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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07/25 성령강림후 9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1. 7. 21. 14:55

    성서일과

        1독서 | 사무엘하 11:1 ~ 15 혹은 열왕기하 4:42 ~ 44

          응송 | 시편 14 혹은 145:10 ~ 18

        2독서 | 에베소서 3:14 ~ 21

        3독서 | 요한복음 6:1 ~ 21

     

    설교음원

    http://naver.me/xOC76QWZ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bUKFn_jcwdI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풍성한 식탁을 차려주시는, 주님

    1

    오늘은 성서일과 복음서 말씀으로 요한복음을 함께 읽었습니다. 본래는 연중독서 복음서 본문으로 마가복음을 선택해야하지만 16장 밖에 않되는 짧은 분량 때문에 부족함을 대신해서 5주간 요한복음 6장을 읽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이유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또 그렇게 살아가야하는 제자 공동체에게 요한복음 6장안에 담겨 있는 ‘예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말씀이 지니고 있는 중요성에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는 생명의 떡이시다’라는 말씀이 얼마나 실감나게 와 닿으시는지요? 종교적인 선언으로 읽는 경우가 대부분일 뿐, 과연 실재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만으로 먹고 살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보통은 회의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생명을 공급받고, 유지하며 살고 있다는 실감이 오늘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기대와 믿음도 시들해지고 맙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서 말씀은 말 그대로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심을 외면할 수 없는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2

    복음서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주목할 수 있도록, 배경이 되는 시기와 장소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빈들’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반해, 요한은 특별히 ‘산’위에 오르셨다고 배경이 되는 장소를 소개하고 있으며, 덧붙여 시기적으로는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에 가까이 이르른 때입니다. 아마도 요한 공동체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이 말씀을 전해듣고는, 쉽게 유월절과 만나를 통해 광야에서도 먹이시고 입히셨던 출애굽의 하나님을 떠올렸을 겁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물음에 대해 요한이 답하고자 하는 바를 넉넉히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있었던 사건이 바로 지난주 함께 나누었던 마가복음 본문이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공동체에서는 거절당해 주님 보시기에 마치 ‘목자 없는 양’같았던 오클로스들이 주님을 향해 달려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을 안타까워 하셨던 주님이 제일 먼저 그들에게 무엇을 주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병을 고쳐주는 일이 아니라, 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 (막 6:34) 가르침의 내용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녀로 받아주셨다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천국복음입니다. 왜? 주님께는 가르침이 먼저였을까요? 복음이야말로 낙심하고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고, 무너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가르침의 자리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생명의 말씀은 들었는데,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해줄 떡은 없다는 겁니다. 배고픈 이들이 언제 돌변해서 불평하고 원망할른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건 아무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공의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이루어낸 치적이 있다고 해도, 경제가 나빠지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권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만다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동일합니다. 그러니 모두가 배고픈 이런 상황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가르치시는 일에 빠져계신 주님의 모습에 제자들의 몸이 달았을 겁니다. 

     

    4

    그러나 먼저 입을 연 것은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이 먼저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6절을 보면 주님은 이미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실지 계획을 다 가지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님의 물음은 일부러 빌립을 시험하기 위했던 겁니다. 여하튼 주님으로부터 물음을 받은 빌립은 대단히 현실적인 답을 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7) 사람들을 먹이려면 하루치 성인의 삯을 십만원씩만 잡아도, 어림잡아 이천만원이나 부족하다는 겁니다. 이 대답은 주님의 시험에 통과한 걸까요? 아니면 실격이었을까요?

     

    뒤이어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가 전한 말은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는 소식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무리 전체가 지금 얼마나 곤궁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 사이를 온통 헤집고 다녀도 발견했다는 것이 겨우 어린 아이 손에 들린 한끼니의 먹을 것 뿐이었으니 그렇습니다. 이제 모두 굶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보입니다. 낭패입니다.

     

    5

    오병이어 사건은 광야 빈들에 내몰린 사람들이 ‘굶주림’에 의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현대인들의 수고함도 모두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두려움들은 결국 ‘죽을지도 모른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닿아 있습니다. 요한은 빌립과 안드레가 주님과 나누었던 대화를 통해 먹고 사는 굶주림의 문제가 두려움으로 닥쳐올 때, 우리가 어떤 식으로 반응해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굶주림이 현실적인 문제로 닥쳐오자 빌립은 먼저 얼마가 필요한지를 셈했습니다. 그리곤 그만큼 부족한 형편에 낙담하고 맙니다. 익숙한 모습입니다. 안드레는 어떻습니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주님께 올려드리며 그는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빌립이나 안드레의 반응은 정확히 동일한 말입니다. 자신만의 셈으로 이제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는 마침표를 찍어버린 겁니다. 두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의 반응도 이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늘 먼저 이해타산을 따지고 셈을 해보지만, 금새 ‘무엇이 없어서’, 또 ‘무엇을 할 수 없어서’라는 이유로 지레 두려워하고, 이내 ‘틀렸어’, ‘이것으로 끝이야’ 라고 상황을 마무리 합니다. 전적으로 판단의 주체는 ‘나’였고, 가능성과 불가능의 여부도 ‘나’를 기준으로 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빌립과 안드레, 그리고 우리들 모두 ‘나는 이렇습니다’라거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할 뿐, 정작 중요한 물음은 하지 않습니다. ‘주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혹은 ‘주님은 어떻게 하실수 있습니까?’ 라고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다가오는 순간이면, 어찌 살아야하는가? 제 자신의 셈을 하기에 바쁘다보니 정작 주님은 무엇을 하실 수 있는 분이었는지에 까마득히 잊고 무관심합니다. 요구하는데만 익숙한 우리는 어지간해서 주님께 물으려 하지 않습니다. 

