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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4/10 사순절 제6주 종려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4. 5. 19:59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이사야 50:4-9a
    • 응송 | 시편 31:9-16
    • 2독서 | 빌립보서 2:5-11
    • 3독서 | 누가복음 23:1-49

     

    설교음원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설교영상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시대의 '십자가' 너머로

     

    1.

    오늘은 ‘종려주일’이며,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부활절이 한주 앞으로 다가왔지만, 적어도 주님을 따르며 살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예외 없이 이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야만 합니다. 어떻게 나무에 달려 죽으신 예수께서 우리의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을 구원하는 평화의 왕이 되실 수 있는 것인지, 모든 나라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답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십자가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언젠가 종말이 찾아올 때, 그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라는 식의 나이브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탓에 현실에서 직면하게 되는 예수의 모습은 무능하고 무력한 실패자의 모습일 뿐이고, 오히려 예수를 못박아 죽였던 로마 황제의 권위와 능력이 여전히 우리 시대의 구원자 인양 으스대고 있습니다.

     

    2.

    우리는 부활절이 오기전에 ‘십자가’를 너무 쉽게 기독론적으로 결론 내어버리려고만 합니다. 경배의 대상처럼 우러러 보면서도, 정작 그 앞에 머무는 것은 꺼려한 채 성급히 지나쳐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해서 ‘예수 사건의 핵심’은 살아남이 아닌, 죽음에 있을 뿐입니다! 애써 ‘부활’로 시선을 옮기고 싶어해도 열달의 수고가 없이는 생명의 환희를 맛볼 수 없듯, ‘부활’은 반드시 죽음이 서려있는 ‘십자가’를 통과한 너머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자체는 영광도, 기쁨도, 찬란함일 수도 없습니다. 그저 십자가는 짊어지는 이들에게 절망이고, 저주이며, 모욕과 처절한 고난일 뿐입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앞둔 사순절의 마지막 고개에서, 십자가는 바라보는 것이 아닌 짊어지는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앞에 서고 말았습니다. 용케도 그 동안은 피해왔지만 이 한주간 만큼은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1독서 구약 이사야서 본문은 ‘고난’의 한복판을 지나가고 있는 주님의 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고난 받는 종’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서 이사야가 직면해야만 했던 극심한 고난이나 핍박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말씀을 전하던 그가 비난 받아야 했던 이유는 오직 한가지 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면서 바벨론의 체제를 거스르던 그는, 바벨론 입장에서 보면 질서를 흔드는 불온한 선동가일 뿐입니다. 바벨론 세력들과 질서가 그를 가만히 두고 볼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같은 동포들의 비난 때문입니다. 별 불편함 없이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던 바벨론에서의 일상을 뒤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고, 멸시하고, 박해합니다. 이사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던 선지자들은 모두 어느 시대에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거짓 예언을 하는 자들로부터 오히려 ‘거짓 예언자’라는 조롱을 받아야만 했고, 그런 거짓 선동에 편승하는 이들의 비난때문에 억울하고 속상했던 사람들입니다.

     

    3.

