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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07/18 성령강림후 8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1. 7. 14. 18:14

    성서일과

          1독서 | 사무엘하 7:1 ~ 14a 혹은 예레미야 23:1 ~ 6

            응송 | 시편 89:20 ~ 37 혹은 23

          2독서 | 에베소서 2:11 ~ 22

          3독서 | 마가복음 6:30 ~ 34, 53 ~ 56

     

    설교음원

    http://naver.me/xevPzwqN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BlUnWfyxIh4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In the Villages the Sick Were Presented to Him', James Tissot

     

    '달음박질'하는 사람들

     

    1

    우리 주님의 위로와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곧장 복음서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파송을 받았던 제자들이 주님앞에 돌아왔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기대감과 성취감이 차올라 붉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그저 주님의 말씀만 믿고 나갔는데 그 길에서 귀신이 좇겨나가고 병든 이들이 고침을 받는 일이 일어났으니 자신들이 따르고 있는 스승이 달리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 한편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도 베어있습니다. 사람들을 찾아 다니면서 당시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의 분위기도 피부로 느끼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몇 개월전 요한이 참수당한 이후로 민심은 흉흉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눈 밖에 나면 해코지를 당하고 말 것이라는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기득권자들의 음험한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요한의 뒤를 이어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있는 주님과 또 그런 주님을 따르고 있는 자신들의 처지도 체감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있음이 분명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협하려는 사특한 세력들이 힘을 모으고 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관계 없이, 제자들을 이끌고 가시는 곳마다 거침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름이 널리 전해지는 것은 그 만큼 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위험도 커져가는 겁니다. 이미 지역 사회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종교적 입지를 확보하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정치적 안정을 통한 입지가 필요했던 헤롯당과 결탁했다는 음험한 소문도 들려옵니다. 

     

    2

    한참동안 흐뭇하게 제자들의 보고를 듣고 계시던 주님의 반응은 이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수고했으니 느긋하게 휴가라도 다녀오자는 말씀이었을까요? 일단 ‘한적한 곳’이란, 사람들이 없는 곳, 세간의 눈초리와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거친 땅, ’광야’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드러낼 때가 아니라, 잠시 뒤로 물러서 돌아가는 정황을 살펴보려 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하니 제자들과 함께 가시려는 목적지는 아무도 모르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일행이 향하던 ‘한적한 곳’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주님의 일행이 출발하기 이전부터 육로로 달려 배를 따라 잡고 이미 그곳에서 주님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피해 험상궃은 상황에서 벗어나 있으려던 주님의 의도가 틀어지고 만 것입니다. 낭패입니다. 누가 비밀을 누설했는지 여부는 나중 문제고, 일단은 어서 여기를 벗어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곳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던 그들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께서 보냄을 받은 곳이 바로 그런 이들의 곁이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들’은 누구였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마가’가 매우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사용한 단어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그들’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들’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본래 마가가 선택한 헬라어 원어는 ‘오클로스’ (χλος) 라는 단어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복수대명사는 ‘라오스’(λαός)라는 단어인데, 특별히 ‘오클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한겁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라오스’와 구별하기 위해 선택한 겁니다. 그러니까 ‘오클로스’는 ‘하나님 백성’외의 경계밖의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라오스’는 우리 편에 속한 이들을 말하고, ‘오클로스’는 우리와는 다른 버려진 이들, 함께 할 수 없는 이들입니다. 사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해석으로 곳곳마다 이런 넘어설 수 없는 차별과 구분의 선을 만들어냈습니다. 기득권자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고 있던 때, 힘없는 이스라엘 군중들은 자꾸만 그런 식으로 버려진 이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3

    마가는 ‘오클로스’ (그들)들이 주님을 뵙기 위해 달음박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달려야만 했을까요? 버려진 땅으로 주님께서  직접 오신 이 기회가 아니면 그들이 주님을 다시 뵐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안에서 버려진 이들이라고 했습니다. 부정하다고 집단으로부터 낙인찍힌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두말할 필요없고, 회당이나 마을에도 맘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로움과 거룩함의 상징인 회당의 문을 율법을 무시하면서 마음대로 넘나드는 것이 여간 싫은 것이 아니었는데, 그분만 나타나면 뒤를 따르는 병자들이 회당에 몰려들었습니다. 부정한 이들 때문에 회당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하니 불편하고 견딜 수가 없었을 겁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그들 때문에 더 바리새파 사람들의 미움을 샀는지도 모릅니다. ‘오클로스’는 그런 이들이었습니다. 고통앞에 한 없이 무력하고, 도움을 받기 위해 손이라도 내밀라치면 그 때문에 핀잔을 받고, 비난을 당하고, 눈총을 받는 일이 일상인 이들입니다.

