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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8 대림절 제1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11. 24. 22:36
성서일과
- 1독서 | 예레미야 33:14-16
- 응송 | 시편 – 25:1-10
- 2독서 | 데살로니가전서 3:9-13
- 3독서 | 누가복음 21:25-36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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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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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과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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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의 교회력은 연중기간이 모두 마쳐지고, 이제 새로운 절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동녘교회의 예배는 매주일을 교회력에 맞추어 드리고 있는데, ‘교회력’은 항해하는 배들의 나침반처럼,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들의 여행 길잡이라 생각하셔도 좋을 듯 합니다. 교회력은 세상에 채이며 살아가던 시간을 멈추고 내 걸음이 주님과 어긋남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해주고, 그렇게 자꾸만 원심력에 이끌리듯 주님 없는 삶으로 향하던 보폭과 방향을 다시금 주님께로 맞출 수 있게 도와줍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주입니다. ‘지금’도 계시고 ‘이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주님을 향한 기다림에 집중하는 절기가 시작된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력상의 모든 절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 경건과 절제, 회개와 같이 세상으로부터의 돌이킴을 덕목으로 요구합니다. 그런데 대림의 절기에는 여기에 ‘기쁨’이 추가 됩니다. 주님이 곧 우리의 기쁨이니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유독 대림절만 이르면 마음 한편에 알 수 없는 착잡함이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요?
퓨리서치 센터라는 곳에서 17개의 선진국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17개 선진국 중에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가족’을 꼽았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응답자들은 가족을 세번째로 꼽았는데, 예상하셨을지 모르겠지만 1위는 ‘돈’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원천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신앙’을 첫번째로 꼽은 나라는 ‘미국’뿐이었고, 우리 나라 응답자중에 신앙이 중요하다 응답한 비율이 1%였다고 합니다. 우리보다 낮은 나라는 일본 뿐입니다. 기독교인이 이렇게 많고, 때만 되면, 무슨 일만 있으면 세상과 싸우려드는 우리네 모습과는 일치되지 않는 결과입니다.
이미 사람들의 마음이 소비를 미덕으로 강요하는 ‘돈’에 온통 사로잡히고 만 것은 아닌지 심각한 우려가 됩니다. 그러고 보니 ‘인내’나 ‘기다림’을 그렇게 힘들어 한 이유가 결국은, 동전만 넣으면 물건이 쏟아지는 물질주의에 익숙해진 결과였던 겁니다. 과연 ‘기다림’을 메시지로 전하는 ‘대림’의 절기가 얼마 만큼 사람들의 삶의 방향을 그리스도께로 교정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림을 기쁨으로 길어올릴 만큼 내면의 단단함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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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드렸던 것처럼, 대림절은 기다림을 ‘기쁨’으로 길어올리는 기간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기다림이기에 마땅하고 충만한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무엇을 기다려야하는지를 알지 못하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만큼 고역이 없는 법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도 모르고, 주님과 함께 임하게 될 새 날도 알지 못하다면, 막연하게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없는 일처럼 보일 수 밖에는 없을 겁니다.
대림의 기간은 반드시 한해 동안 교회력에 발맞추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낸 이들에게만 더할 수 소망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그로 인해 소망이 생기고, 어둠도 이겨내는 삶을 발견하며 살아낸 사람이라면, 또한 매 주일 주님의 날이 가져다 주는 평안과 기쁨을 맛본 사람이라면 약속이 있는 대림의 기다림은 선물처럼 주어지는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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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스스로 ‘귀하다’ 가치를 담은 것을 기다리는 것은 쉬운 법입니다. 지치지 않고, 시일이 지체된다고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간절함이 더 깊어질 뿐입니다. 초대교회가 그 환난의 시절에 다시 오실 주님을 신앙의 중심으로 붙들고 있던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했다는 앎에 인생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막연한 기다림에 몸부림치는 것이 아닌, 주님이 오실 날과 가까워가고 있다는 기쁨으로 길어리는 시간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우리안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기대가 되지 않는다’거나, ‘주님의 응답이나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힘겹다’라고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예수님 안에 담겨있는 놀라운 기쁨과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말과 같은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졌던 한 싸이클의 교회력의 시간을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순례의 시간으로 길어올리지 못했던 게으름 탓입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더디고 힘들어도 주님과 함께 걸어온 이들에게만 기다림은 복이며 기쁨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과연 우리는 기다림의 자리에 합당한 사람인지를 돌아보게 해주는 말씀은 응송말씀인 시편입니다.
‘나는 종일 주님만을 기다립니다’ | 시편 25:5b
‘주님을 진리로 삼는 길로 돌이키는 것’이 시편 기자의 기다림의 내용 입니다. 내 걸음이 잘 못되었음을 아는 사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만이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돌이키며,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는 회개야 말로 대림의 기다림안에 담아야 할 덕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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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말씀은 마가복음 13장에서 영향을 받은’ 종말’, 즉 ‘세상의 마지막날’에 대한 말씀입니다. ‘소묵시록'이라고 불리우는 이 말씀들은 마치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내다보고 전하는 말씀처럼 들리지만, 실재로는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프리즘을 통해 해석해낸 신앙적 반성입니다. 복음서 말씀들이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이 근거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종말의 날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재로 성전은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불탔지만 세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수 많은 세대가 지나갔음에도, 세상은 여전합니다. 성전체제가 무너졌다거나 이스라엘이 함락된 것은 ‘하나님 심판’의 날을 미리 보여주는 ‘징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그 때’는 언제일까요?