    억울함이 쌓여 갈수록 삶은 자꾸만 서러워지고, 결국은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대한 자신감마져도 잃게 됩니다. 한두 번은 떨쳐내보려고 용기를 내어볼 수도 있지만, 그럴때마다 돌아오는 사람들의 싸늘한 반응은 부르심에 대한 깊은 회의와 좌절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혹시나해서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프랑스의 문학평론가인 '르네 지라르'는 사람들은 으레 스스로가 그릇되었거나 그런 선택을 했다는 책임이나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위험을 대신해줄 ‘희생양’을 찾는다는 이론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일단 희생양이 발견되면 사람들은 망설임없이 돌을 던지고, 욕을 퍼붓고, 비난하게 됩니다. 편을 들어주는 순간, 함께 돌을 맞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희생양으로 낙인찍힌 사람은 철저한 고립과 소외로 내몰리게 됩니다. 억울함, 절망,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은 씻을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일 뿐입니다. 우리에 의해 희생양으로 내몰려 십자가에 매달려야만 했던 그리스도의 눈에 맺혀졌던 세상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역시 ‘십자가’는 억울함이고, 모욕이고, 상처일 뿐입니다.  옳음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이가 당해야하는 모욕과 치욕이 십자가가 담고있는 메시지입니다. 지금도 이런 모욕과 치욕을 짊어진 이들의 십자가는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침공한 불한당 같은 이들이 강대국이랍시고 으스대고, 이들 때문에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죽음으로 내몰립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아픔을 대신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권력만 잡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불법한 이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오히려 시끄럽게 활보하고 다닙니다. 부동산 투기에 매몰되어 크고 좋은 아파트에 사는 것만을 갈망하고 그보다 못한 곳에 사는 이들을 우습게 여기는 졸부들 때문에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치욕을 당해야 합니다. 교세를 확장하고 큰 교회건물을 짓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세하는 것을 성공이라 외치며 작은 교회 목회자나 교우들을 깔보는 미숙한 이들 때문에 기독교가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권력에 아첨하며 승승장구해온 이들이 교계의 어른 행세를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릇된 길을 걷는 이들이 좁은 길이라도 정직한 걸음을 살아가는 이들을 조롱하고,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기쁜 땀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박탈감을 마치 상처를 후벼파듯 들춰내기도 합니다. 서러움 당하는 이들, 모욕과 치욕을 뒤집어 쓰고 살아가야하는 이들의 삶이야 말로, 우리 시대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모욕을 짊어질 것인지 적당히 타협하며 지나칠 것인지 선택을 강요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4.

    응송인 시편 기자의 외침이 마치 이 시대의 십자가로 내몰린 사람들의 처절한 외침처럼 들립니다. 

    내가 죽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으며, 깨진 그릇과 같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사방에서 협박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나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내 생명을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 시편 31:12~13

     

    시편기자를 짓누르고 있던 절망의 무게가 느껴지십니까? 울다지쳐 시력조차 잃었다고 하니(시편31:9),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절망 스러웠을지 헤아리기 조차 안타깝습니다. 시력을 잃었다는 것은, 맹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현실에는 한 줌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으니, 마치 시력을 잃어 보이지 않는 것 같다고 표현한 겁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이사야 선지자는 똑같은 절망의 현장에서 전혀 다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눈과 귀를 열어주셨다는 겁니다.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의 빛이 눈에 들어온 겁니다. 실낯같은 그러나 결코 끊어지지 않을 소망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 이사야 50:8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이제는 모욕을 당하거나 부끄러움을 당하여도 견딜 수 있다는 그의 말에서 무력함과 답답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임마누엘’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재로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경험이 부재한 탓입니다. ‘신앙’이란 결국 잘 먹고 잘 사는 길에 천착하려는 모든 시도를 뒤로 한 채, 구원에 닿기 위해 오직 여기에 계신 하나님 경험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의 신앙은 다시금 질문을 받아야 합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지금, 여기', 당신의 삶에 함께 하고 계십니까?

     

     

    5.

    오늘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께서 경험하신 모욕과 박해의 절정인 십자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의 마침표가 십자가에서 멈추어졌다는 사실은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십자가를 치장하거나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그저 ‘죽음’이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욕주고 치욕으로 떨어트리는 자리일 뿐 입니다. 물론 나는 이런 모욕을 경험하지 않고 있다고, 그러니 행복하다고 말하거나, 또는 정말 아무일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결국 그 누구도 자신의 앞을 지나쳐가게 두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주님이 직면하셨던 그 모욕과 죽음 앞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홀로 죽음앞에 서게 되는데, 그때는 누구도 나와 함께 해줄 수 없습니다. 버려진 것처럼 오직 홀로 죽음을 직면해야 하겠지만, 여전히 세상은 저들끼리의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안타깝지만 누구라도 이런 죽음의 폭력성을 거스르거나 거부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죽음앞에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고 해도, 죽음은 생명, 즉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향한 가장 치명적인 모욕과 상처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와 무엇이 달랐을까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는 숨을 거두셨다 | 누가복음 23:46

