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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24 주일설교
    성서의 거울 앞에 2016. 7. 24. 21:48

    성령강림후 10주


    본문 - 마태복음 16:13 ~ 20         https://youtu.be/yWHgVXpGLpo   ( * 클릭하시면 설교 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




    '신앙 고백'의 바로 그 자리



    1 

    시 한수로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 귀  천 >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볏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아득거리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속에서 이렇게 의연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게 되면 무언가 잘못되어 버린것만 같은 오늘의 살아감에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하나의 정답, 하나의 출구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치열한 인생길에서 잠시 멈추어야하는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한 티비 예능프로에 출연한 80세가 되어서야 이화여자대학교를 50년만에 졸업하신 노 선배의 충고는 ‘두려워하지 말고, 생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원하는 것은 그때가 아니라도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것인데, 너무 바둥거리며, 자신을 슬픔과 좌절로 몰아세우며 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생에 대한 식견들을 가질 수 있을까요 ? 모두가 급한 마음 가지고, 불안한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시대에 말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 모두는 이런 생각을 한번쯤은 가져보았고, 그것이 또한 옳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살아낸 사람의 말 만이 그 가치와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살아냄의 발자취 안에서만 발견되어지는 소박하지만 진실함과 정직함이 가지는 힘입니다


    2

    그런데 이런 삶과 인생에 대한 식견은 젊은 시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생이 요구하는 길위에서 멈춤의 시간을 가져보지 못한다면 그 년소함이나 박식함의 정도와 관계 없이 누구라도 내몰리 듯 살아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생에 대한 여유가 생기게 되는 때에야 비로서 자기 자신이의 존재도 또한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젊어서 바라보던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과 나이가 지긋이 들고 늙어서 바라보는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은 많이 다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삶을 돌아보면 그때서야 비로서 하나님이 내 곁에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격동의 세월 한복판에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그 삶의 순간 순간 다가오는 무게 앞에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도움이시라고 고백해낸다는 것은 그닥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고백은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내 삶에 베어 있는 정직한 신앙 고백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바로 지금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 하나님이신 주님이, 전능하시고, 어디에나 계시며, 여러분을 목숨처럼 사랑하시는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발견하고 고백할 수 있다면 내 불안이 지금도 불안일 수 있고, 내 슬픔이 지금도 슬픔일 수 있겠습니까 ?


    교회가 매 주일 예배의 모임에서마다 신앙고백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 우리가 이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알려드리려고 ? 아닙니다 우리가 가르쳐 드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생각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신앙고백을 하는 바로 그 순간, 그 고백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우리 삶 가운데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고백은 문제가 해결되고, 살만한 때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야만 하는,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야만 하는 그 깊은 절망의 상황에서 드리는 제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만 같은 고통이 현실로 보이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고통의 문제를 뛰어넘어 계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3

    창세기를 읽으면 온갖 모진 고생을 하던 요셉이 결국 그가 꾸었던 꿈대로 애굽의 총리가 되고, 야곱의 가족과 많은 생명을 살려내는 장엄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끝맺음 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약속하셨던 그의 후손을 바다의 모래알처럼, 하늘의 별처럼 충만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애굽땅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때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생의 문제가 사라지고, 좋은 일이 계속될 때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고 고백하는 것은 무신론자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가 50장으로 끝나고 시작되는 출애굽기의 시작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창세기 50장과 출애굽기 1장의 사이는 무려 400년이라는 시간적 거리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1:8절은 4백년 뒤에 그 땅에 무언가 변화가 있었음을 이렇게 이야기해줍니다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 애굽 그러니까 이집트는 힉소스 족이 장악한 왕조였습니다 힉소스 족은 본래 요셉과 같은 샘 족으로 수리아와 아시아에서 넘어와 애굽을 정복한 이후 왕조를 새운 것입니다 요셉과 같은 샘족이었기에, 요셉은 힉소스왕조에서 총리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었지요 그러나 이후에 원 애굽족속인 투트모스 1세가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고 18대 왕조를 이루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본토 사람들의 왕조가 회복된 이후에 이방인에 의하여 세워졌던 왕조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요 ? 투트모스 왕조는 이전 이방인의 지배시기였던 힉소스 왕조의 역사를 부정하였고, 당시 총리로 있던 요셉의 업적도 또한 무시하고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을 알지 못했던 왕이 일어났다는 말은, 요셉을 지식적으로 알지 못하는 왕이라는 뜻이 아니라, 요셉이 총리로 있던 과거를 부정하고 제거하려는 왕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후의  출애굽기 1장까지의 400년간 그 땅에 있던 야곱의 후예들에게 얼마나 큰 시련이 있었을지는 넉넉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외신은 바다 건너 터키에서 군사 쿠테타가 일어났지만 곧바로 진압된 이후에, 반란을 도모했던 이들에 대하여 피의 숙청과 보복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


    4

    오늘 본문의 배경이 어디입니까 ? 무지렁이 같은 제자들 데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던 주님의 걸음이 가리사라 빌립보앞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리곤 뜬금없이 제자들을 향해 사람들이 주님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리고 제자들 본인들은 주님을 누구로 보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십니다

