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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1/30 주현후 4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1. 26. 16:55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예레미야 1:4 ~ 10
    •   응송 | 시 71:1-6
    • 2독서 | 고전 13:1-13
    • 3독서 | 눅 4:21-30

     

    설교음원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주일 예배후,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

     

    설교영상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 * 주일 예배후,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

     

    James Tissot_ The Brow of the Hill near Nazareth( 1886-1896)

    제게 주어진 '길'을, 가렵니다

    1

    예레미야, 바울, 예수 그리고 시인 ‘윤동주’, 여러분들은 이분들 사이에 공통점을 찾아내실 수 있으신가요? 예레미야나 바울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성서일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임에 반해, ‘윤동주’는 일제 침략기를 살다간 ‘시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제 자신이 걷고 싶던 길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쫓으며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냈던 사람들입니다. 옳은 길, 마땅한 길이라 믿으며 길을 나섰다가도 사람들의 외면속에서 그저 나만 홀로 걷고 있는가 싶어지며 쉽게 지치고, 다른 길을 가는 이들의 안락함이 부러워서 제길을 포기하고 마는 것에 익숙한 우리와 삶의 결과 달라보입니다. 마음을 숙연하게 할 만큼 묵직한 삶의 모습이지만, 둘러보아도 쉽게 그 길을 따르는 이들의 흔적이 보이질 않으니 덩그러니 남은 그들의 걸음이 외롭고 안쓰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구나 존경하고 칭송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들의 걸음은 좌고우면함 없는 올곧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서야만 했던 ‘선택’의 자리에 서게 될 때마다 우리는 여전히 움찔하고 뒤로 물러설 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기 위해 치열하게 씨름해 보지 못한 탓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물음은, 주님만을 믿으며 살겠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둘러싼 환경과 여건이 선택을 강요할 때 마다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스스로를 향한 우리 내면의 안쓰러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1독서 본문에서 먼저 만나게 되는 인물은 예레미야입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소명’의 순간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는 쉽게 순종하려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를 채근하십니다. 어느 한쪽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팽팽한 기싸움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예레미야의 마지막 변명은 ‘나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입술이 둔하고 뻣뻣한 자’라며 하나님의 부르심앞에 버티던 모세의 모습이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애당초 하나님의 선택 자체가 그릇되었다는 말도 그렇지만, 순종함 없이 하나님께 배짱을 부리는 모습이 괘씸하기 짝이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라고 더 나을 것도 없습니다. 곧이 곧대로 주님 말씀을 따르며 산다는 것을 내심 어리석게 여긴 적도 있었고, 말씀이 가르치고 요구하는 삶을 살아낼 자신이 없어 짐짓 주저앉거나 포기한 적도 많습니다. 믿음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탄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무능함을 ‘어찌할 수 없다’는 자기 합리화의 이유로 삼은 채 말씀을 거스르며 살아왔던 우리입니다. 

     

    예레미야는 본래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을 뿐더러 분깃도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내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삶입니다. 반면에, 예언자는 백성들 뿐만 아니라 왕의 앞에서라도 바른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 말씀에 어긋남이 있는 그릇된 신앙을 질책하고 책망하는 역할을 맡았으니, 늘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찬밥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예언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겁니다. 마치 대형 교회 목회자의 자녀로 태어났음에도 오지의 선교사로 자원하는 모양새입니다. 모두들 원하는 삶의 기회를 버리고 부르심을 따라 나섰던 그 날,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말씀을 전하다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을까요? 실재로 그가 전해야 했던 예언은 사람들이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뿐이었습니다. 자신들의 패망을 말하는 그를 사람들은 싫어했고, 뺨을 때리기도 했고, 옥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주어진 길을 걷는 내내 그는 박해를 당했고 결국은 애굽으로 끌려가던 길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눈물’과 ‘비운’의 예언자라는 그의 별명이 그의 삶을 그대로 설명해주는 셈입니다. 

    주님 밖에는 희망이 없으니, 악한 이들과 잔인한 폭력배들의 손으로부터 건져달라’ (4~5)는 시편71의 말씀이 마치 고난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야만 했던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향해 애처롭게 탄원하는 소리로 들립니다.

     

    3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불러내실 때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이미 그를 예언자로 구별해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목적인 ‘소명’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나를 모태로부터 따로 세우시고 은혜로 불러 주셨습니다’  ( 갈 1:15 )

     

    서신서의 기록자인 바울도 이와 동일한 고백을 했을 만큼, 성경안에는 이런 표현이 곳곳에 들어있습니다. 실재로 어머니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을 모르거나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음에도, 우리는 기도할 때 뿐만 아니라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거나 낳으셨다고 말하곤 합니다. 대체 이 고백안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걸까요? 혹시 예레미야나 바울이 경험했다고 하는 소명이 자신들의 착각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고백은 허무하고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자기 존재의 근원과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라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뢰와 믿음을 담고 있는 고백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선한 손이 내 인생과 삶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확신이며, 늘 말씀드려왔던 하나님 의존적 삶입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 고백을 자신의 삶으로 경험하고 강화해가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니, 하나님께서 내 삶을 지켜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까? 

     

    4

    그러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며 산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르며 산다는 것이 실재로 얼마나 치열하고 어려운 문제인지는 굳이 설명드리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실재로 우리 각자는 마음과 달리, 현실에서 두려움과 무서움을 직면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연약함 때문에 불안할 때도 있습니다. 말씀을 따르며 살겠다고 결단해본 사람만 경험할 수 있는 아픔이고 좌절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되는대로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계속 도망치려 했던 겁니다. 

