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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절 제 4 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12. 16. 23:45
성서일과
- 1독서 | 미가 5:2~5a
- 응송 | 누가복음 1:46b~55 혹은 시편 80:1~7
- 2독서 | 히브리서 10:5~10
- 3독서 | 누가복음 1:39~45, (46~55)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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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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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빛 되시는, 우리의 주님
1
오늘 대림절 넷째 주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제 성탄절이 정말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품고 지내왔던 지난 4주간의 순례 기간이 무색할 만큼 여전히 우리시대는 돈에 눈이 먼 기업들과 무책임한 인재들로 인해 발생한 안타까운 죽음들, 그런 각박한 전쟁터로 내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사람이 저런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싶은 인면수심의 범죄들 뿐만 아니라, 자연재해, 전쟁이나 테러의 위험도 그치질 않습니다. 길을 지나며 마주치게 되는 낯설은 이들에게서 알 수 없는 분노를 발견할 때마다 섬칫하며 놀랄 수 밖에 없는 요즘입니다. 피로에 지친 일그러진 우리 모습은 과연 대림절이 세상을 향한 희망의 메시자가 될 수 있을까?하는 의문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비록 깨어지고 망가진 세상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고쳐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조차 구원해 낼 수 없는 우리이지만,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대림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근거하고, 진리에 이어진 희망입니다. 그리고 오늘 성서일과 본문속에서 그런 희망을 통해 삶을 노래하는 이들과 만나게 됩니다.
2
1독서 본문인 ‘미가’는 ‘누가 야훼와 같을 수 있는가?’라고 하는 뜻의 선지자의 이름으로 지어진 책입니다. 선지자의 이름 자체가 ‘하나님과 같은 분은 없다’고 말을 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사야는 미가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제 처지와 눈높이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지게 되듯, 왕족이었던 이사야에 비해 가난한 시골 출신의 미가가 전하는 메시지는 차이가 드러납니다. 이사야는 강대국의 틈새에서 외세를 의존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메시지가 핵심인데 반해 미가는 우선 유다가 망하게 된 원인이 정치, 종교지도자들이 저지르던 불의, 거짓된 예배, 탐욕, 가난한 이들을 향한 착취에 있다고 고발합니다. 그러나 패악한 이들의 죄를 고발함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희망’의 약속을 잊지 않습니다. 구원자이신 메시아께서 에브라다 사람들의 거주지인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입니다! 격동의 시기에 그보다 더한 고통으로 내몰린 백성들의 틈바구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것은, 하나님의 시선이 그들을 향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속절없이 흐른 7백년이 지난 어느날, 호구등록을 위해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하던 요셉 가정의 여행길 위에서 예언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해산날이 가까운 만삭의 아내를 나귀에 태우고 90km나 떨어져있는 먼길을 향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수고로운 상황조차도 사실은 메시아를 보내시겠다는 예언을 이루어내시려는 하나님의 세심한 간섭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목자들과 양들외에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을 만큼 그분의 오심은 고요했습니다. 그러나 암울한 시기, 짙은 어둠을 뚫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졌음을 알아 챈 이들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3
오늘 복음서가 소개하고 있는 두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들은 천사가 일러주었던 대로 생명을 잉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 전해주셨던 당신의 약속과 말씀을 자신들을 통해 이루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그녀들에게는 세상이 어찌돌아가고 있는지와 관계 없이 ‘지금’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이었고,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는 경이로움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이 엘리사벳에게는 아이를 갖지 못하며 보내야 했던 지난 날의 모든 수치심과 억울함과 고통을 씻어주는 말 그대로의 기쁜 소식이었겠지만, 마리아에게는 누구라도 알게 되면 위험천만해질 수 있는 당혹스럽고 무서운 소식일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임신하게 되었다는 말을 아무런 긴장감 없이 읽고 있지만,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십대의 소녀가 임신을 하게 된 겁니다. 비록 마리아가 ‘주님의 종이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놀라운 믿음을 보여주며 순종했다고는 하지만, 누구라도 믿어줄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사건에 느닷없이 휘말렸으니 그 황망함을 어떻게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혼란스럽고, 당장 이후의 일이 두려웠을 마리아는 문득 천사가 건냈던 ‘아이를 갖지 못하던 친척 엘리사벳이 늙은 나이에 아이를 벤지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말을 떠올렸을 겁니다. 며칠 길이나 되는 먼 거리이지만 그녀는 곧장 유다 산골에 있는 사촌 엘리사벳의 집을 향해 또 다시 길을 나섭니다. 마리아가 걸음을 재촉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지금 세상 천지에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오직 엘리사벳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만 불안하고 두려웠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에 임신을 하게 되었으니 ‘난임’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기뻤겠지만 워낙에 노산인지라 염려와 걱정이 쉬이 사그러지지 않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당번으로 봉사를 위해 성전에 올라갔던 남편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호사다마’의 전조는 아닐까요? 갑작스런 악재가 생기니 먼저 태중에 있는 아이가 걱정이 됩니다. ‘혹시라도’라는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히니, 마음은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4
