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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3 주현후 6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2. 9. 18:43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예레미야 17:5 ~ 10
- 응송 | 시편 1
- 2독서 | 고린도전서 15:12~20
- 3독서 | 누가복음 6:17~26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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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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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는, 기뻐하고 뛰놀아라
1
지난 주 말씀의 핵심 주제는 ‘나를 만나주시는 주님’이었습니다. 오늘 성서일의 주제는 ‘주님이 찾아오셨음에도, 떠나버린 사람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떠날 수가 있을까?’ 그런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으실 겁니다. 누군가 주님을 떠났다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내심, 그런 사람들은 출발부터 우리와는 달랐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오늘 말씀속에 등장하는 ‘쓴 소리’를 들어야 했던 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삶의 자리’에 있다가 갈라진 이들이었습니다. 큰 소리는 치고 있지만 언제고 우리 마음도 진리의 길에서 떠나, 그들의 모습을 따라가게 될른지 모를 일 입니다.₩
떠나는 길은 ‘지향’이 분명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소망이 있는 건강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보다 먼저 마음이 떠나는 곳에는, ‘없어도 그만’이라는 우리 마음은 아쉬움과 억울함이라는 내 마음으로부터의 도망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떠날 때도 그랬고, 주님께로부터 떠나고 싶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 없이 살아도 그만이라고 여기고 떠난 뒤, 정작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떠남의 길 뒤에도 여전히 삶은 허무하고 더 나아질 것도 없습니다.
2
하나님을 믿어도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실망하며 떠나는 이들을 향해, 1독서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오히려 ‘좋은 일이 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마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해주셨느냐?고 따져묻고, 예수 믿고 더 나아진 것 하나도 없다는 불평을 이유 삼는 우리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끌고 오시는 일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이미 내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지나고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죽을 것처럼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면서도, 반대로 하나님 없이도 잘 될것 같다는 세상의 이야기나 자신의 생각에게 터무니 없이 잘 속으며 살아왔습니다.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도, 마음의 바램과는 달리 오히려 늘 해서는 않될 것만 한다고 한탄하던 바울처럼 우리의 마음은 늘 진리 아닌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 아닌 것을 의지하려는데 익숙합니다. 예레미야의 말처럼 우리 마음이 만물보다 심히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없으면 죽을 것 같은 마음에 내몰렸다가도 막상 손에 쥐고보면 허무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던 것처럼, 옳은 것이 무엇인지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때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면을 뒤집어 쓰고 스스로를 감추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도 위장하면서 아닌 척하거나 반대로 그런 척할 뿐입니다.
이미 병들고 망가진 마음이기에, 스스로 깨닫거나 제 힘으로 옳음을 선택하며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살피고 지켜주시는 주님께 이어져있어야 하는 겁니다. (10)
하나님께 기대어 있게 되면, 제일 먼저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비로서 ‘좋은 일이 오고 있음’을 엿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런 눈으로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되면 기대와 소망으로 생의 걸음을 채우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시편 기자가 말했던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정해 주시는 ‘복’있는 사람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늘 스스로를 돌아봐야합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하나님 백성으로 회중속에 속해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 없이 살아도 그만이라는 마음을 품을 만큼 오만해져 이탈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3
‘부활’에 관한 오늘 서신서의 전반적인 내용은 전체 본문과의 연결성이 떨어집니다. 언뜻 읽기가 쉽지 않지만, 지금 바울이 어떤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 있는지를 염두하면 성서일과 본문에 배정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부활’ 신앙에서 멀어져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영지주의의 강력한 도전앞에 서 있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서마다 이들에 대한 언급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그들과의 논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왜 그토록 그들을 극렬하게 비난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따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주님의 ‘부활’도 인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새 그들의 영향을 받아 교회안에도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에 물들어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복음을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쉽게 이단에 넘어지게 되었는지, 바울의 마음은 타들어가는 듯 싶었을 겁니다.
그들이 이렇게 영지주의에 넘어지게 된 것은, 그 만큼 현실의 삶, 육체를 입고 살아가야하는 삶이 고되고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런 삶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싶으니 절망할 수 밖에 없던 겁니다. 현새에는 이루어질 수 없다 싶으니, 자꾸만 내세에만 관심이 끌리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삶이 고된 것은 그들 뿐만이 아닙니다. 모두가 힘들고 지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실족하게 된 진짜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절망을 스스로 선택한 탓에 있습니다. 악인의 꾀를 선택했던 것이고, 죄인에 길에 들어섰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결과입니다.
4
수 많은 이들이 몰려들어왔었지만,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들은 (20) 다름 아닌 제자들입니다. 병이 낫고자,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찾아온 군중들은 자신의 문제만 해결되면 주님을 버려두고 다시 저들의 삶으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눈을 들고 곁을 둘러보자 제자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전의 삶에서 돌이켜 외롭고 고독한 주님의 길을 따르려고 서 있는 그들이 기특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을 격려하시고 가르치시기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산위의 가르침’이라 불리우는 마태복음과 평행이 되는 본문이기도 하지만, 누가복음은 그 배경을 ‘평지’라고 소개합니다. 마태복음과의 차이는 더 많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마태복음과 달리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한정이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에 관한 말씀만 기록한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는 곧장 ‘화’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여튼 주님의 이 말씀 때문에, 누구라도 더 이상 자신의 삶에 임한 ‘화’를 ‘화’가 아닌 것처럼 속이며 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화와 복을 명백하게 구분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복’과 ‘화’를 가늠하는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복’에 관한 가르침의 결말은, 비록 세상에서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피 울게 될 일이 있고, 사람들이 미워하고 배척하고 내친다고 하더라도, 그런 날에는 하늘에서 받을 상이 있는 이 답게 ‘기뻐하고 뛰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을 만나게 될 때마다 오히려 징조와 표징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서 이런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뿐더러, 실재로 많은 경우 속절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23절 후반절 말씀을 덧붙이신 까닭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 누가복음 6:23b
예언자란 본래 세상의 법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을,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공급해주실 복을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불편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미워했습니다. 사실 하나님 말씀은 환영받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주님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도 가난하거나 굶주리고 슬피우는 이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가난하고 싶지 않고, 굶주리거나 슬퍼할 일은 더더욱 없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악인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의 형통함을 부러워했던 것처럼,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연약함은 늘 이런 식으로 드러나고 맙니다.