    모세의 항변에도 끊임없이 그를 설득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와 같다는 그의 우매함은 풍성한 하나님의 지식으로,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두려움은 용기로,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에 대한 미움은 사랑으로, 과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회의는 믿음으로 바꾸어 내시겠다고 장담해주셨습니다. 

    서신서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지금은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모두 어린 아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부분만 알고 있고, 희미하게만 알고 있는 우리이지만, 이제 곧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처럼 온전하게 알게 될 것이라는 것, 하나님의 다름이 우리를 세우고 이루어내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내 능력은, 내 형편은 이렇다고 원망하거나 불평하고, 나는 사랑할 수 없고, 나는 믿을 수 없고, 나는 해낼 수 없고, 나는 변할 수 없다고 자신의 무능을 포기의 이유로 삼으려고 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단호한 답변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 뿐입니다. 

    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무시하고, 너는 그럴 능력이 없다는 비아냥뿐이던 세상의 언어와 너무나 다른 말씀입니다. 포기하시지 않고 마침내 예레미야의 반항을 꺾어내시는 모습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에는 관심이 없으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늘 함께 해주시겠다고 하시니 우리는 능력이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입에 맡겨주셨으니 할 말을 찾느라 당황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봄날의 햇볕처럼 따듯하기만 합니다. 마치 사랑의 이유가 ‘무엇’ 때문일 수 없고, ‘너’이기 때문이라는 간절함인 것처럼, 이제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태’에서부터 택하셨던 이유가 소명을 감당할 능력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내 존재를 감싸고,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이, 말씀에 응답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겁니다.

     

    5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을 쫓으며 살아간다고 해서 앞길에 찬란하게 빛나는 일만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정말 하나님만 붙들지 않고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울 수 있고, 하나님께로부터만 위로받을 수 있는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예레미야나 바울의 삶에서 엿보았던 이런 서러움과 안쓰러움이 예수님의 삶에는 고스란히 베어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신 주님을 고향 사람들마져 외면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자신들과 너무 달라서 박해했다면, 이들은 예수님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이 지나가시면 여기 저기에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수군 거립니다. ‘우리와 다를 바가 없으니 뭐 잘 날 것이 있겠느냐’는 불편한 마음입니다. 어쩌면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수군거렸을지도 모릅니다.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태생부터 부정한 존재라는 비아냥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주님도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삐뚫어진 마음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벼랑 끝에 내몰아 주님을 떨어트려 죽이려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주님께서 자신들안에 있는 불편한 진실을 건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인인 사렙다 과부와 아람 장군인 나아만을 비유삼아 이스라엘이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거절한다면 구원의 빛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갈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때문입니다. 이방인도 하나님의 자녀이니, 이 일은 하나님께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던 그들 자신입니다. 스스로는 결코 버려질 수도 없고 버려져서도 않된다는 오만한 마음, 말씀대로 살지는 않으면서도 구원을 이야기하고, 증오가 가득하면서도 자비와 은혜를 말하는 외식한 신앙의 모습을 이방인과 견주어 주님이 들춰냈으니 견딜 수가 없던 겁니다.

     

    고향사람들에 의한 절체 절명의 순간을 넘긴 이후, 30절 말씀은 주님께서 홀연히 그들을 떠나가셨다고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떠나가셨다’는 이 대목을 자신의 길을 가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 마져 당신의 말씀을 외면하고, 살해의 위협에 내몰린 그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나는 하늘을 향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이 선명하게 읽혀지는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환란과 역경, 세상이 모두 비난하고 위협하는 순간에도 멈추거나 뒤돌아 가지 않고 오히려 그런 일에는 무심한 듯 하나님을 향해 올곧게 나아가시는 주님의 걸음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했던 시인 ‘윤동주’의 맑은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6

    오늘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셨고, 저주받은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신 삶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또한 모두 이 시대의 예레미야, 바울, 윤동주이며, 세상을 거스르며 나아가신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라는 ‘궁극적 사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오해나 모함, 조롱이나 핍박이라는 고난을 당할 수 있고, 바울처럼 박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배척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을 따라 우리도 제게 주어진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면, 고난은 우리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가게 하는 ‘믿음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아직도 어떻게 하면 모세나 예레미야, 바울이나 예수님처럼 ‘소명’을 경험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우리 영혼에 하나님 말씀이 충만해 질 수 있을까 궁금해하고 계신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한다거나 결단하는 수준의 내 노력이나 열심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예레미야도 바울도 아닙니다. 그러니 그들의 하나님 경험에 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성령의 조명을 따라 예레미야의 소명이 무엇이었는지, 바울에게 주어진 말씀의 이끄심이 무엇이었는지, 주님을 십자가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의지가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는 수준을 따라갈 수 있을 뿐입니다.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 앞에 섰던 그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믿음으로 살아가 보겠다고 시작한 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제 자신에게 주어진 길, 자신에게 드러난 길을 따라갈 때, ‘성령’께서 넘치는 주님의 위로와 사랑을 공급해주실 겁니다. 그때 그 어느 날, 비로서 우리는 각자의 영적인 수준에 따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노래하던 윤동주처럼, 부르심에 응답하였던 예레미야나 바울처럼 하늘의 은총을 갈망하며 의연하게 주어진 길을 나섰던 주님을 따라 오늘을 살아갑시다. 택하신 그분이, 불러내신 그분이, 우리를 찾아와 주신 그분이, 이 걸음을 지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서시_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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