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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3 주현후 3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1. 19. 16:03
성서일과본문
- 1독서 | 느헤미야 8:1~3, 5~6, 8~10
- 응송 | 시편 19
- 2독서 | 고린도전서 12:12~31a
- 3독서 | 누가복음 4: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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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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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lai Nikolaevich Ge_ 'Christ in the synagogue, 1868' ‘말씀’이, 또한 ‘삶’이 되었다
1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한주가 지났음에도 지난 주일 나누었던 가나의 혼인잔치 말씀 때문인지, 여전히 포도주의 향내가 코끝에 맴도는 기분입니다. 향긋하고 시큼한 포도주가 지난 주일 말씀의 핵심 모티프였다면, 이번주 성서일과 본문이 주목하고 있는 모티프는 기쁨의 삶으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은 무엇을 변화시키고, 또 무엇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모쪼록 오늘 이 시간 금 보다 귀하고 꿀송이 보다 달콤하며, 힘들고 지친 영혼을 넉넉히 일으켜 세우시는, 말씀만이 가져다 주실 수 있는 ‘기쁨’을 길어올리는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주현절 이후의 성서 본문들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놀랍고 기뻐해야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기쁨은 ‘주님의 현현’사건으로부터 비롯합니다. 어둠으로 드리워져 길을 잃어버리고 말있던 인생길을 비추어주시기 위해 ‘참된 빛’되시는 주님이 찾아오셨으니 반갑고 기쁜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환희의 사건을 볼 수 있도록 해주던 그 ‘빛’이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복되게 해내고 마시겠다던 ‘아버지의 말씀’, 우리가 잊고 있던 ‘언약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저 말씀앞에 서는 것을 우연이라 생각하고 심드렁하게 여길 뿐이지만, 사실 이 순간이야 말로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이 깨어지고 상해 있던 우리를 찾아내신 기적같은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를 빕니다.
복음서는 소망을 잃어버린 이들의 눈을 예수님께 향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성전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도 두루마리를 손에 받아쥐고 읽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1독서 본문에서는 치열하게 걸어왔던 생존의 투쟁 너머로 감추어져있던 두루마리를 펴고 학사 에스라가 회중앞에서 그 말씀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 수록 착각을 불러 일으킬 만큼 동일한 말씀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22장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신앙의 회복과 개혁에 앞장서서 성전을 보수하다가 발견했던 말씀을 손에 쥐고 눈물을 흘리던 요시아 왕의 모습이, 성벽 재건 후에 말씀앞에서 통곡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물과 이어져 보입니다.
말씀이 시대와 신분을 뛰어넘고, 시공간을 지나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이들과 마주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 사건이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곳까지 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말씀을 읽은 것 만으로도 감동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의 모습은 어색해 보일 뿐입니다. 말씀앞에서 건조하기만 한 우리의 마음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니 말씀을 듣다가 감동한 적은 언제였고, 말씀이 주는 희망에 벅차 밤을 세우며 성경을 읽었던 적은 또 언제였던가 싶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새로운 성경을 구입해서 볼 수도 있고, 스마트폰만 열면 말씀 뿐만 아니라 설교도 손쉽게 읽을 수 있는 형편이 되었음에도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습니다. 너무 바빠서, 너무 힘들고, 그리고 지쳐서 말씀은 늘 우리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습니다.
2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할 때 백성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무엇이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을까요?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그들의 현실은 말 그대로 폐허가 된 절망일 뿐입니다. 그래도 어찌해서든 살아야 했기에 급한대로 겨우 겨우 울타리처럼 성벽을 쌓아올렸지만 그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같은 토호세력들의 훼방과 모함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하나 만만하거나 쉬운일이 없으니, 하는 일마다 참으로 지치고 곤비한 삶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성벽을 재건하였지만 ‘이제는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막막해 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들리기 시작한 겁니다.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율법의 조문 너머, 자신들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비참하고 비루한 삶으로 내몰린 패망한 자신들을 끝끝내 찾아내 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겁니다. 그 고마움이, ‘괜찮다. 내가 여기 있으니 되었다’는 위로로 들리는 순간, 밀려드는 벅찬 감동을 어찌할 수 없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들리는 하나님 말씀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는 경험이었고, 사건이입니다. 에스라는 어둠을 몰아내고, 슬픔을 기쁨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내시는 이 거룩한 말씀앞에 섰으니, ‘슬퍼하지 마라’고 백성들을 다그칩니다. 능히 영혼을 살리고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말씀이 우리를 찾아내셨으니 오히려 기쁘고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고 타당한 일인 겁니다. 학사 에스라의 말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여기에서 어떤 이들이 말씀앞에 섰는지, 말씀이 누구를 찾고 계셨는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남자든 여자든,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모두 나와 있었다’ | 느헤미야 8:2
‘알아들을 만한 사람’들이란 어떤 이들일까요? ‘성년’을 지난 어른들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에스라처럼 지식이나 학식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걸까요?