어느날 마리아가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사촌이라고는 하지만 여리디 여린 딸 뻘 밖에 않되는 소녀입니다. 그 아이를 마주할 때 엘리사벳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폭력에 의해 내동댕이 쳐지고, 원치 않는 임신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야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고,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리고 비난하길 좋아하는 세상때문에 더욱 서러운 사람들, 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살아갈 것을 강요받는 이들입니다. 얼마전에는 모당의 선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혼회자 문제로 사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 우리는 정치적 목적,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주저함없이 개인의 신상을 털고, 아이들의 실명까지 폭로하는 잔인하고 악마적인 세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라거나, ‘남편은 알고 있느냐?’ 꼬치꼬치 캐물음 없이, 두려움에 휩쌓여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를 축복의 말로 끌어안아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45)
아파해 본 사람만이 아파하는 이의 눈물을 볼 수 있고, 말 없이 내민 손길만으로도 위로해줄 수 있는 법입니다. 네가 임신한 아이야 말로 주님이 허락하신 아이, 그런 아이를 갖게 되었으니 참으로 복되고 기쁜일이라는 위로를 누가는 성령이 임하여 전해진 말(41)이었다고 정의합니다. 엘리사벳의 위로와 축복을 받았던 마리아의 마음이 따듯해진 이유입니다. 성령의 말은 늘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살아갈 의미를 회복시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불안과 두려움, ‘왜 나여야만 했는가’라는 의구심도 눈녹득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는 알 수 없는 기쁨으로 인해, 하나님께 찬미를 올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비천한 여종’이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그녀의 노래는 시작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보다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요? 그녀는 입술을 열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큰 일’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의 도구로 자신을 택하셨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단락에서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행하셨던 일들에 대한 찬양이 이어집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말 그대로 세상에서 잘 나간다고 교만하고 우쭐 거리는 이들과 보잘것 없고 연약하고 가난한 이들중에서 하나님이 호의를 베푸시고 긍휼히 여기는 이들은 세상이 무시하고 눈물 흘리게 만들었던 사람들입니다. 힘센 이들과 한편이 되는 것을 좋아하는 세상과 달리 늘 소외된 이들, 소망없는 불행하고 안쓰러운 이들의 편이 되어주시니 하나님은 참 좋은 분이십니다.
찬가의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약속하셨던 자비와 긍휼을 이루실 것을 믿기에 기쁘다는 고백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역사안에서 행하셨던 일들이나 자기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을 돌아보니, 장차 행하실 일을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5
그러나 정작 오늘 세상을 향해 대림의 메시지를 전해야하는 우리에게 엘리사벳이나 마리아가 전하는 위로나, 선지자 미가가 전했던 하나님의 위로도 도무지 마음에 채워지질 않습니다. 힘없는 여인들끼리 나눈 위로가 현실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고, 이렇게 세상 살이가 퍽퍽하고 위태로운 상황에 ‘공의’를 행하고 정직하게 살라는 말씀이 무슨 유익함이 있겠느냐 싶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한가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그 동안 작고 볼품없어 보인다 싶으면 업쑤이 여기고 소홀히 대하다 보니 삶도 자꾸만 절망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허풍이라도 할지라도 뭔가 일이 되려면 위세가 있어야 할 것같고, 그럴듯한 조짐이나 가능성이 보여야 마음이 놓입니다. 변화를 단박에 이룰수 있을 만한 한방이 없으면, ‘대체 그런 것으로 무얼 할 수 있겠느냐?’며 지레 포기하고, 되어지는 결과물이 보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쓸모 없다 여깁니다. 드러냄과 겉치레를 강요하는 물량주의와 자본에 길들여진 탓에,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임에도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던 그 말씀이 심장이 뛰게 만드는 복된 말씀으로 듣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미가가 전했던 예언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곧장 하나님 말씀으로 들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런 상황에 처할리 있겠는가?’ 라는 답답함 때문입니다. ‘공의’를 따르며 사는 일이 마땅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겠지만, 일단 생존의 문제가 닥치게 되면, 제 아무리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외침은 공허해지고 속절없이 원초적인 욕망에 기울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더욱 정의롭게 살라거나, 하나님을 믿는 이답게 살라는 말씀은 허공중에 사그러지는 작은 메아리로 들릴 뿐입니다.