5
‘화’가 임할 대상을 ‘부자들’이라고 분명히 언급하셨지만, 부자는 단순히 돈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만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난 받는 부자란? 정작 중요하지 않은 것들, 제속에 하나님 아닌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이들입니다. 앞서 수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내어쫓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었습니다. 어찌보면 이들도 부자들입니다. 제 몸이 아플 때만 해도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께 손이라도 대어 보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병을 고칠 능력이 그분안에서 넘쳐나오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이들에게도 주님의 말씀은 여전히 불편할 뿐입니다. 아프고, 배고프고, 가난하고, 억울한 일 투성인 그들에게 오히려 ‘복’이 있다는 말씀에 오히려 화를 내고 돌아선 이들도 있었을 겁니다. 따지고보면 주님을 찾아나선 이유도 자신들 앞에서 거들먹 거리던 다른 이들처럼 건강해지고, 부유해지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입었다고 해도 자기 입에 쓰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일입니다. 주님께 은혜를 입었던 이 사람들이 결국 주님을 십자가로 내 몰았던 폭도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내 만족과 평안을 위해 예언자 박해하는 것 쯤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6
예언자 중에는 거짓 예언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인지는 결국 그 예언이 성취되는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의 성취 이전에도 거짓 예언자를 가늠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이 있기는 합니다. 자신의 말속에,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빼고도 그럴 듯하게 말하고, 그럴 듯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서 칭찬받는 사람은 거짓예언자일 위험이 큽니다. 자기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주목하고 있는 사람, 하나님 의존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늘 자신의 말이나 삶 속에 하나님을 담아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삶에서 하나님을 빼버리고 나면 결국은 절대화된 인간의 흉한 몰골만 남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 앞에 와서 쓴 소리를 하는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참된 예언자는 내 귀에 거슬리는 진리의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되신 예언자이신 예수님은 결국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으셨던 겁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듣기를 즐겨하고 있습니까?
‘복’있는 사람과 ‘화’가 임할 사람들 구분하고는 계시지만, 우리는 복받을 이들이나 화를 당할 사람들이 사실은 모두 주님(말씀)을 만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구약에서 저주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았지만 마음이 멀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시편기자가 말한 ‘악인’도 주님의 백성에 속했으나 멀어져버린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떨어져 나간 서신서의 수신자들도 교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매서운 가르침을 받고 있는 복음서의 청중들 역시 제자들입니다.
주님을 떠난 사람들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그들은 배부른 세상이 자꾸만 부러워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에 자꾸만 지쳐가던 우리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복’에 관한 말씀에는 주목하면서도, ‘화’에 관한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지옥은 없다는 합리적 생각에 지배되어가면서 주님의 말씀은 가볍게 무시하면서도, 이제는 오히려 사람들이나 세상의 협박을 더 무서워하는 비겁한 이들이 되고 만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큰 은혜를 입고도 하늘의 복에서 떨어져나간 사람들속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이 걸음안에 내가 지켜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찾아가 주시지 않으면, 바라봐 주시지 않으면, 당신의 손으로 지켜주시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던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주님의 은혜 덕분이었으니, 앞으로 나아갈 걸음도 온전히, 그리고 더욱 주님의 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이 것을 아는 사람들은 주님 말씀앞에서 겸손합니다. 고난이 닥쳐오고, 지금은 먹고 살기 힘들고, 두려워도 약속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입에 넣고 씹고 삼키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삶을 지키고 견디게 하는 힘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7
비록 기쁜 일은 없어도 큰 소리로 웃으면, 좋은 일이 있다 착각한 우리 뇌가 기쁨을 촉진시키는 호르몬을 분비한다고 합니다. 기뻐할 어떤 일이 있거나 얻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기뻐하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기쁨이 채워지고, 행복하기로 결단하는 순간부터 행복해질 수 있는 겁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는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 누가복음 6:23 a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복된 이유는 더위도 없고, 가뭄도 없어서가 아닙니다. 극심한 가뭄과 뙤약볕에도 뿌리를 적시는 시내가 나무의 잎을 푸르게 가꾸고, 열매를 맺게 해주기 때문에 복된 겁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과 여건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고, 그럴 수록 마음과 영혼을 모든 좋은 것 주시는 주님께로 집중하십시오. 나무가 복되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마르지 않는 맑은 냇물이 나무를 복되게 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십시오. 하늘의 복은 그렇게 받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십시오. 한 주간, 가뭄처럼 갈증나고, 힘겹고 어려운 일, 핍박과 환란이 찾아오더라도 영원한 생수되시는 주님을 찬미하며 기뻐하고 뛰어놀 듯 자유하십시오. 예수님께로부터 나온 말씀의 능력이, 황야에 자라는 가시덤불 같았던 우리 눈(예레미야 17:6)을 밝혀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있는 모든 좋은 일을 보게 해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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