     

    ‘오클로스’들은 주님을 뵙기 위해 버려진 땅을 기꺼이 찾아나섰습니다. 그곳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주님을 찾아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마가는 매우 시각적이고 역동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거친 숨을 헐떡거리고, 

    목까지 숨이 차오르고 있음에도,

    문드러진 손을 들고,

    절뚝거리는 발을 이끌고,

    그들은 달리고 또 달리고 있습니다. 

    버려진 자신들의 처지처럼, 사람들에게 버려진 이 땅에 주님이 오셨으니, 벗은 발로 달려나가지 않을 수가 없던 겁니다. 주님을 향해 달음박질하고 있는 그들의 굵은 땀방울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듭니다. 그럴듯해 보이고, 딱히 부러울 것 없어 주님을 외면한 채 살고 있는 우리를 그들의 간절함이 한 없이 부끄럽게 만들고 맙니다.

     

    4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들에게도 오클로스는 대부분 불편하고 성가신 이들이었습니다. 더럽고 부정하다는 생각은, 저들은 나만 못하다여기는 못난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우리들은 모두 ‘오클로스’였습니다. 세상안에서 그러했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는 밖에 있는 사람들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와는 달리 주님의 눈에는 당신을 찾아 달음박질해온 이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안쓰러워 죽을 것 만 같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예수님, 당신의 눈에 그들이 불쌍하게 보였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은 주님의 심정을 고스란히 옮겨주지 못한 번역의 실패입니다. 마가는 이 부분에서도 매우 특별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불쌍히 여기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라는 단어입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 ‘단장’의 마음, 아픈 자식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애닳은 어미의 마음 정도라고 해야할까요?

    공감의 마음을 가진 이들만 경험하는 감정입니다. ‘너와 내가 다르다’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알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그들의 상황을, 그들의 처지를, 그들의 마음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몸을 기울이고, 다가갈 수 있는 사람만 공감할 수 있습니다. 나와 너를 다르지 않다고 ‘동일시’하는 겁니다. 

    그 동안 우리는 나보다 잘나고,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의 안으로 들어가려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동일시하는데만 마음을 써왓습니다. 그 결과 나보다 못한 이들을 우리 밖으로 내몰고 무시하고 무관심했고, 늘 ‘오클로스’ 같은 사람들을 불편해 왔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당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 같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사람들이 외면했던 ‘오클로스’들을 스스로 동일시하실 수 밖에 없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 힘으로 살만하다 말하는 사람들이 아닌 그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하나님의 손을 붙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5

    버려진 이들로 인해 주님의 마음이 찢기는 것처럼 아팠던 이유는 마치 ‘목자없는 양’처럼 측은해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목자 없는 양처럼 보였을까요?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들에게는 목자처럼 따르던 이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저 경계 밖으로 내몰았던 종교지도자들이나 기득권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꾸짖고, 억울했던 자신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던 사람,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의 외침을 들으면서 저 사람이라면, 저 사람이 보여주는 세상이라면 자신들도 사람대접 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허망하게 참수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신들은 정죄받고 차별받아 마땅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세상 뿐입니다. 그들의 기세에 내몰려 하나님 앞으로도 나아갈 수 없었으니, 마치 하나님도 버린 것같은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때, 그들에게 들려온 이름이 ‘예수’였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그분은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죄인이라고 내몰림 당한 이들과도 순순히 함께 하고,

    병든이들의 손을 덥썩 붙잡고 기도해주시기도 한답니다.

    공공연한 곳에서 세리와 창녀들이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는 말씀도 서슴지 않으셨답니다.

    자신들을 내몰았던 이들은 모욕감을 참을 수 없었겠지만, 오히려 그런 분이라면 자신들의 편이 되어주시고, 자신들을 끌어안아주실 수 있진 않을까? 기대하게 됩니다.

    이제야 온 삶을 의지하고 맡길 수 있는 목자를 찾아낸 겁니다.

