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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7 주현절 후 8주 변화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2. 23. 15:10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출애굽기 34:29~35
- 응송 | 시편 99
- 2독서 | 고린도후서 3:12~4:2
- 3독서 | 누가복음 9:28~36, (37~43)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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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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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영광, 우리의 소망
1
오늘은 주현절의 마지막 주일이며 변화주일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이 주간 우리는 복음서의 내용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변화산에서 예수께서 거룩한 영광의 빛을 입으셨던 사건을 기념하고 주목하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오늘을 지나 이제 돌아오는 재의 수요일로부터 사순절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염두해두어야만 합니다.
빛은 어둠이 드리워진 곳에서 존재를 드러내게 되는 것처럼, 주현절 기간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셨던 곳은 영광과 칭송을 받는 곳이 아닌 시대와 상황에 억눌려 깨어지고 상해 고통받는 이들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당신께서 향해야하는 목적지가 결국 십자가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겪으실 수난을 제자들에게 예고해주셨고, 오늘 본문은 두번에 걸친 수난 예고의 사이에 끼어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을 대할 때는 반드시 ‘십자가’로 향하는 길을 염두하고 읽어야만 합니다.
2
본문에 담겨있는 두 가지 중, 첫번째 이야기는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셋을 데리고 산 위에 오르신 일에 관한 것입니다. 왜 이들 셋을 택하셨는지에 대한 이유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제자공동체안에서 유력한 이들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애당초 주님께서는 사람을 구분하거나 차별하시지 않는 분이시라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과 함께 있어야했을 만큼 중차대한 상황에 처해계셨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누가는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여드레쯤 되어서’ (28절)라는 설명으로 본문을 시작했습니다. 왜 하고 많은 날들 중에 팔일 일까요? 칠일은 통상 안식일 즉 하나님의 첫 창조가 완성된 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지난 첫날인 팔일은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부활’의 상징입니다. 산 위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창조를 엿보게 해주는 장치인 셈입니다.
기도하시던 주님의 얼굴이 변하고 옷에서 빛이나기 시작했고 한순간 모세와 엘리야가 찾아와 주님과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던 불세출의 위대한 선지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어리석은 제자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해 졸고있다가 그들이 떠나가기 직전에야 겨우 잠에서 깨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겟세마네에 오르셨던 그 밤에도 이들은 주님과 함께 깨어있지 못하고 결국 잠들었습니다. 다행히 오늘은 너무 늦지 않게 잠을 깰 수 있었던 덕분에 영광스러운 장면을 목격한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도의 삶이란, 기도의 영성안에서 늘 깨어있어야 함을 일깨워주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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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었을 때 눈 앞에 펼쳐졌던 광경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도 않되었을 겁니다. 얼마나 황홀한 영광이었든지 바라만 보던 베드로가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나섰습니다. 영원히 이곳에 살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분위기에 사로잡혀 내뱉은 말일 뿐입니다.
따지고본다면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에게 이 땅의 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지금 그는 주님을 모세나 엘리야와 비슷한 수준의 존재로 여기는 어리석은 말을 내뱉은 겁니다. 여전히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오해하고 있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사실 우리도 스스로는 알지도 못하면서 큰 소리를 치곤 합니다. 때로는 마치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리고 있는 것처럼 아는 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섣부른 우리의 ‘척’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결국 제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신앙과 삶을 힘겹게 만들어 놓을 때도 많습니다. 이런 우리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것 같은 음성이 하늘로부터 울려퍼졌습니다. 빽빽하게 쌓인 구름 사이를 뚫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누가복음 9:35
그렇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 요구나 주장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그분께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마땅합니다.
4
예수님의 얼굴이 변하고 옷이 광채에 휩쌓여 희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곧 닥쳐올 십자가 사건을 염두하고 읽게되면, 이 빛은 죽음조차 덮을 수 없는 주님안에 있는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의 빛입니다. 일상적이지 않은 이런 경이로운 모습을 보게 된다면 누구라도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실재로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 대단히 매력을 느낄 뿐만 아니라,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여전히 기도를 받았더니 암이 치료되었다거나, 천사의 깃털이나 금가루가 내려오는 것을 목격했다는 이들이나, 그런 이들 곁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우리는 늘 신비롭고 놀라운 이런 표징을 찾아 헤매입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난치병을 낫게 하는 신비한 명약이 있더라도 그것만 먹으면서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게다가 그런식으로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결국은 찾아오는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죽음’앞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본질적인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난치병에서 낫고자 산에 오른 사람이라면 치유할 약을 구하기 전까지는 산에서 내려올 수 없을 겁니다. 제한과 억압을 받지 않으며 죽음에서 자유한 충만한 생명은 오직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이 충만한 생명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표징을 찾아 산을 헤매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산 아래로 내려와야만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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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이 되었을 때, 예수님 일행은 모두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귀신들린 아이와 그를 데리고 온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귀신 때문에 아이가 경련을 일으키고, 거품을 물고, 거꾸러지는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산 밑에 남아있던 제자들 중 누구 하나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주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며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하겠느냐? 네 아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 누가복음 9:41b
왜 이렇게 갑작스레 책망을 하신 것인지, 마치 능력이 없음을 탓하시는 것 같은 주님의 책망이 당혹스럽습니다. '비뚫어진 세대여’라고 하신 말씀 때문에 그의 아비인지, 제자들인지, 그도 아니면 몰려들었던 모든 사람들을 향하시는 것인지도 분명치 않아 보입니다.
