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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05 대림절 제 2 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12. 1. 11:29
성서일과
- 1독서 | 말라기 3:1~4
- 응송 | 누가복음 1:68 ~ 79
- 2독서 | 빌립보서 1:3~11
- 3독서 | 누가복음 3:1~ 6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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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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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가와 외침이 들려야할, 땅
1
대림절 2주 주일입니다. 기다림안에 찾아오시는 주님으로 인해,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이 조금 더 밝아졌기를 기대합니다. 성서일과는 보통 응송으로 시편 찬송을 부르는데, 다해 대림절 제 2주인 오늘은 누가복음의 말씀이 응송으로 배정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찬가 뒤에 이어지고 있는 ‘사가랴의 찬가’입니다. 제사장인 그는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수태고지를 받았습니다. 아들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자신의 아이가 메시아의 길을 여는 소명을 받은 귀한 존재라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 때문에 찬가가 터져나오고 있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조금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우리 시대에 이렇게 기쁨의 찬가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런 지경인데도 자신은 성공했다고, 살만하다고 우쭐거리는 이들을 제외하고보면, 두려움과 상실감, 절망과 한숨, 그리고 하나님의 모습마져 보이지 않는 억울한 눈물소리가 크게 들리니, 남의 일처럼 사가랴의 찬가를 들어야 하는 우리네 삶이 서럽게 보입니다.
한번 내려앉은 좌절감이나 우울함을 털어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둠을 깨트리는 것은 한줌의 빛이면 충분합니다. 우리 마음과 삶 위에 드리워진 어둠을 깨트리기 위해서 필요한 그 빛은,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라고 하는 소식뿐입니다.
함께 찬가를 부르자고 누구라도 억센 손으로 이끌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이런 세상에 좌절하지 않아도 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 날로 짙어가는 어둠앞에서도 늠름하게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그러나 말라기 선지자의 외침 이후 짙은 침묵에 갇혔던 그 시절처럼,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의 날을 향한 당찬 외침이나, 주님을 송축하는 찬가가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성서일과 본문속에서, 숨조차 쉬기 막막한 어둠을 찢고, 소리 높여 하나님을 노래하고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종교적 기득권자들이 제 욕심을 채우며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던 성전안에서 사가랴의 찬가가 불리워지고, 소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광야에서 주의 날을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힘찬 함성이 땅을 울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감옥보다 더한 억눌린 현실에 갇혀 있는 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따듯한 권면이 이어집니다. 그러고 보면 어떤 암흑의 시기에도 우리가 듣지 못했을 뿐, 외치는 소리는 멈추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저 오늘 목숨하나 부지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신세였음에도, 교회를 향했던 그의 메시지에는 ‘기쁨’과 ‘환희’와 ‘찬가’가 가득합니다. 마음이 드높아지고, 기대감으로 영혼이 고양되어, 기쁨이 흘러나오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요? 어떻게 감옥에 갇혀 있는 자가, 감옥 밖에 있는 이들에게 ‘기쁨’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요?
절망의 땅 한복판에서도 ‘찬가’를 부르던 이들의 후예로서, 오늘 우리도 절망과 한숨과 패배감만 가득한 세상을 향해 찬가를 부를 수 있을까요?
2
오늘 복음서의 내용은, ‘세례자 요한’에게 부여된 ‘소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예언서인 이사야로부터 전승된 이 소명 기사는,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유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먼저 누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하였던 ‘시기'와 ‘장소’에 관해 언급합니다.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있고, 빌라도가 유대총독으로 있던 때, 유대의 분봉왕으로 헤롯과 그의 동생 빌립, 루사니아가 다스리던 때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세속적 권력자들의 이름뒤에 대제사장인 안나스와 가야바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할 대제사장들이 이미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인들로 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그런 면에서 빌라도 만큼이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이름일 수 밖에 없습니다.
화려한 도시의 불이 미치지 않는 어둠속에서 별이 더 잘 보이듯, 세상이 이야기해주는 방식이나 제 힘으로 붙잡으려는 시도들이 모두 무너져 하나님만을 향한 절대의존의 상태에서 이르게 될 때,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곳이 어디든 이처럼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현실은 늘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것, 더 해야할 것들이 눈을 사로잡는 곳입니다. 광야에서 하루를 살아냈다는 것은,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 살리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만나게 되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을 찾아온 곳이 바로 이 광야였던 겁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쏟아내는 그의 외침은 성전지도자들과 기득권자들에게 불쾌하고 불편한 것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광야’ 에서 울려퍼진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성전’이 그들의 권력이나 기득권이 될 수 없다는 종말의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성전이 아닌 광야 그곳에서 생생하게 만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난 이후, 그는 비로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됩니다.하나님을 만나고, 말씀 사건, 예수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누구나 말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외칠 수 밖에는 없습니다.
3
하나님을 경험하고 세례 요한이 외친 한 말씀은, 회개의 세례를 통해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무엇이고, ‘세례’는 무엇일까요? 두가지 모두의 공통점은 ‘죄 사함’을 받게 한다는 겁니다. ‘하마르티아’라고 하는 헬라어로 번역된 ‘죄’는 ‘과녁에서 벗어난 화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향하고 있어야 할 곳,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겁니다. 사람이란, 본래 하나님에 이어져서만 살아갈 수 있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이탈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죄인 겁니다.
