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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2/26 성탄후 제1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1. 12. 21. 16:04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사무엘상 2:18 ~ 20, 26
    • 응송 | 시편 148편
    • 2독서 | 골로새서 3:12~17
    • 3독서 | 누가복음 2:41 ~ 52

     

    설교음원

    http://naver.me/FPunf86r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azZSAZqDzpk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만 자라는, '구원'


    1

    성탄 이후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어떻습니까? 한주간 세상이 좀 밝게 바뀌고 삶을 균열내는 변화의 조짐이 눈에 들어오던가요? 여전히 세상의 모습이 성탄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어 보인다고 해도, 밝은 별을 발견했던 목동들처럼 소망의 빛을 발견하고 생명의 주님과 마주했으니 적어도 우리는 이전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희망이 빛안에 있으니 빛을 발견한 사람들은 ‘빛’을 따르며 살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제 참 빛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심을 기점으로, 새로운 한해의 교회력도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력의 말씀과 예배를 지침 삼아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고 걸어가다보면, 우리 삶 가운데 버성기던 어둠이 사라지고 어느새 은총의 빛이 채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앞서 걸어가시며 스스로 생명의 길이 되어주신 주님이 계시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믿음으로 순례의 길을 나설 수 있기를 빕니다. 어느 길이라도 단박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둠을 거부하고 ‘빛’되신 주님을 따르는 것에 온 마음을 담으십시오. 비록 넘어짐이 익숙하고 늘 서툴기만한 우리일지라도, 예수님을 길삼아 걷다보면 그 시간 만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자라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2

    오늘 복음서의 배경은 과월절을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여정 가운데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삼대절기인 ‘과월절, 맥추절, 추수절’을 지키기 위해 해마다 성전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은 몰라도 곳곳에 흩어져있는 이들 모두가 해마다 세 차례씩 성전을 찾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평생에 한번만 세 절기를 지켜도 된다는 것으로 타협을 하게 되었고, 가능하다면 해마다 과월절을 지킬 것을 권면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은 큰 마음을 먹고 나서는 길이었기에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이 때를 택해서 아이들의 ‘성인식’도 함께 치루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특히 과월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수 밖에 없었고, 이 때만 되면 3만명 정도가 살던 예루살렘에 30만명이 넘게 모이게 되었으니, 어디를 가든 말 그대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됩니다. 

    과월절이 시작될 무렵 예수님의 가정도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명절 기간이 다 끝날 때’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일주일간이나 머무른 뒤에 이들도 돌아갈 채비를 하고 집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룻길을 지나 도착한 곳에서 밤을 지새울 준비를 하게 될 때 즈음, 예수의 부모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빠트린 것을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행렬의 앞뒤에 있는 친척들이나 이웃 어른들이 사이에 아이들과 함께 있으려니 했었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예수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 겁니다. 으레 예수도 그 무리안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지나왔던 길을 더듬어 돌아가는 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성전을 출발하고 하룻길을 갔다가 다시 하룻길을 돌아왔으니, 딱 사흘 째 되는 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서야 마침내 예수를 찾게 됩니다.

     

    3

    부모들의 놀람과는 달리 예수는 너무나 태평하게 율법학자들과 문답을 나누고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질문을 못하는 세대라고 합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조차 모른채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빚댄 말입니다. 이와 달리 ‘물음’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것이고, 적어도 삶에 이끌려가지 않는 문제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율법학자들은 산헤드린에 속할 만큼 당시 유대 사회의 유력한 지도자들인데, 그 틈바구니에서 물음 뿐만 아니라 답도 제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전에 도착해 그 모습을 멀찍이 바라보면서 부모의 속을 태웠다는 괘씸한 보다는 내 자식의 빼어남에 우쭐거리는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튼 정신을 차린 마리아가 예수를 재촉합니다. ‘너 도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게냐?
     예수의 대답이 당돌하기만 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되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인데, 왜 다른 곳에서 헤매는 수고를 했느냐?’ 부모를 타박하는 것처럼 들리니 적반하장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다’라는 예수의 답변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입에 담는 것도 망령된 행위입니다. 그 만큼 하나님은 전능하신 절대자, 경외의 대상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어린 예수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후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던 기도문의 첫머리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동일한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주님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성안에서 하나님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바라보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여기길 않고 있는 우리에겐 낯설은 모습이지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면, 자녀가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은 말 그대로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는 이들이 있어야 할 곳이 있어야 할 곳은 언제나 ‘하나님께’로 향하는 곳이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예수의 부모들에게 성전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계가 아닌, 그저 예배나 제사처럼 자신들을 위한 장소였을 뿐입니다.

     

    4

    예수의 모습은 1독서 본문에서 만나는 어린 시절의 사무엘과 닮아 있습니다. 사무엘에게 성전은 자신이 거해야할 집이며,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나아가지 못했기에, 그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미지의 절대자일 뿐입니다. 예수님과 사무엘 사이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모도 비교가 됩니다. 

