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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6 성령강림후 18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9. 22. 23:36
성서일과
- 1독서 | 민수기 11:4~6, 10~16, 24~26 혹은 에스더 7:1-6,9-10, 9:20-22
- 응송 | 시편 124
- 2독서 | 야고보서 5:13-20
- 3독서 | 마가복음 9:38-50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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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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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편’, ‘내 편’ 그리고 ‘주님’
1
지난 주일 복음서 말씀은 같은 주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으면서도 제 욕심을 위해 자꾸만 ‘누가 더 큰 사람’인지 편을 나누려고 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이와는 달리 늘 더 낮은 이들이 머문 곳을 향하시던 예수님과의 서로 다른 방향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제 자신만 생각하는 세상은 저보다 못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스스로 신이 되라는 세상의 성공신화나, ‘제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내라’는 타종교와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은 편을 가르고 차이를 벌려 놓음으로 제가 서 있는 자리를 높아 보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늘 제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이들을 향하는 주님은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주심으로 당신의 자리까지 높여주려고 합니다. 어떻게든 소외됨 없이 하나가 되게 해주려는 마음, 참으로 선한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예수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니 편과 내 편을 나누려는 못난 마음을 포기하지 못하곤 합니다. 으레 저보다 큰 권위 앞에서는 날선 목소리로 개혁을 부르짖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권위에 기대고 싶어합니다. 권위있는 이들과 같은 편에 섬으로 그의 권위를 덧 입으려 하거나, 또 다른 한편으로 나보다 못한 이를 향해서는 동정이나 정죄를 통해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언제나 편을 가르는 기준은 ‘나’입니다. 그러다 보니 홍수나 쓰나미, 재해를 당한 나라나, 환란을 경험하는 이들을 보면서도 그런 상황을 면하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못난 마음을 들키곤 합니다. 늘 어느 편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거나, 혹은 어느 편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으로부터 안도감을 얻기 위한 애닳은 우리의 노력이 안쓰럽기만 합니다.
세상은 누구라도 ‘니 편’이나 ‘내 편’을 선택하게 하고, 그렇게 나뉜 경쟁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구조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어느 편도 아니라는 것은 ‘도태됨’을 뜻할 뿐, 일단 이런 시스템에 뛰어든 순간부터는 살아남기 위한 수고와 몸부림만 남게 됩니다. 삶이 버겁고, 사람들의 영혼이 각박해져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편을 가르는 룰’에서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지만, 한 개인이 제도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뿐입니다.
2
복음서 말씀에서 여전히 편가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제자 요한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우리편이 아닌데도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내어쫓는 사람들을 금하게 했다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을 사칭했다고 윽박지르고 협박했을런지 모릅니다. 주님이 내 편이라는 우쭐거리는 마음은 그런식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제자들과 달리 주님은 적대감 대신, 우리와 같은 이들이라며 포용해주셨습니다. 이유는 ‘당신의 이름’으로 행한 일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내어 쫓았습니다. 마귀를 내어쫓는 일이란 질병과 억압, 멸시와 천대, 악마적인 힘앞에 짓눌린 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일입니다. 구원하고 살리는 하나님의 일이고,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한 사람들은 분명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시는 주님께 깊이 공감하고, 주님의 길에 동참하기로 결단한 이들이었을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야 말로 자신의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던 주님의 편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몸은 떨어져있지만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 그들 때문에 주님 곁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음이 드러났던 제자들의 민낯은, 배타성과 독선에 사로잡힌 오늘 교회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진리의 파편을 붙잡고도 마치 진리를 꿰뚫은 자처럼 행세하고, 교파주의와 배타성에 물들어 정죄하는 일에 익숙한 모습이 피부색, 민족, 영토, 종교나 교리, 이방인인지 아닌지를 차별하시지 않는 주님과 너무나 달라보입니다. 연약한 이들을 돌보고, 아픈 영혼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일과는 관계 없이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배격하는 우리를 향해 복음서 두번째 단락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3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경우에 대한 말씀인데 ‘작은 자’앞에 붙어 있는 ‘나를 믿는’이라는 수식어의 해석이 불편합니다. 마치 주님께서 신앙이나 교회를 경계삼아 우리 편과의 사이를 구별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주님과 뜻이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믿는 작은 자’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시는 주님의 길을 신뢰하고 그 길에 동참하는 사람들, 특히 세상의 권세에 짓눌려 스스로는 주어진 삶을 선택하고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없어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죄짓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연자 멧돌을 메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후 43절부터 이어지는 손, 발, 눈으로 짓는 죄에 관한 섬칫한 말씀들도 이런 작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죄에 대한 경계이고,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짓는 사람보다 죄를 짓게 만든 이들에게 더욱 단호하다는 말씀으로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준 앞에서 우리는 무능할 뿐입니다. 한쪽 손이 죄를 지어 찍어낸다고 해도 그 순간 다른 편 손으로 죄를 짓고, 죄지은 눈이나 발을 하나씩 찍어낸다해도 속절없이 죄를 향하고 마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불법체류자들이나, 파업하는 부당해고 노동자들, 배가 고파 남의 것을 훔치게 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약자를 양산하고 사람들을 무너지게 만드는 거대한 사회적 악에서 나는 죄짓지 않았다는 이유로 편을 가른채 눈 감고 살아왔던 우리들에게 연자멧돌을 짊어지라는 주님의 말씀이 매섭기만 합니다.
