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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6 사순절 1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3. 3. 16:32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신명기 26:1-11
# 응송 | 시편 91:1-2, 9-16
# 2독서 | 로마서 10:8b-13
# 3독서 | 누가복음 4:1-13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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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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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1.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똑같은 아침이슬이라도 독사가 먹으면 생명을 해하는 맹독이 될 수 있지만, 땅속 깊이 뿌리 내린 나무가 흡수하면 풍성한 열매로 거두게 되는 것처럼, 사순절을 맞이할 때마다 십자가를 짓누르고 있는 시퍼런 죽음도 그리스도께서 걸어 가시면 영생을 거두는 문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사순절은 온 교회가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생명을 열어젖히기 위해서 나아가셔야만 했던 ‘십자가’를 향한 여정을 나의 길로 삼고 나아가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기간 우리의 묵상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걸음을 쫓아야만 합니다. 이 순례의 여정을 여는 사순절 첫주인 오늘, 말씀이 우리를 이끌고가는 곳은 어디일까요?
오늘 주님을 만나게 되는 장소는 ‘광야’입니다. 성령께서 주님을 이곳으로 이끌고 오셨습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곳이라면,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던가 푸른 풀밭 맑은 물가 정도는 되야 합당하다 싶은데, 목적지가 ‘광야’라니 의아하기만 합니다. 이 낯설음은 ‘광야’ 라고 하면 보통은 척박한 땅이라는 이미지로만 생각하는 탓입니다. 오히려 히브리인들은 ‘광야’를 ‘미드바르’라 부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라 여겼습니다. 실망스러울 법도 한데 주님께서 기꺼이 성령의 인도를 따르셨던 것은, 그는 나를 망하거나 상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2.
하지만 당장 눈앞에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악마(마귀)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일이 이 지경이 되면 우리는 얼마나 낙담했을까요. 여튼 악마가 감당하는 역할은 사십일 동안 주님을 시험하는 일이었습니다. ‘시험하다’는 뜻의 헬라어 ‘페이라조’는 유혹하고, 시련을 겪게 하거나, 충돌질을 하고 부추긴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마귀가 노리고 있던 시험의 목적은 유혹하고 충돌질해서,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성, 즉 예수님 자신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확신을 뒤 흔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사순절의 여정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이었던 지난주 변화산 변모 사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누가복음 9:35b
주님은 어떠한 순간이라도 붙잡아야만 하는 참된 당신의 정체성에 대한 메시지를 하나님께로부터 전해들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사십일 동안 주님께서 사랑받으시는 하나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흔들고 있습니다. 마귀의 어떠한 시험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드님이셔야 하고, 주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심이 드러나야만 합니다. 광야는 이 사실을 확인하는 치열한 투쟁의 장소입니다.
그러고보면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사십일 간의 시험은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 사십년 동안 경험했던 시간과 판박이 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광야를 통과하면서는 사십년 동안이나 고생만 했다고 투덜거렸지만, 언약이 성취된 이후에 돌아보니 그때야말로 오직 하나님과만 살아가는 사귐의 시간이었고, 하늘을 버리고 이스라엘 진중으로 내려와 암닭이 병아리를 품듯 돌보시는 하나님의 한 없는 사랑과 자비를 누릴 수 있던 때였습니다. 참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광야의 매서운 바람이나 척박함처럼 삶에 찾아오는 마귀의 시험이나 시련은 과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를 경험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일깨우는 초대였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3.
사십일 동안 주님께서 마귀에게 받으셨던 시험은 다른 복음서인 마태복음에도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순서에서 차이가 있을 뿐, 시험의 내용은 동일합니다. 돌을 떡이 되게 만드는 것, 악마에게 절하라는 것,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는 세가지입니다. 오늘날로 해석하면 이것들은 모두 돈, 권력, 명예와 관련한 유혹일 뿐만 아니라, 사실 우리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우상숭배, 탐욕의 뿌리들입니다. 누구나 이 문제에 부딪칠 수 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지나왔나 싶어도 끊임없이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삶을 몰아부치는 강렬하고 치명적인 유혹앞에서 비틀거리고 맙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마귀의 두번째 세번째 유혹은 마태복음과 순서가 뒤바뀌어 있지만, 돌을 떡이 되게 해보라는 유혹이 첫번째인 것은 동일합니다. 어쩌면 그 만큼 먹고 사는 문제, 돈의 힘이라는 것이 우리들 삶에 얼마나 강력하고 치명적인 문제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제 아무리 거룩하고 그럴듯 해 보여도,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우리 삶은 너무 쉽게 비굴해지고 맙니다. 순서가 뒤바뀌어있다고 해서 이어지는 유혹들이 가볍다는 것은 아닙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싶으면 심연의 깊은 곳에서부터 고개를 드니, 나와는 관계 없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주님께서 어떻게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는지를 배우고 또한 배운 바 대로 살아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4.