    사무엘의 부모인 한나도 예수의 부모들이 과월절을 지키기 위해 그랬던 것처럼, 해마다 남편과 함께 성소(성전)를 향해 올라갑니다. 자신의 아들이 하나님과 함께 머물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아들을 만나러 올라가는 한나의 걸음은 기쁨과 기대로 가득차 있습니다. 염려와 두려움을 안고 성전으로 돌아가던 마리아의 얼굴과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성전을 오르고 있는 그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요셉과 마리아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드림’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열 두 살이었던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올랐던 것은 내년에 있을 성인식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성인식’을 치루게 되면 회당에서 스스로 말씀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앞에서 권리와 의무를 짊어져야 할 때입니다. 이와 동시에 부모들에게는 그 동안 보호하고 돌보던 자신들의 품안에서 하나님께 맡기고 드려야 하는 때가 됩니다. 하나님께 드려졌으니 마땅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아들인 예수가 하나님이 주신 생명,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붙잡고 있는 제 손을 놓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져주실 아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차이가 기쁨과 두려움의 경계를 만들어냅니다. 온전히 내어드릴 때 찾아오는 것은 자유와 기쁨과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입니다. 이와 달리 여전히 내 소유로 붙잡고 있는 한, 삶은 버겁고 힘겨울 수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삷이 자꾸만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 맡기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내 손을 거두어들이지 못합니다. 여전히 내가 붙잡고 끌어안은 채 염려하고, 걱정하고, 결국에는 두려워합니다. 

     

    5

    말씀은 사무엘과 예수에 대하여 똑같은 말씀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자랄 수록 주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누가복음이 자라는 것이 ‘지혜와 키’라고 한 것이 다를 뿐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래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돈’이나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만 살 수 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느냐?’는 물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은 늘 닿을 수 없는 정 반대의 길을 가르쳐줍니다.  오직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떡으로 삼으며 살라’는 것이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단순히 신앙적 표현이나 종교적 언사로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돈이 없으며 살 수 없다’는 현실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재로 ‘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여러가지 방법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오히려 ‘생명’을 위해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돈이 삶에 편리를 가져다 줄 수는 있겠지만, 살고 죽는 것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나, 오히려 돈에 사로잡히고 매달리는 순간, 삶의 기쁨과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의 삶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살이 보다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죄’로 인해 우리 마음이 깨어진 탓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 생명의 풍성함을 맛보며 살아본 적이 없으니 그런 겁니다. 

    주님은 내게 와서 배우라 하실 때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따르며 사는 것은 쉬운 길입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야 말로 본래 사람이 살아가는 마땅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 어려워서는 않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나 노동이 저주스러운 짐이 되는 것과 달리,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은 기쁨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실이 깨달아질 때만, 우리는 삶을 짓누르고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억압과 폭력앞에서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이것입니다.

     

    6

    오늘 말씀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어린시절부터 영웅처럼 혹은 타종교의 신적 존재들처럼 남달랐다거나 온전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자라가셨습니다!’ 그분도 우리처럼 매일을 살아내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낸 21년 간의 매일의 시간이 주님을 그리스도로 키워내셨기에, 마침내 십자가에 이르셨을 때 그 걸음은 ‘다 이루었다’는 우주적 선언으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겁니다. 

    사람들은 늘 ‘성공했다’ 인정받을 만한 일,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법한 특별한 일들을 찾아 헤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다른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평범한 일이나 일상을,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방식으로 이루어가는 이들입니다. 그 특별한 방식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 삶을 통해서만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평범한 일상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언약의 말씀안에서 매일의 시간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셨던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생명의 떡으로 삼아 살아갈 때만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 만큼 자라갈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는 삶’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의 일상을 뜻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하셨듯, 우리가 예수로 옷입고 아버지의 사랑에 감격하며 살아가게 될 때, 비로서 우리 삶에는 ‘찬양’이 채워지게 됩니다. 본래 찬양은 우리가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터져나오는 기쁨의 발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거나 높여드린다는 것이 의지와 결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세상이 넣어준 불안과 두려움, 자아의 탐욕과 의지가 깨어지고, 주님의 약속과 말씀이 소망이 될 때, 성령의 감동과 역사가 내 안을 채우고 넘쳐나게 될 때 마침내 우리 입술에 원망과 불평이 아닌, 찬양이 담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찬양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주님의 말씀이 강해져, 죄를 무너트릴 때 터져나오는 환희의 경험이어야 합니다. 여름 꽃이 태양을 향하는 시간이 열매가 맺게 하듯, 내 안에 성전삼고 계신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 삶을 덮어갈 때 비로서 우리는 골로새서가 말하고 있는 ‘동정심(자비), 친절, 겸손, 온유, 인내, 용서, 사랑, 평화, 감사’를 결실로 거둘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모두 하나님께서 당신과 한 몸을 이루는 이들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7

    마리아나 요셉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보게 됩니다. 돌아보면 그들의 우매함은 우리가 예수님을 대하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대하시듯,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신뢰하시듯, 주님을 믿으며 살지 못했습니다. 그저 내것에만 마음을 빼앗긴 채 삶에 채이고 근심과 염려에 사로잡혀서, 혹은 때로는 하고 싶은 일에 매몰되어서, ‘어디쯤 따라 오시겠지’라는 안일한 믿음? 뒤로 주님을 내몰은 채로 지내왔습니다. 주님은 언젠가 내가 원할 때면 다시 찾으면된다 싶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점점 삶의 중심에서 주님을 잃어버리다보니 어느새 정작 나 자신도 잃어버리게 되고 말았습니다. 본래 우리는 어떤 존재였는지, 왜 보냄을 받았는지 조차 신화처럼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길은 희미해지고 걸음은 비틀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주님의 몸인 ‘교회’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주님과 한 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삼으며 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아버지 되시게 하는 겁니다. 이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앞서 가신 주님을 따라, 이나 떡이 아닌 말씀을 양식 삼아 하늘을 우러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넘치는 기쁨을 주시기 위해, 주님이 우리와 한 몸이 되어주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니 우리는 모두 주안에서 자라갈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들은 반드시 자라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일의 증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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