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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3/27 사순절 제4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3. 23. 11:27

    성서일과 본문

    1독서 | 여호수아 5:9-12
      
    응송 | 시편 32
    2
    독서 | 고린도후서 5:16-21
    3
    독서 | 누가 15:1-3, 11b-32

     

    설교음원

    http://naver.me/GSgEygDK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sBBj7BbQnDw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Return of the Prodigal Son 렘브란트1663 - 1665

     

    결코, 그리할 수 없다는 이들에게

     

    1.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닿았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약속의 땅을 찾아 헤매이던 광야 40년 세월의 종언을 알리는 ‘길갈’에 진을 쳤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지만,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려면 먼저 그에 걸맞는 백성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 표시가 바로 ‘할례’였습니다. 이제는 자신들이 참으로 하나님 백성이라는 공동체적 신앙고백인 ‘할례’를 마치고, 가나안에서 맞이하는 첫번째 유월절에 그들은 드디어 약속의 땅에서 난 소출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호사다마'라고 했나요? 바로 그 날은 광야 40년 먹거리가 되었던 ‘만나’가 끊어진 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전까지 익숙했던 것에 변화가 생길 때 두려워하기 마련입니다. 이제 먹고 살 것이 생기기는 했지만, ‘만나’가 끊어졌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잘 해 낼 수 있을지, 먹고 살 수 있을런지’의 온갖 걱정으로 내몰았습니다. 이것도 있고, 저것도 가질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그들을 먹이시고 살리시는 ‘구원자’시라는 사실 만큼은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껏 하나님께서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방식으로 광야에서 먹이셨듯,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이들을 먹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첫 소출로 누리게 된 그들의 식탁은 염려와 두려움이 아닌 풍족히 먹는 만찬이어야 하고, 그 동안의 아픔을 씻어내는 기쁨의 축제여야만 합니다. 노예의식에 찌들어 살았던 그들, 세상의 물질과 권력앞에 주눅들어 살던 이들이 어깨를 펴고 살게 되었으니, 오늘은, ‘길갈’의 이름 뜻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수치와 고통을 굴려버리셨다'는 역사적인 기억으로 남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건져내신 백성이 다시 노예가 되는 것보다 수치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녀’라고 하기에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삶의 찌꺼기들은 모두 굴려버려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수치스러움을 수치스러움으로 볼 수 있는 기준과 눈이 필요합니다. 

     

    2.

    애굽에서 익숙해졌던 ‘육신의 잣대’와 ‘기준’은 자신들이 그 동안 노예로 살았다는 흔적들일 뿐입니다. 반드시 벗어내야만 하는 것들입니다.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그가 주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제 기준’을 강화하면서 살던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가 서신서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박해자였던 자신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마침내 예수를 ‘흠없는 어린양’으로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은, 이제는 ‘내가 보기에는’이라던가 ‘내 생각에는’으로 드러나던 ‘자아’이 아닌 ‘성령의 인도’를 근거삼는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잣대를 벗어내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할 수도 없으며, 십자가의 영광과 능력도 맛볼 수 없습니다. 별을 보려면 망원경을 사용하고, 몸속을 들여다보려면 그에 맞는 도구를 사용해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과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옛 기준과 방식으로는 살아낼 수도 없거니와, 흉내는 내려 애를 쓴다고 해도 그런 삶의 기쁨과 능력은 결코 맛볼 수는 없습니다. 믿음 생활이라던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기 위해 살아가는 방식,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가치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결국 우리가 나아가야할 곳은 다시금 예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 앞 뿐입니다. 육신을 살려내야 한다는 강요와 조바심으로부터의 해방은, ‘죽음’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듯, 우리 자신이 주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3.

    이 사실을 보다 구체적이고 시청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너무나 유명한 비유의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깨우치기 위한 것인데, 누구 때문이었을까요? 

     

    본문은 주님의 곁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몰려들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들이 몰려든 것은 주님의 말씀에는 위로와 평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습이 마뜩치 않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대에 의롭다고 자타?가 인정하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향해 불평과 비난을 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 누가복음 15:2b

     

    그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난과 매서운 눈초리에도 게의치 않고, 주님은 그저 당신의 말씀을 듣고자 찾아온 세리와 죄인들과의 흥겨운 잔치를 즐기고 계실 뿐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주님이 이 땅을 찾으셨던 목적이었던 사람들이었으니 얼마나 좋으셨을까요? 그러나 그 마음을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알 턱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저들은 그저 용납할 수 없었고, 사랑할 수 없는, 가까이 다가가기 싫을 만큼 혐오스럽고 더러운 사람들일 뿐입니다. 한번도 저 사람들을 찾은 적도, 안스럽거나 긍휼해 하는 마음을 품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기꺼이 그런 이들을 끌어안아주시는 주님이 불편했고 불쾌할 뿐입니다. 인애와 자비를 베풀라하셨던 계명을 지켜내지 못하는 자신들의 허물이 고스란히 들춰졌기 때문입니다.

    걷지 못하는 자가 일어나고, 보지 못하는 이가 보게 되고, 가난한 자가 살만해지고, 연약한 이들이 힘을 얻게 되면 누구라도 함께 기뻐해주고 축하해주어야 할 일인데도, 우리는 줄곧 속좁고 이기적인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저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마음 이면에는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자신을 의롭게 보려는 오만함이 도사리고 있을 뿐입니다. 