‘이튿날에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각 가문의 어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함께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자 에스라에게로 갔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축제에는 초막에서 지내도록 하라는,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서 명하신 말씀이,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 느헤미야 8:13~14
바로 뒤에 이어지는 13, 14절을 통해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때가 유대 절기중 하나인, ’초막절’ 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초막절과 관련해서 전했던 말씀을 읽어보면 모여든 사람들, 즉 ‘알아들을 만한 이들'이 누구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될 겁니다.
3
‘당신들은 이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만이 아니라 성안에서 당신들과 같이 사는 외국 사람도 불러 모아서, 그들이 율법을 듣고 배워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 신명기 31:12
율법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지켜야 할 사람들은 남자 여자를 무론하고 어린아이, 그리고 성내의 외국인들까지를 포함합니다. 사람 취급 받지 못했던 아이들, 늘 터부시 되고 소외받기 일쑤인 외국인들, 이방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님 말씀 앞으로 초대를 받게 된 겁니다. 하나님 말씀은 아이에게라도 들릴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한 명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하나되어 누릴 수 있는 풍성한 기쁨으로 초대한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차별함이 없는 말씀이 모두를 불러 모은 것입니다. 꿈만 같은 예배의 자리이고, 모두가 희망으로 벅찬 기쁨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서신서 말씀앞에서 이 감동은 곧장 난감함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분열과 갈등의 모습때문입니다.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고, 니편과 내편이 갈라지더니, 어느새 서로에게 흉기처럼 상처를 내기 시작합니다. 모두를 한 몸처럼 불러내주셨던 주님의 은총앞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갈등하고 있습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이 분열과 갈등이 주님의 몸으로 부름을 받는 교회를 한 몸으로 세워주시기 위해 찾아와주신 ‘성령’으로 인해 비롯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 말씀은 성령이 교회를 분열시키셨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을 분열의 도구로 사용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고린도 교회안에 강력한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각 사람에게 성령께서 그릇대로 은사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것을 ‘나만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순간, 자꾸만 ‘타자’와 비교하는 못난 습성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되자 나보다 못한 사람이 받은 은사 때문에 배가 아프고, 나보다 더해 보이는 은사 때문에 열등감을 갖게 된 겁니다. 주신 분을 향해야 할 시선이, '내 것’과 ‘저 사람의 것’에 멈추어진 결과입니다. 그렇게 한번 틀어지고 갈라진 공동체를 다시 하나되게 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4
바울은 ‘더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외쳤습니다. 그것만이 대안이고 해결책이라는 뜻입니다. 대체 어떤 은사가 있어야, 다름이 같음이 되고 서로가 하나가 되어, 주님이 주시는 이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는 걸까요?
제 힘으로 설 수 없던 막다른 상황에 내몰릴 때마다 기꺼이 구원이 되어주셨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리워 돌아가고 싶어도 어느새 너무 멀리 와버린 걸음이 아득하니 서럽기만 했던 요시아의 손에 말씀이 들리워졌을 때처럼, 여기까지 오는 것만도 힘겹고 서러웠던 이스라엘을 찾아낸 말씀이 학사 에스라의 손에 들려졌을 때처럼, 성전에 오르신 주님의 손에 들리워진 말씀은 주님께 시선을 두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이 될 것입니다. 말씀 끝에 주님께서 덧붙이신 마지막 한 말씀때문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 누가복음 4:21b
말씀은, 단순히 역사의 유물이나 기록물이 아닌, 언제나 ‘지금 여기’에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기쁨의 사건일 때만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이 들리워지는 곳마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수십번 읽고 설교를 수백편을 들어도, ‘지금, 여기’에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면, 말씀이란 그저 ‘닿지않는 메아리’일 뿐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읽기만 하셨을 뿐인데, 주님은 분명 ‘오늘’ 이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신 이후부터 예수님의 공생애는 시작되었고, 정말 주님은 가시는 곳마다, 만나주시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란 이렇게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억눌린 이들이 풀림을 얻고, 귀신들린 이가 자유를 얻었으며, 곳곳 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머무신 곳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으니, 사도 요한의 말처럼 곧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겁니다. 말씀이신 그분이 여기에 계시니, 말씀은 모든 허무를 깨트리고 성취되었습니다.