    바로 앞장인, 오천명을 먹이셨던 광야 빈들에서 이 질문을 하셨다면 아마도 그곳에 있던 누구라도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그곳을 떠나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앞서 오병이어가 일어났던 광야는 영공과 환희가 눈에 보이는 장소였습니다 소히 말하는 성공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빌립보는 어떤 곳일까요 ?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그 시절, 많은 정복지의 권세가들은 어떻게 하면 로마 황제에게 잘 보여 출세를 하거나 생명을 보전할 수 있을까 눈치만 보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곳곳마다 황제를 칭송하는 의미로 황제 케사르 ( 가이사랴 )라고 하는 명칭을 붙여 황제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이곳 가이사랴 빌립보도 헤롯왕이 로마 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건설했던 도시였던 셈입니다 로마 황제라고 한다면 세계의 주인이었으며, 신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황제의 생전에는 신으로 부를 수 없었지만, 식민지에서는 공공연했습니다 그러니 변변치 않은 곳은 신으로 불리우는 이의 도시, 황제의 도시가 될 수 없습니다 일단 황제의 도시라는 이름이 가지는 위용에 걸맞는 규모가 있어야 하니, 대단히 크고 화려한 규모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또 황제의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는 늘 황제와 로마의 평화를 위해 제사를 드리는 신전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가이사랴 빌립보는 가장 화려하고, 모든 사람들의 눈에 동경의 대상이 될 만한 도시입니다

    그곳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했습니다 말이 예수님의 제자들이지, 그들은 모두 거지꼴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의 위용에 그들은 모두 시선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시골 오지에 사는 학생이 강남 한 복판에 와있는 장면을 연상하면 좋겠습니다

    (* 가이사랴 빌립보 복원 추정 조망 )


    5

    어쩌면 제자들의 마음속에 들리지 않는 아우성이 일어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변절하고 살아가면, 양심을 속이고 살아가면, 세상에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가면, 한번만 눈 감아 버리면 얻을 수 있는 화려한 영광이 눈앞에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그들의 현실은 이전에 주님을 만나기 이전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부나 세리와 같은 먹고 사는 일자리 마져 잃어버렸습니다 그저 주님을 통해 하루 하루를 살아내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고생은 그렇다고 쳐도, 예수님을 좇으며 품었던 메시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도래도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발견되어지는 자신들의 삶과 모습은 비천하기만 해보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을까 ?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 수 없이 반복하며 되내였겠지요 ? 혹은 돌아설까를 두고 내면안에서 한없는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이 질문은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믿고 있느냐? 라는 질문과 동일합니다 그렇게 두고 보니, 제자들을 향하신 물음은 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택에 대한 강요와도 같습니다


    ‘저 화려한 삶을 보장하는 듯한 황제의 편, 황제의 도시에 서겠느냐 ? 아니면 이 흙먼지 나는 빈들에 그리스도와 함께 서겠느냐?’는 질문에 제자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과 결정이 바로 기독교신앙이 말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가장 극적인 자리, 자신들의 삶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부족해 보이고, 비참해 보이는 그 자리에서 주님은 ‘그러나 주님이야 말로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라는 우리들의 신앙고백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 신앙의 고백처럼 살아내라고 말입니다


    영광을 함께 보고 있던 오병이어가 일어난 광야도 아니었으며, 기적과 이사가 일어나는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길의 반대편에 서 있는 물질과 번영과 쾌락을 약속하는 세상 복판에서 이루어진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주님을 향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더 부족해 보이고, 더 볼품없어 보임에도 이루어진 선택이기에 더욱 빛이 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6

    본문을 지나 시작되는 17장은 변화산 사건이 등장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주님을 따라 변화산에 올랐다가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하시는 엄청난 환상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압도당했는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곳에서 살겠다는 등의 말이 없던 베드로가 초막이라도 짓고 이곳에서 살겠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 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그들을 데리고 다시금 산 아래로 내려가도록 길을 재촉하십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자리, 우리들의 신앙고백이 있는 자리, 주님이 우리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는 고백이 빛나는 자리는 바로 환상이 사로잡고 있는 산위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산 아래 삶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산위이지만, 우리가 살아내야할 곳은 산 아래입니다 산 아래에서 산 위에서의 삶을 살아내고, 가이사랴 빌립보 앞에서 주님을 붙잡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신앙 고백은 이 예배의 자리에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주님이 듣기 원하시는 신앙 고백의 자리는 바로 여러분이 지난주까지 살아내셨던, 그처럼 실망하고 좌절하고 아파하고 낙담하며, 실낯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아 보려고 몸 부림치던 그 삶의 자리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님을 따라 사는 길이야 말로 구원의 길이며, 진리의 길이라고 세상의 영광을 따라 패망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비천해보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길을 선택하는 것 ! 그것이 바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신앙 고백의 자리입니다


    신앙의 고백을 지켜내며 오늘을 살아낸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증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 풍요를 상징하는 가이사랴 빌립보가 아닌, 굶주림과 황폐한 광야에서 비로서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


    많은 사람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황제의 도시, 그 화려함이 내게 풍요를 준다는 신화를 좇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환란의 도시는 결코 사람들에게 안식과 생명을 주지 않습니다 달콤한 신기루일 뿐입니다 진정한 생명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포장하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귀하고 그것만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탐욕을 부추기고, 자신에 대한 비교의식과 실망감에 사로잡히게 하면서, 각박한 삶으로 몰아 세우는 가이사랴 빌립보에 서 계십니까 ? 그러나 바로 그 자리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는 자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자리가 여러분이 고백하는 주님이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매일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만이, 예수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시라는 신앙 고백을 지켜내심으로, 진리를 붙잡고, 해같이 빛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길이 옳습니다 그리고 그 길위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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