     

    6

    다시 한번 안드레가 전했던 9절 후반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물고기 두마리, 보리떡 다섯개는  그것  뿐입니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풍성한 한끼의 식사가 될 수도 있고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한 것이었음에도, 주님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보면 내 손에 들려져있는 것은 언제나 너무나 볼품없고 초라해 보이기만 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주님으로 인해 굶주림의 문제가 해결되고 모두가 풍성히 먹게 되었지만, 두번째 단락에 이르러 그들은 또 다른 두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큰 바람 때문에 일어난 파도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제자 공동체의 처지가 그것입니다. 이번에 그들을 덮친 두려움은 ‘이제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자신들을 찾아오시는 주님을 보고도 ‘유령’이라고 소리칠 만큼 그들은 모두 혼비백산하고 말았습니다. 두려움은 공포로 우리를 덮쳐오고, 그때마다 우리는 늘 반복되는 두려움 앞에서 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한채 무너진 모습일 뿐입니다.

     

    7

    1독서 사무엘서는 다윗 일생에 남겨진 유일하고, 치명적인 오점이라 할 만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 죄를 감추기 위해 전쟁중에 있던 우리아를 밧세바에게 돌아가도록 권유합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언약궤와 이스라엘이 전쟁중에 있는데 홀로 먹고 마시고 처와 함께 자는 일은 결단코 하지 않겠다며 충성된 결의를 고집합니다. 결국 어찌할 수 없던 다윗은 그를 전장에 내몰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다가 하나님 마음에 합했다 불리우던 다윗이 끝을 알 수 없는 이런 지경에 까지 떨어지고 말았을까요?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11b) 라던 우리아의 결연한 맹세는 사실 다윗을 향한 성서기자의 엄중한 비난인 셈입니다. 이미 다윗의 영혼은 죄 앞에 산산히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궤는 전쟁의 선봉에 서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다윗은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다윗의 떨어진 거리감이 그가 처한 불안한 상황을 암시해줍니다. 지금 하나님은 전쟁에 나가 계시니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안일함이 어느 순간 그의 생각에 삐집고 들어옵니다. 마치 부모님이 집을 비우시고 난 이후, 찾아오는 청소년기의 달콤한 일탈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있어야만 했던 그의 마음과 영혼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언약궤나 성전안에 갇혀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던 다윗도,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냉철한 시선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여기는 순간이면, 우리 주엥 누구라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는 시편 기자의 비난이 날카롭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시 14:1)

    여기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며 사는 것은 ‘괜찮은 것’이나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 여기며 사는 어리석은  삶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8

    이제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서 정말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기적이 아닌,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야 말로 ‘생명의 떡’이라는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셨나요? 이 사실을 결코 잊지마라는 엄한 말씀이 6장 66절입니다.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 요 6:66

     

    여기에서 말하는 ‘그때’란 바로 앞 단락인, 예수께서 자신이야 말로 생명의 떡이심을 밝히신 이후를 말합니다. 오병이어를 경험한 직후 였음에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속절없이 제자들은 떠나가 버렸습니다. 사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마술처럼 보리떡과 물고기가 계속해서 쏟아지는 그릇이었고, 삶을 채우는 풍성함이었으며, 기적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랬던 것은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정작 그 모든 일을 능히 이루실 수 있는 주님을 보지 못했던 탓에 그들은 실망하고 말았던 겁니다.

     

    하지만 우리도 이런 오해와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꿈에서나 상상하고 짐작하고 구할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 엡 3:20 ( 메시지 )

     

    바울이 전한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보다 더 주실’이라고 하는 대목에 머뭅니다. 내 배를 채우는 한 끼니는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면 충분함에도, ‘오천명’이나 먹었다는 것, 그도 아니면 먹고도 남은 ‘열두 광주리’에서 전혀 벗어나질 못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우리가 꿈에서나 상상하고 짐작하고 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도 주실 수 있는 분이 ‘주님’이라는 것, 그리고 주님께서 모든 것 위에 충만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이야말로 교회와 성도들의 영광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자랑이고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 할 지라도 주님 손에 들리워만 진다면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는 일용할 양식으로 보이게 됩니다.

     

    9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부터는 물컵의 물을 마시고 비어있는 공간을 보면서 이것 밖에 남지 않았다고 셈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비어있음을 보면서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졌음을 볼 수 있기를 빕니다. ‘주님은 무엇을 하실 수 있으신지, 주님의 계획은 무엇인지’를 묻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이 믿음의 선택은 두려움으로 밀려드는 삶에서 매일 훈련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굶주림과 죽음이 공포처럼 밀려들 때마다 ‘주님’께 묻는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그것이 기도의 자리입니다. 이런 삶이야 말로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주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삶이고, 언제나 주님은 오병이어 처럼 쉽게 지나치고 말 것들을 통해서도 우리 삶을 풍성한 식탁으로 차려주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진정한 기적은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얼마나 먹이고, 얼마나 남겼느냐?가 아니라, 셈하는 것에 빨랐던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먹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으로 변화되었다는 데 있는 겁니다.

    언제나, 어떤 상황속에서도 넘치도록 능히 주실 수 있는 주님으로 인해,  이제 우리는 풍성한 가능성이 담겨있는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쥐고 있는 이들입니다. 갈하고 굶주린 생명없는 세상, 끝없는 소비의 허무와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게 풍성한 하늘의 생명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교회 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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