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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1/09 주현후 1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1. 5. 23:58

    성서일과

    • 1독서 | 사 43:1-7
    • 응송 | 시 29
    • 2독서 | 행 8:14-17
    • 3독서 | 눅 3:15-17,21-22

     

    설교음원

    http://naver.me/F5LsgAn3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zV1_S41GlU4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Image: Illustration by Matt Chinworth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신다면

    1 

    한해의 첫 주일을 보내던 지난 1월 6일은 ‘주현절’이었고 오늘은 주현후 첫번째 주일입니다. 그 동안 교회력의 다른 절기들에 비해 ‘주현절’은 비교적 그 의미를 모르거나, 가볍게 지나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전통에서 ‘주현절’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결코 가벼이 다룰 수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주현절’(Epiphany)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난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야 교리로 정리된 사실에 익숙해져 있지만, 실재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은 쉽게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느냐?’는 유대인들의 불만이 결국은 예수를 십자가에 잡아 죽였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반면에, 초기 기교회 공동체는 그 사실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바울, 초대교회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믿음의 덕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로서는 예수께서 '어떻게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 라는 사실을 입증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사실이 될 때 과연 우리에게는 어떤 세상과 삶이 열리게 되는지를 유념해 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전통적으로 서방 교회들은 ‘동방박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던 때를 ‘주현’의 시기로 보는 반면, 동방교회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이 당신의 아들이시라고 선언했던 날을 ‘주현’하신 날로 보았습니다. ‘주현후’ 첫주의 성서일과 복음서 말씀은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바로 그 지점을 향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날이 주님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일한 운명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

    구약 본문 제2 이사야서 말씀은 ‘주현’의 의미를 풀어주는 배경이 됩니다. 이 말씀에서 유독 눈을 사로잡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고 있는 ‘호칭’입니다. 호칭만으로도 그들을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한 호칭은 ‘야곱’이라는 이름입니다. 

    속임을 당하는 세상에서 저 자신도 속이는 자가 되어서 살아야만 하는 이리 체이고 저리 체이는 서러운 삶이 ‘야곱’이라는 이름안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라는 이름은 듣기만 해도 괜시리 짠하고 안쓰러운 마음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제 아무리 세상에서 존경을 받고 성공한 누군가일지라도, 늙은 부모의 눈에는 여전히 코흘리개 아이로 보일 수 밖에는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께는 아픈 손가락 ‘야곱’일 뿐입니다.

    아마도 ‘야곱아’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너나 할 것없이 눈물이 핑 돌았을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삶, 도망자가 되어 오갈 데 없어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들어야 했던 처량한 날들, 고향을 등지고 설움 당하며 살아야했던  그 ‘야곱’은, 오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는 자신들의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채 문가에 닿지도 않았음에도 기억을 알아채곤 제 자식이 온 것 같다고 문을 열어젖히는 설명이 불가능한 어머니의 마음을 통해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동안 우리는 늘 1번, 2번, 3번 처럼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어딘가에 쓸모 있을 부품 이상의 가치를 담지 못한 채 의미없이 불리워져왔습니다. 마치 마녀에게 이름을 빼앗겨버린 불쌍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애니메이션처럼, 이름을 잃어버리고 난 이후 우린 모두 너무 외로웠고, 영혼은 지쳐 갔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온 것이냐?’는 어머니가 불러주는 제 이름 석자 때문에 왈칵하고 눈물이 쏟게 되는가 봅니다. 아마도 이름에 걸맞는 ‘나’를 되찾을 수 있는 곳, 본래 있어야 할 품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우리는 언제나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가 될 수 있게 됩니다.

     

    3

    여튼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내셨으니 이스라엘만을 위한 놀랍고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내실 겁니다. 물 가운데로 지나거나, 강을 건너고, 혹여 불 속을 걸어가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안전하게 지켜내시고, 거기에 더해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서라면 애굽이나 구스, 스바를 기꺼이 값으로 내어주시겠답니다. 어떤 희생을 치루어서라도 ‘너만은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와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이제 이스라엘은 안전하게 될 겁니다. 그나저나 무엇이 하나님께서 이토록 이스라엘 때문에 몸이 닳게 만들었을까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사랑’ 때문 (이사야 43:4)입니다. 재미난 것은, ‘야곱’(1절)이라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시작한 본문이 ‘하나님의 이름’(7절)으로 끝맺음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그를 부르는 이스라엘의 이름이야 말로, 자기 백성과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확정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름’은 나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한편, 하나님이 나를 어떤 존재로 여겨주시는 분이신지를 알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여러분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계실까요?