    ‘포비아’ (혐오)의 문화에 물들고 길들여지고 있는 우리 신앙의 모습이 이들과 닮아 보인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요? 마치 ‘누가 더 사납고 저주스러운 말을 던지는가?’로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려는 듯, 동성애자들을 향해 ‘더럽다 역겹다’는 혐오나 미움을 드러내는 것을 게의치 않습니다. 어떻게 동성애자들을 끌어안고 축복해줄 수 있느냐?며 축복기도에 참여한 목사를 반드시 출교하겠다고 으름짱을 놓고 저주하는 거친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는 곳은 안타깝게도 세상이 아닌, 교회안입니다. 비록 ‘원수’일지라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믿는다’라면서도, 오늘 교회는 ‘사랑’보다는 ‘증오’에 쉽게 휩쓸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주님 명령앞에서도,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주님을 가로막고 면박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우리를 보면서, 주님은 무어라 답변하실까요?

     

    4.

    주님께서 곧장 이어가신 '아비로부터 받을 유산을 챙겨 먼나라로 떠난 아들’에 관한 비유의 말씀은, 바로 이런 사람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아비로부터 받을 유산을 챙겨 먼나라로 떠난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탕자인 둘째 아들도, 그를 용납할 수 없던 첫째 아들도 아닙니다. 우리라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자신보다 재산에 마음을 두고 있던 몹쓸 아들을 용납하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비유의 말씀안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분명합니다. 어떻게 회개하고 회심할 것인가, 혹은 아버지의 은혜를 갚거나 혹은 더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즉 하나님은 얼마나 용납해주시는 분이신지를 깨닫는 겁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죽었던 내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며 아버지가 잔치를 벌입니다. 그 모습은 앞서 현실에서 세리와 죄인들이 찾아왔을 때 함께 먹고 마시던 주님의 잔칫상과 닮아 있습니다. 아버지가 둘째를 용납해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이전과 달리 근검하고 검소한 삶을 시작했기 때문일까요? 그도 아니면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일까요? 집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가 아버지에게 저질렀던 패역한 행동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을 뿐입니다.

     

    5.

    잔치는 누구라도 기쁨의 충만해야 할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잔치에는 함께 웃고, 함께 기뻐해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있고, 그리고 비유의 말씀에서는 첫째 아들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들이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돌아온 둘째를 위해 아버지가 잔치를 벌였다는 소식을 밭에서 일하다가 전해 들은 맏아들의 분노섞인 말입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 누가복음 15:30 

     

    온갖 방탕한 일에 유산을 낭비한 둘째에게 이런 대접이 부당하다는 불평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실재로 맏이는 둘째가 먼나라에 가서 창녀들과 방탕하게 살았는지 아닌지 알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알았다고 한다면 형이었으니 끌고라도 왔어야 마땅함에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 누가복음 15:29b

     

    맏이의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환대’ 때문만은 아닙니다. 자신에게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 주어져있음에도, 동생의 존재로 인해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아버지를 섬겨왔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아버지의 유산에만 마음을 담고 있었음을 그의 불평속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결국 이 이야기에서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아버지나 아버지의 마음에 관심이 없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접하는 우리도 그렇게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우리 모두와 다른 등장인물은 딱 한명, ‘아버지’뿐 입니다.

     

    6.

    하나는 제 멋대로 살고 싶다고, 차라리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좋다는 괘씸한 마음을 품었고, 다른 하나도 실은 그런 마음을 속으로 감추고만 있던 것 뿐입니다. 아들들은 아버지를 마음에서 버렸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그들의 아버지로서만 서 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 누가복음 15:24a

     

    아버지의 기쁨의 이유는, 오직 ‘내 자식’이라는 한가지 뿐입니다. 죽었다 살아났다는 것도, 잃었다가 다시 얻게 된 것도 말할 수 없는 기쁨이겠지만, 기쁨의 출발점은 오직 ‘내 아들’이기 때문인 겁니다. ‘내 아들’이기에 허물이 허물로 보이질 않고, 서툴고, 철 없음도 용납이 될 뿐만 아니라, 내것 전부를 주는 것 조차도 아깝지가 않을 수 있으니, 무언가를 더 해냄으로, 둘째보다 더 합당하다고 인정받으려는 우리 마음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자녀를 잃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며, 죄인을 위해 내어준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우리 삶에서 왜 잔치의 기쁨이 상실되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기뻐할 일이 없고 잔치가 없어서 비루하고 억울한 삶이라 생각했는데, 주님의 잔치를 거부하고 소외시켜 왔던 것은 정작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내가 누구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입어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잊은 채, 누리고 있는 모든 것 심지어는 베풀어주시는 은혜나 사랑 조차 하나님은 마땅히 그러셔야만 한다고 생각해 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가진 것이나, 저 사람이 누리는 것처럼 ‘나’ 아닌 ‘타자’가 누리고 있는 것이 합당한지 아닌지만을 가늠질하고, 제 자신의 삶을 비교하면서 주어진 행복을 갉아먹으며 살아가던 그 때에도, 하나님의 시선은 ‘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7.

    벌써 사순절 사주차를 맞이합니다. ‘사순절’은 ‘길갈’에 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이전까지의 하나님 자녀답지 못했던 수치들을 굴려버려야 했던 것처럼, ‘사순절’은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딱딱하게 굳은 마음안에 채워왔던 육적인 기준들을 굴려버리는 때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요? ‘너 보다는 내가 낫다’ 서로의 얼굴에 묻은 흙검댕이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우리를 하나님은 당신 아들의 피흘림을 용납한 사랑으로 덮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답지 않은 욕망, 두려움, 불신의 허물을 끌어안고 살던 우리의 모든 수치를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내셨습니다. 지난 주 1독서 본문인 이사야 55장의 말씀처럼 이제 우리는 악한 길을 버리고,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돌아온 아들처럼 주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됩니다. (사 55:7)

    주님께로 돌아가는 곳에는 풍성한 포도주와 젖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언제나 돈도 값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나온 이들 모두를 풍족히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합니다. 삶이 축제가 되는 복된 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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