    그래서 내침을 당했던 ‘오클로스’들은 버려진 땅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건너편 게네사렛에 도착하셨을 때는 심지어 걷지 못하는 이를 침상째 메고 나온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목자를 찾는 양떼속에는 상처입은 것도, 병들은 것도, 나면서부터 불구인 것도 보입니다. 대제사장들이, 서기관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신들의 탐욕과 아집을 채우느라 외면하고 버린 이 땅의 잃어버린 백성들이, 주님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생명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 마가복음 6:56 

     

    당신을 목자로 삼으며 달려나온 이들에게 주님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셨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없이 주님의 옷 가에 손을 가져다 대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맺혀있습니다. 병이 나아서가 아닙니다. 본래 옷자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민수기 15장 39절 전례에 따라 옷자락에는 계명을 상징하는 365개의 옷술이 달려있는데, 옷술을 단 사람이나 그를 보는 이들 모두가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회당에서도 거부당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소외되었던 그들이 자신들앞에 서신 예수님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앞에 서게 된 겁니다. 성전이나 회당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틈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마주하는 감동이 사뭇쳐옵니다. 이제야 그들도 오클로스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된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초대를 받았다는 감동과, 초대에 응답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은혜가 그들의 병을 고친 겁니다.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아멘.

     

    6

    2천년이나 떨어진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고 깨어진 삶이, 지친 영혼을 회복할 있을까요? 주님의 옷자락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인격이고, 은총이며, 그분의 말씀을 의미합입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당신의 양들을 만지셨고, 세상을 고치셨습니다. 병자들을 향해, 귀신들린 이들을 향해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으로 나음을 선포해주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는달리다 굼이라 말씀으로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두려움에 휩쌓인 제자들에게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으로 영혼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모두 주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고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연중독서 본문들이 다시 눈에 들어옵니다. 오늘 연중독서 본문은 모두 우리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독서 사무엘하 7장에서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의 청을 거절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다윗의 손에 피를 묻혀서’라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한 곳을 따로 떼어 그들을 그곳에 심고
    , 각자 자기 집을 갖게 하여 더 이상 떠돌지 않게 할 것이다
    ’ | 사무엘하 7:10 

     

    자식이 굶고 있는데 무엇을 먹고, 자식이 집없이 떠도는데 어찌 따듯한 아랫목에 눕겠느냐? 한결같은 하나님의 진심에 가슴이 져며옵니다. 선택본문인 예레미야 23장은 보다 분명하게 주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곳곳마다 흩어지고 유리하는 자신의 양들을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불러모으시는 목자이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심판하고 내치는 이가 아니라, 찾아내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주님은 상처입은 것은 싸매주시고, 병든 것들을 힘으로 일어서도록 돌보시고 먹여주실 뿐만 아니라, 힘있는 것들이 그들을 노략질하고 목숨을 위협할라치면 앞장 서서 그들로부터 지켜내주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을 찾는 이들을 결코 빈손으로 돌려세우는 법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양들이 목자를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독서 서신서 말씀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금 기억하게 합니다. 주님은, 본래 하나님 밖에 있던 그들오클로스였던 우리를 당신이 머리가 되시는 몸에 참여하게 해주셨습니다. 서로 다른 둘로 존재하던 우리들이 이제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라는 토대위에서 지금도 건축중인 하나님의 집이 것입니다. 이제 더이상 우리는 혈루증 앓던 여인처럼, 광야로 주님을 찾아나섰던 이들처럼,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기 위해 달음박질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몸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주목하고 집중해야합니다. 그리고, 적자생존의 치열한 세상속에서 성과와 업적을 쌓는 과잉에 내몰려 함께 망하는 길로 달려가고 있는 세상을 거스르며, 경계 밖으로 내쳐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공감하며 손을 내밀고 끌어안으며, 회복하고 성하게 하는 주님의 옷자락이 되라고 부르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피할 곳을 찾아, 위로를 얻고자, 인생을 의지할 품을 구하며 주님의 몸을 향해 달려오는 이들을 교회가 그들을 박대한다면, 시대의 오클로스들은 어디를 향해 달려갈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을 내어주셨는데, 지금 주님의 몸을 차지한 교회는 사상이 다르고, 모양새가 다르고, 이념이 다르고, 신학이 다르고,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많은 다름의 이유를 만들어오클로스들이 주님을 향해 달려오는 걸음을 가로막기에 바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럽습니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주님의 마음은 오늘도 찢어집니다. 그들의 , 그들의 아버지를 모욕하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시류를 따르고 세상의 편이 되려던 걸음을 멈추고, 주님을 향하고 있는 이들을 맞이하며 달음박질해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몸으로 삼으신 주님께 응답하며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에베소서 2:19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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