 에덴의 치욕처럼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나고 말았으니 더 이상 주님앞에 서 있을 재간이 없었을 겁니다. 본문의 마지막 절은 주님 앞에서 황급히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 마 22:46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세상을 즐기면서 사는 것을 미덕으로 가르치는 세상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원해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으로 죽음으로 덮여진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자기 구원으로 내몰리는 삶의 끝이 결국은 허무로 이어지고 만다는 엄중한 사실을 피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1독서인 신명기 34장은 그 사실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불세출의 지도자 모세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사명을 완수한 지도자의 말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처연한 마지막입니다. 민족적인 영웅이었던 그였음에도 하나님에 의해 가나안 입성이 거절됩니다. 게다가 광야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하는 그는 변변한 무덤조차 없으며, 묻힌 곳을 아는 자도 아무도 없습니다. 가나안은 그런 업적이나 명성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역할을 끝이 났고, 그를 다시 주목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성경의 선언입니다. 말씀은 인간의 한계를 미화하지도 않고, 인간의 업적에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주목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누구라도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4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구원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양보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더이상 구원을 이루기위해 수고하고 강요받고 내몰리지 않아도 됩니다. 이 사실을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는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 행 4:12
이제 예수님이 계시니 다른 구원을 찾는 수고함에서, 다른 구원을 찾아야 한다는 강요로부터 자유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어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2독서 서신서 말씀안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은총에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의 삶이 어떤 영광 가운데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의탁받은 자로서, ‘간사함, 부정, 속임수,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고, 또한 탐심의 탈을 쓰지 않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말만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모습입니다.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라도 존경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것이 도대체 가능한 일일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바울이니까 그럴 수 있다 싶지만, 좀처럼 우리에게도 이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그럴 듯 해보이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결국 상황이나 정도의 차이일 뿐 한 순간 심연 깊은 곳에 감추었던 것들이 고 스란히 드러나고 말테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도 이런 삶을 이루며 살아낼 자신이 없습니다. 제 인격과 그릇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자신감은 이런 교양있고, 세련된 모습을 이룬 ‘스스로’를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진술의 핵심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4절 상반절인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고 복음을 의탁받았다’ 표현에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천착하는, 그리고 다른 가르침이나 종교와 다른 지점입니다. 부자든 아니든, 잘났든 아니든, 결국은 맛이 있든 없든 밥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은총을 실감하게 되면 하나님만 주목하며 살게 되고, 그것이 우리를 모든 구속에서 자유한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는 겁니다.
5
생명은 그에 관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닌 받아 누릴 때만 가치가 있는 것처럼, 은혜를 경험하며 산다는 것은 감나무에서 떨어질 열매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언젠가’라는 말에 유보해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논쟁하거나, 따지고 구분하는 것에 그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 우리의 허무를 구원하실 그 은혜에 눈을 고정시키고, 귀를 기울이며 온 맘을 다해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주목하며 사는 것, 그의 부르심안으로 뛰어 들어 살아가야만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믿음 없음의 자리에서 하나님만 붙잡을 때 알게 되고,
소망은 절망의 터럭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눈을 감지 않을 때 드러나며,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원수 앞에 설 때, 비로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내가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실감할 때만 존재할 수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원리, 믿음의 방식은 너무나 간명하고 확실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작은 돌부리에 채이고, 넘어져 불평하고 마는 우리를 찾아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십시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던 주님의 음성에 정직하게 반응하십시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 그 마음과 생각, 그리고 가치를 두고 있던 것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이제는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주목하며 사십시오. 세상이 말하는 자기구원의 무거운 짐을 벗어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에 걸음을 맞추며 사는 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런 이의 삶에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고, 믿음의 결실이 맺혀지는 법입니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그 깊음 만큼 하나님 말씀을 더 가까이 하고, 묵상하십시오. 다 이해할 수 없어도 괜찮습니다. 말씀이 내 손에 들려있는 한 나는 그분의 자녀이며, 주님의 넉넉한 손이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깨닫게 하시는 이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며 살아가십시오. 이 시간 우리 삶과 영혼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까이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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