이것을 다시 본래 있던 자리, 본래 있어야 할 곳,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어디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곁에 있다’라고 하는 말은, 장소적 개념이 아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바라시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서 외쳐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흙으로부터 불러내신 부르심인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거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망각하고 ‘소명’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나 자신을 돌아볼 때마다 시시하게 살아가는 볼품없는 존재가 아닌, 하나님께서 거룩한 존재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 말로, 나를 부르신 이를 향해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참된 ‘회개’에 참여할 때마다, 부끄러움이 아닌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용납으로 무한한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있어야 할 자리, 잃어버린 내 모습을 찾았기 때문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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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하나님의 본래적 부르심으로 돌이키고, ‘잃어버린 소명’을 회복하는 ‘회개’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요? 우리는 먼저 요한처럼 단독자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광야’로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서 우리는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말씀입니다. 그러나 외치는 소리는 듣기에 거북하고 불편한 소리입니다. 그 소리가 망치가 되고 정이 되어 깨트리고, 곧게 하고, 평탄하게 하려는 것들이, 바로 끊임없는 탐욕에 흔들리고, 세상의 유혹과 염려로 짓눌리고 마는 무능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평탄하게 해야할 것은 이민족을 선교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처럼 우리 밖에다 내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늘 나 자신을 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찾으시고, 찾아오시는 곳이 우리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살이의 힘앞에서 주님의 말씀이 부정되고 무시되던 곳, 내 자신의 의지가 주님의 뜻을 무너트리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의 영역을 들추어내고 고발하는 외치는 소리는 늘 우리 마음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서, 우울함과 패망감에 사로잡혀 곳곳마다 골짜기처럼 패여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쭐거림과 교만함이 산처럼 높아만 가고, 이제는 말씀이 뿌려져도 자랄 수 없을 만큼 거칠고 험한 땅처럼 영혼이 굳어져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주님이 전해주신 씨뿌리는 자의 비유 말씀이 떠오릅니다.
말씀을 들었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악한 사탄이 그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가고(19절),
말씀을 기쁨으로 받더라도 그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사람은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넘어지게 되며(20-21절),
말씀이 뿌리내린 것 같아 보이더라도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22절),
오직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만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게 된다(23절)우리 마음과 영혼은 어떤 상태일까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어찌해야할까요?
이 비유에서 핵심은 어떤 밭이냐가 아니라, 씨를 뿌리는 이가 있다는 것이 핵심이었던 것처럼, 결실하도록 씨를 뿌리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 외치는 소리를 듣는 것외에는 없습니다. 어떤 밭이라 하더라도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결실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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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나누었던 말씀도 이와 같았습니다. 세상 염려가 덫이 되어 마음을 짓누를 때마다, 우리는 내 안에서 삐뚤삐뚤 굽어지고, 날카롭고 험하게 깨어진 감정들이 마음을 울리는 ‘감동’이 될 때까지, 환경이나 상황에 쉽게 속아 나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까지 찌르고 파괴시키던 왜곡된 ‘기분’과 ‘감정’이 참된 기쁨으로 변화될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기도’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비로서 굽은 것이 곧아지고, 패이고 높아진 것들이 평탄해집니다. 치유와 회복이 시작되고 잃어버렸던 우리 자신, 잃어버렸던 소명을 되찾는 순간입니다. 주님을 통해 삶을 둘러싼 모든 것, 나 자신 까지도 새롭게 해석될 때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대림절 둘째주, 우리는 주 오심을 준비하라는 소리에 자꾸만 내 안이 아닌, 내 밖을 둘러보려고만 합니다. 주님이 오시고 그 때가 임하면 그저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에 사로잡힌 탓입니다. 여전히 이런 일을 해내고, 저런 스팩을 쌓고, 제도를 바꾸고, 시스템을 바꾸고, 이 사람을 저 사람으로 바꾸고, 개혁운동을 하고, 각오를 하고, 결단을 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와 구원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잇대어 바름을 따르고, 생명을 추구하며,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공의와 정의를 삶으로 살아가게 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겁니다. 대림의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마음과 영혼을 넉넉하고 풍성하게 채우는 사건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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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 이사야 40:3~5
복음서의 마지막 절이 인용한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온 땅이,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날이 이르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때가 이르면 대림의 기다림이야 말로, 어둠을 찢고 새 날을 가져오는 시간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외치는 소리는 어디로부터 울려퍼져야 합니까? 주님 오실 길이 놓여질 우리 마음입니다. 주님이 임하시면 우리 영혼안에서부터, 배에서 생수가 흘러 넘치듯 기쁨의 찬가가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외치는 소리는 또한 어디를 향해 울려퍼져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대림의 외침은 소망이 어디에 있느냐고, 기다림은 허무라고 비웃고 냉소하는 이런 세상에 깨우는 꾸짖음으로 울려퍼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 일에 먼저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외치지 않으면, 돌들이라도 함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외침, 교회들이 부르는 찬가는 잠자는 이들을 깨우고, 소명을 발견한 하나님의 자녀로 나아가자는 초대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모든 열방과 민족,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이 생명의 찬가를 함께 부를 그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 무엇도 도도히 흐르는 이 구원의 시간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주님이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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