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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2/12 대림절 제 3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1. 12. 8. 11:05

    성서일과

    • 1독서 | 스바냐 3:14 ~ 20
    •   응송 | 이사야 12:2~6
    • 2독서 | 빌립보서 4:4~7
    • 3독서 | 누가복음 3:7~18

     

    설교음원

    http://naver.me/x4HXyiK3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4FX_MP_YTD0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도무지 '행복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1

    대림절 3주 주일입니다. 지난 2주간의 대림절 기간, 그리스도께 집중하시며 순례의 여정 가운데 ‘기쁨’을 발견하고 누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림 첫주에 말씀드렸다시피 대림절의 실천 덕목안에는 경건, 절제, 나눔외에 ‘기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 삶에 ‘기쁨’의 시간이 채워지고 있다면, 대림의 기간을 잘 보내고 있다는 이보다 분명한 증거는 없는 셈입니다. 모쪼록 하늘로부터 임하는 기쁨으로 대림절 3주를 맞는 우리 모두의 얼굴 빛이 해처럼 밝게 빛날 수 있기를 빕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뻐하십시오’라는 목사의 설교가 퍽퍽한 세상살이를 지나야하는 여러분의 삶에 오히려 짐이 되는 것은 아닐런지 염려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제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 오늘 서신서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위로함없이, 곧장 ‘기뻐하라’고 소리를 높입니다. 

    기뻐하십시오!’

    그냥 기뻐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가 한번 기뻐하는 것도 성에 차지 않습니다. 바울의 기준은 ‘오직’ 그리고 ‘항상’ 기뻐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이런 삶이 정말 가능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우리이지만, 바울은 그저 세가지 실천적 방안을 제시해줄 뿐입니다. 6절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 빌립보서 4:6

     

    2

    감옥에 갇혀 있는 그가 하는 말이니 대놓고 딴지를 걸 수는 없지만, 이런 식의 말씀이 여전히 불편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내심 ‘도무지 기뻐할 일이 있어야 기뻐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만큼 우리 시대에 ‘기뻐할 만한 일’이 드물고, 그래서 ‘기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낯설은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한결 같이 ‘기뻐하라’고만 합니다. 매우 불친절합니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늘 기뻐할 일만 있었을리 만무합니다. 오늘도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옥에 갇혀 있는 신세입니다. 주의 부르심을 받고 난 이후, 삶은 오히려 곤고해졌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속으로는 괴롭고 힘들면서도 대중앞에서만 그렇지 않은 척, ‘기뻐하라’고 입에 바른 거짓말을 했을리는 없습니다. 여튼 그가 힘을 주어 기뻐하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편지를 받는 이들이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의 일꾼이었던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이것 때문에 교회가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한번 틀어진 관계라는 것은 남과 북 만큼이나 서로의 마음을 멀어지게 만들 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이들의 마음마져도 얼어붙게 만듭니다. 

    교회안에 일어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이 전한 권면이라고는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건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감 없는 조언일 수 있습니다. 틀어진 관계를 이전으로 돌아가도록 하려면 어느 한쪽의 완전한 희생이 전제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힘들게 한 상대를 일방적으로 용납하고, 덮어주는 ‘관용’을 베풀라는 것이 쉬울리가 없습니다.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마땅히 그리하는 것이 성숙한 사람의 태도라는 것을 모를리 없지만, 생각처럼 우리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 곤란하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마치 우리가 충분히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수 있는 사람이라 굳게 믿는 것처럼, 기뻐하라는 요청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3

    지난주에는 3독서 복음서 말씀이 요한의 소명에 대한 것이었는데, 오늘은 그가 전했던 ‘회개의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던 메시지가 주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가 ‘회개’란 단순한 유감으로서가 아니라,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죄사함’을 받으라 외치고 있을 때,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세리와 군인외에 ‘무리들’입니다. 평행본문인 다른 복음서에는 ‘무리들’안에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인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하튼 ‘독사의 자식들’이라 거칠은 책망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듣고자 몰려왔던 이 사람들은 적어도 ‘회개’하라는 말씀의 초대에 응답했던 사람들입니다. 비록 시대에 저항하지 못한채 적당히 타협하고 부역하면서 살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라는 양심의 외침에 아파하던 이들이었을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기특한 생각이 드는데 요한은 아랑곳없이 ‘열매’를 내놓으라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삶으로 드러나는 증거가 있어야만 ‘회개’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는 그의 메시지는 우리를 힘들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속옷 두벌 밖에 없는 사람에게 나머지 한벌을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세리들은 정해진 것 외에는 더 징수하면 않되고, 군인들은 남의 것을 빼앗으면 않됩니다. 그런 모습이 있어야 회개일 수 있다는 겁니다. 당시의 제 이익을 얻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제게 주어진 힘을 권세처럼 휘두르던 세리나 군인들이었지만, 그들로서도 그리 살 수 밖에는 없던 시대입니다. 로마를 전복하고, 부패한 권력자들을 비난하고 전복하지 않고, 악착같이 살려하는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려는 것일까요? 