다만 나중에 제자들이 왜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는지를 물었을 때 답해주시는 대목을 통해 주님이 역정을 내신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답변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두군데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7장19~20에서는 ‘믿음이 적은 탓’이라고 씌여있고, 마가복음 9장28~29절에서는 ‘기도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쫓을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들을 통해 그들이 책망받은 이유가 믿음이 없었다는 것과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의 아비가 제자들을 찾아왔을 때는 주님은 이미 산위에 계셨을 때였습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은 상황에도 땀을 뻘뻘흘리며 어떻게 해서든 아이를 고쳐보려고 애를 썼던 제자들의 열심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질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어좇는 권능은 오직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인데 제자들은 지금 주님을 흉내내는 수준으로 귀신을 좇아내보겠다고 나선 겁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던 것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오히려 우리의 모든 행함과 실천은 주님을 믿는 믿음을 토대로 할 때만 의미를 가진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내어좇되 결과에 상관없이 주님께 구하고, 주님을 의지했어야만 합니다. 기도 역시 같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기도의 시간이 길고 힘을 다한다고 해도,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흉내를 내는 것으로는 곤란합니다. 주님 앞에 자신을 내세우며 제 힘으로 해보려는 것이 되어서는 더욱 않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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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역한 세대여’라는 말씀안에서,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상과 다르지 않은 제자들 때문에 속상한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주 기적을 목격하면서도 주님의 말씀과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기적을 바라는 군중들이나 산위에서 놀라운 모습에 사로잡힌 베드로 일행, 믿음이 약해 병을 고쳐 주지 못하던 제자들, 하나님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는 백성의 지도자들, 주님의 제자로 따라나섰지만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주 불신하고 마는 우리들이야 말로 ‘패역한 세대’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면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버려두고 산위에 머물기로 하시겠다고 했어도 그만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의 손을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귀신들린 아이가 기다리고, 그런 자식을 어찌해줄 수 없어 가슴이 아픈 아비들이 있는 땅, 어둠의 힘들이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고, 권세나 돈을 향한 탐욕이 사람들의 영혼을 집어삼켜버린 땅, 여전히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천박한 자본주의의 성공 쯤으로 여기고 있는 우리의 땅입니다. 주님이 계심으로 비로서 깨어져있는 것 같아 보여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이 하나님께서 주목하고 계시는 땅이 되고, 귀신에 눌린 고통 받는 사람들, 믿음이 없어 비틀거리는 우리야 말로 당신의 마음으로 품으신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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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랐다. 사람들이 모두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서 감탄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누가복음 9:34
아이가 낫는 것을 보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면에서보면 이들도 산위에서 빛나는 광채와 영광을 보았던 제자들이나,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나 우리나 주목해야할 것은 어떤 신비로운 일이 아니라 여전히 주님 뿐입니다. 산위에 영광같은 것에만 시선을 빼앗기다 보면 수난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다시금 주님은 자신이 겪으셔야할 수난 이야기를 이어가십니다. 수난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십자가’와 ‘고난’만을 생각하다가 정작 수난 이야기가 ‘부활’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를 깨우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정말이지 어느때까지 일까요? 언제가 되면 고난과 아픔, 절망속에서도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고, 언제가 되면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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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에서 일어났던 오늘 본문의 사건은 일차적으로는 첫 번 수난 예고 후에 ‘혼란과 불안’에 빠진 제자들을 ‘위로’하고, 놀라운 계시의 체험을 통해 그들의 마음에서 ‘기쁨과 용기 그리고 믿음’이 샘솟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도 제자들이 믿음과 희망을 간직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체험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죄와 죽음의 ‘노예’로 살고 있는 인류를 해방시킬 ‘구세주’이시고, 어둠 속을 살고 있는 ‘인류의 참 빛’이심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야 우리는 교회가 사순절기를 몇걸음 앞둔 오늘 이 변화산의 사건을 기념해야만 하는 ‘직접적인 의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기쁨과 용기’가 샘솟게 하고,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위로하고 격려하려는 목적입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 수난이나 죽음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부활과 승천을 바라보라는 은혜로운 초대를 받게 된 겁니다. 이 초대에 믿음으로 응답할 때만 우리는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순절의 여정’에 용기를 갖고 나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 누가복음 9:31
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주님께서 나누시던 대화는, ‘떠나가실 일’ 즉 수난 이야기의 핵심인 주님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보통 ‘죽음’을 표현할 때는 ‘분리’를 뜻하는 헬라어 ‘사나토스’ (θάνατος)를 쓰지만, 수사학적으로는 ‘엑소도스’라는 단어가 기본형입니다. ‘떠남’, ‘출발’, ‘여행의 시작’, ‘출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이제 죽음 조차도 ‘부활의 생명’을 여는 문이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엿볼 수 있게 된 이들에게는 주님의 죽음은 위로이며 소망이 됩니다. 사순절의 여정을 출발하는 우리가 붙들어야 할 믿음의 내용입니다.
혹여 순례의 길을 가다가 영광의 빛이 사라지게 되면 어떻게 할까? 내 부족함을 덮고 있던 너울이 벗겨지면 어쩌나 전전긍긍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찬란한 영광이 되어, 어둠을 밝히고 전혀 새로운 세상, 새로운 문을 여는 길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부활을 향해 나아가는 제자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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