4
49절과 50절로 이어지는 마지막 단락이 복음서 말씀을 하나로 묶는 결론에 해당합니다. ‘소금’에 관한 말씀입니다.
남과 다른 나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나 뒤쳐지고 싶지 않은 조급함이 ‘니 편’과 ‘내 편’으로 구분짓고, 상대를 나보다 못한 이로 만들려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너와 나 사이의 평화를 깨트리는 ‘죄’는 그곳에서부터 일어납니다. 주님을 따르겠다는 우리라도, 다름을 이유로 차별하고 차별되니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사로잡히면 부패하고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소금’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 부패와 변절을 막는 겁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상징하는 것이 ‘소금’이라고 보면, 소금이 맛을 잃고 변질된다는 것은 ‘제자다움’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의 제자다움’은 오직 예수와의 관계성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와의 관계성으로만 규정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그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제자다움을 잃는 순간,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한 모든 것도 의미를 잃게 됩니다. 누구라도, 또 무엇을 해냈다고 해도 주님과의 관계성안에서 떨어지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사회를 개혁하고, 제도를 개선하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역사 이래 수 없이 많은 철학과 윤리, 종교와 교육, 이데올로기와 체제가 있었지만 세상은 구원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반성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사회를 덮고 있는 악마적인 힘을 제거하지 않는 한, 또 다시 배고프고, 가난하고, 병들수 밖에 없음을 배우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처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길 외에 다른 소망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는 하나님의 나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주님에게 속하여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곳에서만, 소유의 정도로 또는 힘의 유무로 차별하고 구별짓고 소외시키는 세상의 힘은 깨어지게 됩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서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5
계속본문인 서신서 야고보서는 교회를 향하여 고난 받는 사람들과 병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오늘 성서일과 전체와 조금은 낯설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기도의 지향이 어려움 가운데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향해야한다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오늘 우리 신앙은 기도에 대해 너무 옹졸하고 치우친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기도만 하면 다 낫고 그리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정성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는 기도 만능파이거나, 기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고, 몸이 낫는 것은 아니라고 빈정거리는 불신파, 모두 자신을 기준으로하는 해석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일단 사도의 말을 따라가 봅니다. 사도는 매우 특별한 기도의 조건을 요구합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간절한 기도’가 그것입니다.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병든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 야고보 5:15
과연 그 동안 우리의 기도는 사도가 말한대로 ‘간절한 기도’였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불안함을 뒤로하고 ‘간절한 기도’의 기준과 표본을 예수님의 기도에서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하나라도 허투루 드린 것이 있겠냐마는, 간절함이 고스란히 베어있던 주님의 기도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흘렀다는 겟세마네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배우게 되는 ‘간절함’과 우리가 생각하는 ‘간절함’사이의 차이가 너무 커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 마태복음 26:39
겟세마네 기도의 정수는 마침내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잔을 거두어달라는 주님의 기도는 거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바라는 것들이나 연약한 이를 돌보고자 하는 휴머니즘의 발로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굴복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던 내 모든 세계가 무너질 때,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던 주님의 기도의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간절한 기도’란,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임을 배우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가 전하는 말씀을 이렇게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거나 뜻이 이루어진다는 특별한 기도의 방법론으로 읽어내려했던 어리석음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기도는 궁극적으로 기도하는 이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기도의 대상이 된 이들의 삶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병이 낫지 않아도,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뜻과 만나는 되니 좋습니다. 내 모든 뜻이 하나님의 뜻으로 덮여지는 것을 목격하게되고, 비로서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는 나라가 무엇인지를 엿보고 실감할 수 있으니, 너와 내가 같음을 전제로 드리는 기도의 자리가 복됩니다.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고,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는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는 축복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 모두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지평으로까지 넓어집니다. 병든 자와 기도하는 자, 아프고 힘든 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는 곳에서, 세상이 갈라놓았던 심연같았던 차이가 사라집니다. 더 불행한 것도, 더 괴로운 것도 사라지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있는 곳,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곳에서 끊임없이 이 편과 저 편으로 나뉘어 경험할 수 밖에 없던 고통과 절망, 상심과 낙담, 근심과 염려, 불안과 죄와 사망, 마귀의 억압은 마침내 깨어집니다. 참된 구원의 경험인 것입니다.
6
여전히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편을 가르고, 또 어떻게 해서든 편이 갈려야하는 세상위에 서 있습니다. 때로는 주님을 향하는 마음 조차도 이쪽과 저쪽으로 갈라지곤 합니다. 갈라져 흐르는 강줄기는 바위에 가로막히지 않고, 모래톱에 갇히지도 않는 큰 바다에 이르러서야 온전히 하나를 이룹니다. 세상 보다 크신 주님께 잇대어 있을 때, 갈라지고 나뉘어진 우리가 하나가 되고, 깨어진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가 됩니다.
페르시아 곳곳에 흩어져있던 유다인들 중에 누구도 자신들이 학살당할 날로 제비 뽑혔던 ‘부림의 날’이 원수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는 잔칫날이 될 것(에스더 9:22)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시시각각 뒤덮여오던 순간에 조차 크신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안에서는 무엇이나, 또 언제라도 화가 복이 되고, 절망은 소망이 됩니다. 모든 것이 선하여 지고, 모든 상황이 복이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세상 모든 만민이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으로인해 온 땅을 구원하는 축제의 날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는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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