5
한주간 바쁜 일상속에서 시간을 정하여 말씀을 읽는 일이 분명 쉽지 않으셨을 겁니다. 거기에 더해, 말씀을 묵상해야한다는 것이 혹여 짐이나 숙제처럼 무겁게 여겨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말씀을 읽는 것이나, 읽은 말씀을 묵상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 동안 말씀을 생명의 떡으로 삼으며 살아오지 않은 탓입니다. 세끼 밥 먹는 일이 힘드신 분은 없으시지요?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밥 먹는 것은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먹는 일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워낙에 제 입맛에 맞는 것들만 찾다보니, 정작 말씀은 입에 삼키기 거칠고, 삼키기도 불편한 것이 되고 말았던 겁니다. 그러니 씹기에 힘들고 삼키는 것이 쉽지 않더라도 끼니를 채우듯, 다시 말씀을 가까이 해야만 합니다. 목사인 저는 한주 내내 말씀 묵상과 연구로만 보내고 있음에도 그 깊음의 샘까지 나아가기에는 늘 턱없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말씀안에서 끝자락을 겨우 붙잡은 것만 같은 터럭 같은 기쁨에도, 인생 전체를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충만함을 경험하곤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자꾸만 내 귀에 들려지고 마음과 영혼의 자리에까지 닿게 되면, 물이 포도주가 되었던 것처럼 말씀이 능력이 되고, 말씀이 삶을 채우고 이끌어가시는 일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입니다. 그러니 당장은 불편하고 힘들어도 말씀을 깊이 씹고 소화시키는 자리에 머무는 시간이 자꾸만 길어져야 합니다. 말씀이 외쳐질 때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뛰고, 메말랐던 눈물이 마음깊은 곳에서부터 샘솟는 기쁨의 삶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주님의 공생애는 ‘성령을 힘입게 되신 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들어가서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셨고, 돌아온 이후 갈릴리에 들어가셔서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주님의 말씀이 귀신을 내어쫓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성령이 함께 하실 때에만 하늘의 능력을 행하셨고, 또한 성령은 늘 주님과 함께 하실 때만 자신을 드러내심으로 ‘지금, 여기’ 하나님 아버지와 한 몸으로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분열되었던 교회를 다시 ‘하나'되도록 하기 위해 바울이 더욱 사모하라고 했던 더 큰 은사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제 분명해집니다. 모든 신령한 은사를 주시는 ‘성령’ 그분 자신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성령을 사모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성령의 임재를 누릴 수 있는가의 문제 뿐입니다.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만민 가운데 부어지시는 영이야말로 성령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라는 물음의 답은 해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더 크고 본질적인 은사이신 성령을 사모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말씀이신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우리 스스로는 결코 할 수 없던 그 일, 진리의 말씀을 따라 하늘의 능력에 잇대어 살아가는 삶을 우리를 찾아오신 그분이 이루어가실 것을 믿고 기대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말씀이 이루실 기쁨을 기대하는 이들만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도 결코 변하거나 사그러들지 않는 신실하신 말씀을 마음의 중심, 삶의 기준으로 삼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입술의 말과 우리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랍되기를 원합니다’ (시편 19:14) 라고 했던 시편 기자의 고백은 말씀이 능력이 되고 삶이 되는 것을 경험한 이런 사람들의 노래인 겁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듯, 참된 주님의 말씀이 어느새 내 생각을 바꾸고, 말을 바꾸고, 또한 삶을 바꾸어냄으로 참으로 우리의 인생을 포도주향 보다 짙은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게 해주실 것입니다. 혹여 당장의 삶이 힘겹고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짐으로 짓누를 지라도, 이제는 슬퍼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의 거룩한 날입니다. 주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이니, 슬퍼하지들 마십시오.” | 느헤미야 8:10c.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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