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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주현후 7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2. 16. 19:43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창세기 45:3-11, 15
- 응송 | 시편 37:1-11, 39-40
- 2독서 | 고린도전서 15:35-38, 42-50
- 3독서 | 누가복음 6: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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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어 주시는, 하나님
1.
생명의 길로 나아가도록 우리 모두를 어둠으로부터 불러내 주신 예수님의 발걸음을 좇아가는 ‘주현절’기간입니다. 이제 다음 주일 주현절기를 모두 지나고나면 맞게 될 사순절은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죽음으로 내몰았던 치명적인 악의 힘을 기억하라고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어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제 힘에 굴복하고 편승하는 그 만큼 어두운 이들을 규합해 주님과 그 길을 따르는 이들을 핍박할 것입니다. 신앙의 삶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부터 우리 삶은 말그대로 늘 치열한 빛과 어둠의 경계에 서게 됩니다. 어둠의 힘은 폭력적인 이빨을 드러내고 으름짱을 놓지만, 오히려 유혹하거나 기만하는 일은 훨씬 능합니다. 빛의 길이 마치 어둠인 것처럼 거짓으로 우리 눈을 가리울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할 허무처럼 들리게도 만들고, 주님의 말씀이나 명령을 귀찮고 피곤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제풀에 넘어지게 만들려는 나쁜 의도입니다. 그래서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2.
오늘 복음서 말씀은 쉽게 ‘아멘’으로 응답하기에 어려운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은 판국에, 나를 함부로 대하고 아프게 하고 억울하게 만드는 존재인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니, 이런 말씀을 계속 듣다 보면 대체 왜? 나만 손해를 보아야 하고, 왜? 내가 먼저 용서해야하는지 부아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습니다. 옳은 말씀이 틀림이 없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데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마치 홍해가 갈라지거나,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일보다 불가능한 기적일 뿐입니다. 우리는 짐짓 ‘나는 그리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외면해 왔습니다. 늘 그래왔다는 경험 탓에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이 억울했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마치 손해보는 것처럼 자존심이 상하고 싫어서 그렇게 돌아섰던 겁니다. 믿음은 반드시 기다림이 있어야 하고 말씀은 인내함으로 살아내는 것임에도, ‘그렇게 하기 싫다’는 내 설익은 마음은 늘 하나님 말씀을 거절하고, 말씀의 성취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리곤 내 싫은 마음을 감추기 위해, 그래도 괜찮을 만한, 그럴 수 있을 법한 표징과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신앙의 퇴행적 습관이 되고 말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십자가로 우리를 이끌고 가는데, 우리 신앙의 동기는 자꾸만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곳에서 시작하려고만 합니다.
3.
창세기 본문은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고난을 당하던 주인공이 결국은 복받고 해피엔딩을 맞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닌, 절망속에 깨어져버렸던 한 가정에게 찾아온 놀라운 회복의 이야기입니다. 살해 당할 위험을 면하기는 했지만 결국 인신매매를 당하는 잔혹하고 끔찍한 일이 요셉에게 일어났습니다. 놀랍게도 형제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고, 지극히 평범한 한 가정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누구라도 가족이 아닌 철천지 원수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한번 깨어진 가족관계가 회복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피해자는 평생을 복수를 다짐하며 증오와 분노를 삶에 채워가게 될 것이고, 가해자들은 씻어낼 수 없는 죄의 무게에 시달리며 각자의 삶을 불행으로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신을 죽음에 내몰았던 원수같던 형들이 지금 요셉의 발 밑에 엎드려있습니다. 살려달라는 도움을 구하러 온 형들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셈입니다. 20년전 그 때와는 달리 온갖 고초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겪고 난 이후 애굽의 재상까지 된 요셉에게는 충분히 그럴만한 힘도 권력도 있습니다. 어쩌면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이려는 하늘이 주신 기회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저 한마디만 하면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형들에게 복수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을 끌어안고, 깨어졌던 관계를 회복시키는 몫을 감당해냅니다. 김이 새고 말았다고 해야할까요? 무력한 모습으로 자신앞에 엎드려져있는 형들을 보면서 받은 만큼만이라도 돌려주고 싶은 생각을 멈추고, 복수와 원수갚음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지금도 궁금합니다.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요?
4.
결론은 하나님께서 요셉의 마음을 바꾸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 마음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외에는 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동안 요셉이 지나와야만 했던 고난의 시간을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요셉은 아무렇지도 않게 형들이 결국은 제 발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고 자랑하며 꿈이야기를 할 만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제 잘난대로의 철없는 아이였습니다. 부모의 편애를 받아왔던 탓입니다. 시련의 날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평생을 그렇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못난 사람으로 굳어져갔을 겁니다. 그러나 종으로 팔려가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는 시간을 통과해오면서 자신 밖에 모르던 요셉은 비로서 변화되어져갔습니다. 사실 고통과 상처, 아픔의 시간을 지날 때 누구나 자신을 성찰하고 더 나은 나로 길어 올릴 소중한 기회로 채워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는 고통속에서 원망과 불평의 독을 뿜어내고,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곁에 있는 이들이 삶도 파괴하고 망가트리면서 삶을 소비하고 맙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과 생각을 위로해주시고 붙잡아 주신 덕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겁니다.