    증거가 있어야 회개를 인정한다거나, 믿음을 확신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순간, 우리의 믿음은 늘 의심받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믿음’이 아니라 어찌해서든 믿음을 ‘입증’할 수 있는 ‘표징’에만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는 없을 겁니다. 행함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게 되니, 피곤함과 불안이 ‘기쁨’으로 채워져야 할 신앙을 병들게 합니다. 

    그러나 비록 과정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열매’를 누리며 살라는 것이 요한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삶이란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라는 당위의 요구가 아닌, 이제는 천국 백성으로 살게 되었다는 기쁨에서 출발하라는 요구인 겁니다.

     

    4

    마치 ‘회개’를 통해 어떤 사역을 하거나 결실을 얻어내려 하지 말고, 주님께 이어져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 겁니다. 성경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라거나, 행함으로 거룩함을 이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돌이키기만 하면 천국 백성답게 살게 해주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이 아닌 스스로의 행함이나 능력을 통해 죄사함을 받으려 한다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고 든다면, 하나님은 분명 돌들을 택해서라도 자신의 백성을 삼으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셔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실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에 이어져만 있으면, 나무가 가지에 양분을 공급하고, 자라게 하고, 열매맺게 하는 겁니다. 

     

    오늘 성서일과 1독서 본문은 스바냐서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고손자로 왕족 출신이었던 그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당시는 후대의 요시야가 개혁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시기로, 온 나라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던 때였습니다. 당장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망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망할 것이 뻔한 땅을 향해 울려져야할 메시지라면, 마땅히 허물과 죄에 대한 고발과 그에 대한 불같은 하나님의 심판이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의 예상을 어긋납니다.

    비록 지금 그들이 처해있는 처지와 상황은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 열강들 사이에서 누가 패권을 잡는다고 해도 망할 수 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앞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새롭게 해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기도하고, 예배한다고 해도 ‘현실’은 여전히 칼날처럼 두렵고 아픈 상황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기뻐하라’고 외치는 근거는 17절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 스바냐 3:17

     

    5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두번의 말씀으로도 하나님의 격려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더 놀랄 만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쁨의 이유로 삼으신다는 겁니다. ‘주님의 기쁨이 된다’는 표현은, 늘 그렇게 되고 싶은 우리쪽에서 드리는 ‘신앙’의 고백일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말씀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극에 달해 당장 망해도 할 말이 없던 때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무엇을 잘해내거나, 업적, 열매를 이루었는지를 조건으로 삼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만, 주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헐벗고 굶주리고 지치고 곤한 우리 인생 전체가 긍정될 수 있게 됩니다. 더 없이 마음이 따듯해지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스바냐서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이사야 12장의 ‘감사찬송’이 응송으로 이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먼저 손내밀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비로서 주님을 찬양할 수도, 주님을 기뻐할 수도 있게 되는 겁니다.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랑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부담으로만 여겨지던 ‘기뻐하라’는 바울의 말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타자를 향해 ‘관용’함을 베풀라는 그의 말도 이젠 전혀 불가능할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생각해 봅니다. 천국이 가까워지고, 정말 그 사실이 느껴진다면 우리 삶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용납을 얻게 되었다는 기쁨이 영혼을 가득 가득 충만하게 채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요한의 책망이 천국으로 부르는 하나님의 초대로 들렸다면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한 ‘기쁜 소식’이 또 있었을까요? 우리 마음안에 기쁨이 가득채워지면, 불안하고 두렵게 만들던 어둠이 사라지게 됩니다. 예전에는 날카로운 갈등으로 이어지고 말던 문제들도 이제는 웃으며 넘어갈 수 있습니다. ‘관용’을 베푼다거나, 기쁨을 잃지 않고, 회개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부르고 계시는 사랑의 노래와 말씀안에서, 우리 자신이 무엇이 없어서, 무엇을 못해서 불행한 존재가 아니라는 위로를 받으시길 빕니다. 그 사랑안에서만 우리는 기쁨을 길어올리는 회개에 합당한 살 수 있게 됩니다.

    대림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그날이 오고 있음을 기억하라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6

     이제 우리의 물음은 ‘왜? 내 삶은 행복하지 않는가? 왜 일상이 기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왜 나는 행복해 하지 못하는가?’라거나,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는 물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 물음을 가지고 곧게 해주시고 고쳐주시는 우리 마음의 주인에게로 가지고 가십시오. 그곳에서 우리 자신이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께 용납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순간에도 그분의 기쁨이 되고 있다는 주님 자신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 사실을 입증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까지 인내하신 그분의 사랑을 배우셔야만 합니다. 

    때로 어려움이 찾아오고 그 앞에 무능한 우리를 향해, 세상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스스로를 포기하기도 하고 불행하다 체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주님께 만큼은 세상의 복이며, 포기할 수 없는 그분의 기쁨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괜찮은 겁니다. 

    바울의 권면의 마지막은 이렇게 매듭을 짓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 빌립보서 4:6~7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기만하고 속이는 어떤 어둠의 힘이라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게 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종말의 그날까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제 그릇되고 깨어진 자신의 생각이나, 세상의 기만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마음과 영혼의 불을 밝힙시다. 기쁨의 노래를 부르시며 우리를 향해오시는 주님을 향해, 응답의 찬양을 부르며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삶을 사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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