두번째 시험은 마귀는 자신에게 절만 하면 세계 모든 나라를 주겠다고 유혹입니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또 그 무엇도 주님의 것 아닌 것은 없습니다. 그 사실을 마귀도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거짓 유혹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주님을 넘어트리려고 포기하지 않는 마귀의 간악함이 계속됩니다. 세번째 유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면 천사들이 그 발을 지켜줄 것이니 성전에서 뛰어보라는 도발입니다.
‘그가 천사들에게 명하셔서 네가 가는 길마다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니, 너의 발이 돌부리에 부딪히지 않게 천사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줄 것이다’ | 시편 91:11~12
마귀가 지금 시편 91:11-12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 뜨악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의해야만 합니다. 성경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뜻에 기대고 진리를 전하는 사람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 성경 말씀을 언급했지만 이것은 교묘한 왜곡입니다. 시편의 말씀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이 누리게 되는 은혜와 복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임에도, 마귀는 거꾸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들이라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할리가 없습니다. 결국 마귀가 던지는 유혹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불신앙으로 깨트리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유혹과 속임에 넘어가는 순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산산히 깨어지고 말게 됩니다.
5.
유념해서 볼 것은 마귀의 유혹에는 독특한 표현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말입니다. 이 도발의 이면에는 ‘하나님이 너를 도와주실리가 없다’는 불신앙으로 넘어지게 하려는 함정이 숨어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내가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는 마음을 건드릴 때, 가장 유혹에 취약합니다. 나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다 싶을 때 분노하고, 다른 사람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 싶은 유혹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래서 자아의 인정과 용납만을 추구하다보면, 자칫 욕망으로 치닿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주님이 ‘내가 병자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려낸 사람’이라고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빼앗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시험이나 유혹앞에서나 두려움과 염려를 대할 때도 자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시선을 놓치곤 합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만 보는 때야말로 우리가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귀의 모든 유혹앞에서 ‘성경에 이르기를…’ 이라는 한 말씀에 자신을 붙들어 매셨습니다. 이 한 말씀안에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시할 수 없다는 단호한 주님의 의지가 오롯하게 드러나며, 십자가를 피하는 권력의 길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님께서 얼마나 소중히 여기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모든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께만 인정해드릴 만큼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사순절기에 이른 우리가 돌아보아야 하고, 또 돌아와야할 마땅한 신앙의 자리입니다.
6.
결국 사십일 간에 걸친 자신의 유혹이 실패했음을 깨달은 악마는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13절). 그런데 패배를 인정하고 떠난 것이 아니라 ‘어느 때가 되기까지’ 만 도망친 겁니다. 다음에 좋은 기회가 올때를 노리면서 잠시 동안 그 자리만 떠났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악마는 언제나 좋은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기회를 노리는 악마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마음과 영혼을 늘 진리의 말씀위에 닻을 내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께 그러했듯, 악마의 유혹과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삶의 선택과 결정권을 지닌 하나님이 되어 보라’는 시대의 유혹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지게 만들려는 달콤한 속임일 뿐입니다. 그 유혹에 사로잡히는 순간, 끝을 알 수 없는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히게 되거나, 아니면 하늘끝까지 닿으려는 교만함의 종이 되고 됩니다.
그럴 때일 수록 사도 바울의 외침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바울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롬10:10)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움’를 얻게 된다는 말이나, ‘구원’은 동의어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에 더해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씀을 덧붙인 셈입니다. 제발이지 주님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삶에서 시인하며 누리며 살라는 외침입니다.
그 동안 일상에서 우리는 어떤 언어를 입에 담고 살아왔습니까? 예배의 자리와 일상의 자리에서 우리 입술의 고백은 일치하고 있었습니까? 예배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님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혹 삶에서는 돈이나 명예, 권력이 인생의 주인인 것처럼 여기고, 덧없는 악마의 유혹앞에 입술의 고백을 지켜오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습니까?
적어도 이 사순절 기간만큼은 달콤하리 만큼 마음을 어지럽히는 소리에 귀를 닫고, 부산하던 걸음은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 광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일상의 삶을 구원해 내고, 바른 신앙의 고백을 회복하기 위해서 마음과 영혼을 진리의 말씀으로 말갛게 닦아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구원해내셨는지를 기억하고 감사하라는 모세의 설교처럼, 세례를 받을 때 언약했던 우리의 신앙고백을 기억하면서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할 수 있는대로 힘을 다해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더 깊은 친교 속으로 들어가는 영적 순례의 여정으로 걸음을 옮겨봅시다.
‘사순절’은 죄에 물들어 하나님을 떠나고, 유혹으로인해 가야할 길에서 어긋나있던 영혼을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가’ 치유받고, 생명의 길 위에 있게 하고자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초대의 계절임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자녀라면,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따르듯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야 합니다. 마귀의 시험을 능히 무너트리신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마음으로 믿었던 주님을 제 자신의 삶속에서 입으로 고백해내는 구원의 누림이 있는 사순절기간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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