5.
요셉이라고 화도 안나고 분노하지도 않았을리 없습니다. 몇해를 눈물과 한숨과 억울함을 삭이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날 느닷없이 어릴적 꾸었던 꿈 생각이 났습니다. 그야말로 잊고 있었던 자신의 꿈이었고, 또한 자신을 향하였던 하나님의 꿈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둘러보면 그저 절망 뿐이었음에도, 이런 나를 향해 하나님께서 꿈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통은 상황에 체이고, 처지에 삼키워지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는 참으로 복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부터 상황을 들여다보는 요셉의 눈이 바뀌게 됩니다. 한숨과 좌절, 형제들을 향한 복수심에 이글거리던 눈에서 점점 독기가 사라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맑은 기운이 눈 빛에 감돌기 시작합니다. 보디발의 집에 팔려간 이후에도, 뿐만 아니라 정당하지 않은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었을 때에도 요셉은 자신이 그런 처지에 홀로 버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으로 팔려간 곳에서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고(창 39:2), 생면부지 살아날 희망조차 보이지 않던 감옥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고 계셨다(창21,23)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고, 아무리 엉망이 되어도, ‘지금, 여기’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6.
따지고보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트린 것도 그 놈의 꿈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왔었는데, 마침내 내일이 없던 그의 인생을 희망의 날로 채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꿈’을 통해서였습니다. 하필이면 그가 감옥에 갇혀 있던 그 때, 함께 감옥에 있던 관원장들이 꿈을 꾸어서 요셉이 해몽을 해주었고, 그가 감옥에 있던 그 때 ‘바로’가 아무도 풀수 없는 꿈을 꾸었기에, 그의 꿈을 풀이해줄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재상이 되는 꿈만 같은 일까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비로서 그의 인생을 찾아왔던 ‘꿈’에 어떤 일이 시작되고 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부모님 밑에서 사랑받던 때도, 보디발의 집에서 인정받고 있던 때도 아닌, 유독 인생의 가장 밑바닥 같던 감옥에 갇혀있던 그 때 였을까요? 제 자신만을 귀히 여기던 마음이 벗겨지고, 분노와 증오가 녹아내리고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온유하고 평화한 이가 되었으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제야 요셉이 모든 준비가 다 끝났던 것입니다. 이제 20년전의 상황과는 완전히 반대의 입장이 되어 형들을 마주하게 된 요셉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요셉입니다!’ | 창 45:3a
요셉의 이 한마디에 요셉 자신 뿐만 아니라, 형들이나 우리들도 모두 20년전 그 우물가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뿔싸! 형들은 ‘이제는 정말 죽었구나’ 싶었을 겁니다. 아무리 덮으려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던 자신들의 죄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도망치듯 살아왔었는데,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게 된 겁니다. 복수라는 이름의 정의가 자신들을 찾아온 셈입니다.
7.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 창 45:5b
요셉은 마침내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이 지나와야만 했던 잔인하고 끔찍했던 시간들을 자신을 변화시키고, 이 가정을 회복시켜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공들여 오신 소중한 시간들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아담 이후에 인류 역사안에서 일어난 동생을 죽이고, 자녀를 죽이는 끔찍하고 흉악한 죄의 상처들과 그 상처로 인해 벌어진 하나님과의 사이가 화해되는 일을, 하나님은 포기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해주셨던 언약과 약속들, 그리고 요셉을 통해 보게된 화해의 역사를 하나님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시키실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시련을 통과할 때야 비로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직면할 수 있고, 그 때가 되어야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시련의 시간을 한숨을 내쉬거나 분을 품으며 소비해서는 않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어떤 고난은 쉽사리 원인이나 이유가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고난은 도무지 이유 조차 알 수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더욱이 시련의 종류나 상황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고난’ 때문에 삶이 허물어지고 마는 선택을 할 것인지, 아니면 요셉처럼 ‘존재’가 변화되는 길로 선택을 할 것인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선택권입니다.
요셉을 통해서도 본 것처럼, 온갖 모략이나 배신, 악행과 폭력, 암투와 음모, 어떤 어둠의 힘으로도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주님을 믿고 있으니 이제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8.
다시 복음서의 첫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원수를 사랑하라’시던 주님은 ‘원수를 선대하라(27)’,’원수를 축복하라(28a)’,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28b)’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까지 상세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반드시 그리하라는 뜻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악을 쓰면서 할 수 없는 미션을 해내라고 윽박지르시는 것은 더욱이 아닙니다. 용서와 사랑은 오히려 원수 앞에서 위축되거나 작아지고 사로잡히지 않고, 악에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가장 강력한 저항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사실은 원수를 위함이 아닌,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에 참여하며 행동하는 하나님 자녀의 자유한 삶으로 초대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과거의 행동을 기준삼고는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타인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평화까지도 깨트리곤 합니다. 내편과 우리 편으로 사람을 가르고는 비판하고 정죄하고 배제시키기도 합니다.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고, 나 자신은 전혀 용서가 필요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시무사한 결정을 내릴 때도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원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새로운 관계를 명령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원수도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초대하신 겁니다.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십시오. 여전히 우리는 증오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를 사용하셔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하게 하시는 주님의 일을 이루어 내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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