    ‘야곱’을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터무니 없을 만큼 맹목적이어서 설득이나 이해로 헤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믿을 수 없어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하지만 본래 ‘사랑’이란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언제나 과하고 지나친 겁니다. 그 과하고 지나친 ‘사랑’이 달콤하고, 따듯하고, 기쁨 가득한 생명으로 경험될 수 있는 길은, 오직 ! ㄴ’사랑’받고 ‘사랑’하는 관계에 참여할 때 뿐입니다.

     

    4

    서신서에서는 전염병을 옮기는 이들처럼 꺼려하고 혐오하던 사마리아 땅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사도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의 얼굴은 ‘부활’의 소식을 듣고 무덤을 향해 달려가던 그때의 감동과 기대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는 소식이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만으로도 사도들에게 이제 사마리아는 나와 같은 동료이고, 친구이고, 가족이 된 겁니다. 더럽다 생각되는 것들을 타인들은 피해가지만, 가족은 제 몸을 더럽혀서라도 기꺼이 덮어주고 닦아주는 법입니다. 그러니 사마리아를 향해 걸어갈 수 없습니다. 한 달음에 달려가야 할 만큼 마음이 뜁니다. 예수의 이름은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혐오, 차별, 신념이나 가치를 뛰어넘게 해줍니다. 그래서 그 이름은 능력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사도들은 기쁨으로 그들에게 손을 얹었습니다. 그리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마리아 땅에 성령이 임하신 겁니다. 저는 이 대목을 볼 때마다 안수와 같은 거룩한 의식이 아닌, 힘들고 지쳐있는 이를 뜨겁게 끌어안는 사랑의 장면을 떠올리곤 합니다. 혹여 부정하고 때 묻은 똑같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지는 않을까? 혹은 괜시리 피해라도 입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던 부끄러운 마음을 모두 덮어 버릴 만큼 충만한 사랑입니다. 성령은 사람들에게서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할 사랑을 잃어버리고,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을 살려내시기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손길을 내미는 곳마다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증이 되어주시고,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언해주십니다.

     

    5

    이 사실을 우리는 복음서에서도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그 순간,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임하셨습니다. 꾹꾹 참고 계셨던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터져나온 순간입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하고, 기쁜 얼굴, 보시기에 좋아 견딜 수 없이 행복해 하셨던 그 얼굴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 누가복음 3:22

     

     그 기쁨이 차고 넘쳐 우리의 시선에 닿을 만큼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랑이시고, 하나님의 웃음이신 성령이 예수님의 얼굴을 덮었으니, 성령이야 말로 온전한 하나님 사랑의 증인이신 셈입니다.

    요단강가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시던 모습과 1독서에서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얼굴이 똑같습니다. 자신의 자녀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 자신을 향하고 계신 하나님의 얼굴도 볼 수 있게 됩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깨닫는 곳에서 비로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사이의 특별한 계약관계에 있다는 사실, 그 계약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유임을 깨닫는 것이야 말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이 지극한 사랑의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고, 양육하고 계심을 알게 될 때, 비로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겁니다. 

    ‘세례’는 이렇게 내가 누구인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출발의 자리,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날이 되어줍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증하던 곳에 계셨고, 주님을 닮아 하나님 사랑으로 충만했던 이들의 곁에도 계셨던 것처럼, 불화한 세상을 평화하고 화평하게 하는 이들의 곁에도 오늘 ‘성령’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증해주시기 위함입니다.

     

    6

    우리가 주현절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묵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예수님을 향하시는 그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음을 기억해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자녀라고 하는 특별한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빚어가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늠름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잘 먹고 산다고 하면 호텔 부페나 만찬이어야 하고, 행복한 집을 얻으려면 크고 넓은 집은 있어야 하는 것이 정답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사람들은 상처받고 지쳐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것들이 없다고 해도 비루해지지 않습니다. 비록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일지라도 기꺼이 우리 식탁에 함께 해주심으로 ‘왕의 식탁’이 되게 해주시고, 초가 삼간일지라도 찾아와주셔서 왕의 처소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허황되고 거짓된 것들을 채워 배불리게 하려는 이런 세상을 꾸짖고, 누가 참으로 인간다운 길이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의 진실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세상에 떠밀려 어느새 밑둥이 뚫려버린 것처럼 허무로 내몰렸던 우리 이름을 불러주신 그 순간이야 말로 우리에게 ‘성령’이 찾아와주셨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나 보여지고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 남들이 함부로 대하고, 세상이 폄훼하는 모습을 제 모습인 것처럼 속아서는 곤란합니다. 우리 안에서 진짜 ‘나’는 누구인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감동시키시는 ‘성령’을 신뢰하십시오. 그것이 어렵다면, ‘야곱’의 이름을 불러내어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안으로 불러 모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 이름의 주인이신 분께서 우리안에서 빛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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