지난 성령강림후 25주 말씀에서 (https://eastch.tistory.com/470) 종말의 시간은 미래의 언젠가 찾아올 파멸의 날이 아닌, 그리스도와 만나는 ‘오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주목하고 있는 종말의 핵심은 ‘언제’인가? 라는 시간을 향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오시는 ‘사건’에 집중합니다. 더욱이 주님께서 그 날과 때는 하나님 아버지께 속해 있는 것이라고 이미 확정적으로 말씀하시기도 했으니, 시간과 때는 우리가 주목할 대상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때가 이르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징조’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은 것처럼 보이고,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가 있으며,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리게 되고,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하는 것들입니다.
고대로부터 해와 달과 별은 신적 존재로 여겨져왔던 것들입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태양이 빛을 잃게 되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은 종말을 맞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일식이 나타나면 종말이 오는 것으로 여겨 공포에 사로잡히곤 했다고 합니다.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태양이 빛을 잃으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신앙은 당시 세계관을 다스리던 태양이나 달, 별을 단순히 피조물의 수준으로 정의해버림으로 인생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권세들을 박탈합니다. 근거는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주시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인간은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공포스런 모든 힘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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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대인들을 공포로 몰아넣던 그 힘들은 오늘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직, 질병, 이혼이나 사별, 바라던 일들이 실패했을 때, 마치 해와 달과 별, 세상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절망과 공포에 짓눌리고 맙니다. 삶이 온통 어둠에 삼킨 것 같은 종말론적 순간들이고,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패망의 순간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내 안에서만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형편도 다르지 않습니다. 전쟁, 전염병, 기근, 자연재해와 같이 삶을 뒤 흔들 만한 위험들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술이 진보하고 세상이 살만해 졌다고 해도, 개개인들에게, 또는 공동체나 나라를 향해 시시각각 다가오는 종말앞에서 모든 것은 절망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사건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종말론적 사건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을 통해 이미 자기가 주인되어 살아가는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자기 세계의 종말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반드시 우리안에는 대격변이 일어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가치, 내가 지향하는 세상 모두가 뒤바뀌고, 자아가 주인 행세하던 마음의 성전 마져도 산산히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거나, ‘세상이 나에 대하여 죽었다’는 바울 사도의 고백이나 ‘거듭남’이나 ‘부활’은 새로운 삶이 열렸으니 결코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고린도후서 5:17
그리스도와 만나기 이전의 모든 것은 지나가고 없으니, 그리스도 사건은 바울의 말처럼 언제나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이전의 나의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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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다 살아난 사람이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처럼, 주님 없이 살던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순간 종말을 맞을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각오하고 결단해서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주간의 대림절 기간, 우리는 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 초대받은 존재임을 기억해내야만 합니다. 이전에 내 안에서 주인 행세하던 것들, 마치 인력에 이끌려가듯 우리가 노예처럼 굴복하고, 복종해야만 했던 걸음을 다시금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끌고와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그때 종말을 파괴와 절망 공포로 여기는 세상과 달리, 우리의 기다림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복되고 넘치는 기쁨으로 채워지게 될 겁니다. 1독서 예레미야의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마지막 때’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배경이 됩니다.
바벨론에 의해 패망하게 될 것을 예언해야만 했던 선지자가 예레미야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멸망의 날을 기대할 사람이 있을리 없으니 당연한 겁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날을 전해야만 했고, 결국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시 그를 찾아와 주셨던 주님의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패망이 아니라,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서 전쟁의 상처를 씻어내시고, 다시금 그 도읍을 거룩한 성으로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이스라엘, 거룩한 땅으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새로운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예수안에서 성취되었고, 이제 종말의 때는 예수님 때문에 패망과 죽음으로 얼룩진 공포가 아닌, 전혀 다른 하나님의 구원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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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 공동체의 교회로서의 정체성과 차별성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그 날에 대한 기다림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들처럼 기다림을 우리의 기쁨과 꿈으로 이어갈 수 있을까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서, 방탕과 술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고, 또한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게 하여라’ | 누가복음 21:34
주님은 이미 당신이 피흘림으로 주인되어주신 우리 마음을 방탕, 술취함, 세상살이의 걱정이 ‘덫’이 되어 짓누를 수 있으니 조심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말 사전은, ‘덫’이란 짐승을 꾀어 잡는 기구이며, 남을 헐뜯고 모함하기 위한 교활한 꾀를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걱정과 염려는 주님을 믿지 못하도록 우리 마음을 속이고, 꼼짝할 수 없는 덫에 짓눌리게 해서 무너지게 만듭니다.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미혹을 받아 주님이 없다는 생각에 끌려가고 있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잠들어 있는 사람은 덫에 걸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을 기쁨으로 길어올리며 살아가려면 깨어있어야만 합니다. '기도'만이 우리를 덫에 걸리지 않도록 그리스도께 이어줍니다. 기도 자체가 능력이라거나, 상투적인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언제나 성령안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의지입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기도하는 순간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를 비추시고 있는 한, 어둠은 우리를 속일 수 없습니다.
대림 첫주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깊은 어둠속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어둠과 혼돈이 깊어간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오고 계신다는 분명한 징조입니다. 이제 우리 삶에 혼돈과 격변이 일어날 겁니다. 그러나 불안해하거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기도함으로 깨어 있다면, 주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겁니다.
초를 밝혀 어둠을 몰아내듯, ‘기도’함으로 어둠속에서 우리를 넘어트리려는 음험한 덫을 몰아냅시다. 복음의 빛을 높이 들고, 우리 마음 뿐만 아니라, 어둠의 덫에 걸려 공포와 두려움에 무너져가는 세상을, 속임에서 깨어나게 합시다. 지금은, 세상의 주인행세하려는 어둠의 힘을 몰아내는 빛의 사람들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주님은 곧 오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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