     

    이 한 말씀으로 인해, 죽음이 결론이 되어버린 세상에 대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버지께 맡긴다’는 말씀은, 이렇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염두할 때만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호흡이 멈춰지고 죽음이 드리워지면 끝이라 생각했는데, 주님은 진정한 ‘생명’이 영혼에 닿아 있음을 보고 계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몸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마10:28)라고 하셨던 말씀이 바로 이런 의미인 겁니다. 비록 육체가 무너지더라도 ‘생명’의 본질은 여전히 하나님 손에 달려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이 육체를 무너트린다고 해도 우리의 생명 자체는 파괴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더 이상 죽음의 공포에 내몰려 살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죽으면 그만’이라던가, ‘죽으면 끝’이라는 체념이나 공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미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의 ‘부활’이 있기에 죽음의 이빨이 제 아무리 사나워도, 그 입에 삼키워졌다고 해도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죽음앞에서도 마침내 십자가를 통과하고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이제 어떤 인생이라도 고난이나 불행, 죽음에 의해서 파멸당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겁니다.

     

    6.

    세상이 다 이런데 혼자만 그렇게 살면 뭐하느냐?’는 핀잔과 모욕의 목소리는 우리 밖이 아닌, 우리 안에서 훨씬 더 날카롭고 치열하게 들리는 법입니다. 이럴때마다, 속절없이 무서움, 두려움 또는 손해를 볼 지도 모른다는 근심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돌이켜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악의 형통함에 억울하고 선이 고통받고 서러움 당하는 모습에 서러워하다보니, ‘세상은 모두 그대로인데 나만 이러면 무엇하는가’ 싶은 허무에 사로잡힐 수도 있고, ‘세상이 다 그런데 왜 너만 그러냐?’는 비난 앞에서 내 길은 틀렸다고 무너질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자신의 뒤를 따라올 믿음의 사람들에게 오직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마음’, 즉 모든 것을 아버지 손에 맡기시는 ‘주님의 마음’만 본 받으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을 믿음으로 받아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제 아무리 노력을 하고 열심을 다하여도 결국은 살리시는 이는 하나님 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자기 스스로를 살려내야만 한다는 강요를 거부하고 절대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존’하려는 투쟁의 자리입니다. 믿음안에서 죽을 때,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서 죽음의 권세를 무너트리고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부활’을 실감할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허울좋은 신화처럼 잘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잘 죽는 길을 가르쳐줄 뿐입니다. 걱정이 앞서고, 두려움이 밀려오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인생을 투신할 때만 경험할 수 있는 생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7.

    세상의 힘 앞에서 가장 먼저 주님의 곁을 떠났던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나마 제일 마지막까지 곁을 맴돌던 이는 세번이나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가 전부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모두 떠나고 나자, 그 빈자리를 누가 채웠습니까? 숱하게 주님의 목숨을 노리던 대사제들과 수위대장들과 원로들이 마치 먹이를 발견한 굶주린 짐승들처럼 어린 양이신 주님의 곁에 몰려들었습니다. 힘에 겹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걷는 이들의 곁에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승리하는 것은  악이고 의로움이 이길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생각에 쉽게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악이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은 딱 한가지, 의인들이 주어진 길, 빛을 드러내야하는 생명의 길을 포기할 때 뿐입니다.

     

    한줌의 소망조차 보이지 않는 절망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신뢰하겠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나, 조롱과 박해 절망적인 현실속에서도 새로운 내일의 희망을 볼 수 있게 되었던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은, '내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겠다'던 예수님의 고백과 닿아있습니다. 이 고백은 ‘아직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고,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온 영혼과 삶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때 ‘죽음’을 뿌리치고 ‘부활’의 삶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는 온 생명을 하늘에 맡기고 십자가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의 마지막 고개인 고난주간의 길 끝에서, 초기 교회 공동체가 그리했듯 서신서의 그리스도 찬가를 함께 부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내실 줄을 믿습니다.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 빌리보서 2:8~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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