‘내게 유익이 있는가?’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늘 ‘혼자만 그렇게 산다고 해서 무엇이 바뀌느냐?’는 물음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생각이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끌어안고 품어주었던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연대’할 수 없는 어려움이 됩니다. 너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라는 공감이 바탕이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 ‘연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우리의 연대는 나 밖에 있는 타인과의 사이에서만 미숙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가장 미숙한 연대는 바로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비롯합니다. 그 동안 너무나 바쁘고, 많은 일에 염려하고, 근심하면서 마음과 영혼이, 그리고 육체가 온전히 하나되는 평안을 누리지 못한채 살아왔습니다. 자꾸만 사람들이 여행이나, 먹거리, 힐링 같은 것을 찾아 헤매이는 이유가 여기있다 싶습니다.
이런 상황은 예배의 자리에서도 드러납니다. 본문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비천함을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을 ‘영혼’을 다해 찬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46b) 영혼을 다해 찬양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몸과 영혼, 우리의 전인격과 전존재가 하나가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영혼’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을까요? 찬양을 부르다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거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 대부분일 뿐입니다. 영혼을 다한다는 것은,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의지와 마음의 표현인 경우에 그칠 뿐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지 못할 뿐더러, 영혼의 울림이 있었다 해도 먹고 사는 문제로 한순간 흔들리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에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채 막연하고 상투적인 말로 사용하곤 합니다.
6
미가는 각박해져가는 세상에서 삶이 깨어지고, 망할 것처럼 위기가 더해갈 수록 오히려 더욱 정의롭게 살아가야만 한다고 외쳤고, 마리아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 싶은 이런 삶 일수록, 더욱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리아의 고백처럼, 아무리 볼품없어 보인다고 해도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는 사실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에 대한 믿음에 터잡고 희망을 꺼트리지 않는 한, 적어도 그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삶입니다. 이런 말씀이 상투적으로 들린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깊이 닿지 못한 겁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결과’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결과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리되지 않는 모습에 우리는 또 다시 절망으로 떨어지게 될 겁니다.
과연 미가는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변화되어 자신의 외침을 듣고 돌이키는 회개의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을까요? 마리아는 이 아이만 낳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가는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에 구속되지 않고 마땅히 지향하며 살아야하는 말씀과 길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말씀을 전하되, 성취 여부로 인해 몸부림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비록 배가 불러오고 있음에도 삶이 여전히 비루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하라 하신 말씀이 자신의 때에 성취되지 않는다고 해도, 말씀은 외쳐지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와 역할은 충분합니다. 그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 뿐이었지만 마리아의 순종은 숭고하기만 합니다. 그 믿음의 터위에서 모든 일을 이루실 분이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사벳의 말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는 사람’은 복됩니다. 아무리 작은 것, 아무리 볼품없어 보이는 것이라고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그 믿음위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릴 제사의 제물에만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어떤 것, 얼마 만큼을 드려야하는지에 마음을 쏟고, 이 만큼을 드린다는 과시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시는 일을 하시기 위해 오셨고, 그 일을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다’(히브리서 10:10)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단번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되셨으므로, 하나님앞에 나아갈 때마다 누구보다 못하고, 누구보다 잘난 것이 없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드림에 있어 우리는 모두 ‘평등’해졌습니다. 드려야할 제물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뿐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앞에 나아감에 있어 제물이 아닌, 제물을 드리는 사람만 남게 되는 겁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느냐?는 겁니다.
언약을 주신 분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기에 우리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 하실 것이니,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와 관계 없이 기도만 하고 있으면 될까요? 미가는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수 없었지만 외쳤고, 마리아는 내일을 다 알 수 없지만 믿음으로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희망이 있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이들을 통해, 이 땅을 구원하시는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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