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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3 사순절 5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3. 31. 23:00
성서일과본문
- 1독서 | 이사야 43:16-21)
- 응송 | 시편 126)
- 2독서 | 빌립보서 3:4b-14
- 3독서 | 요한복음 12:1-8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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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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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되는 것만, '사랑'입니다
1.
고난주일을 한주 앞둔 오늘 배정된 복음서 말씀은 요한복음 12장입니다. 성서일과 ‘다’해에 해당하는 올해는 계속해서 복음서 말씀으로 ‘누가복음’을 읽어왔습니다. 본래 요한복음은 주로 ‘부활절기’에 배정되는 복음서 본문이고, 다만 마가복음이 복음서로 배정되는 ‘나’해에는 다른 복음서보다 마가복음의 분량이 짧은 탓에 요한복음6장이 연중 17주부터 21주일까지 배분됩니다. 그런데 오늘 사순절 5주에 왜 요한복음 본문이 배정된 걸까요?
주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마리아의 이야기를 똑같이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제자공동체에게 전하시는 특별한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26:13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마리아가 행한 일을 기억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녀의 이야기안에 사순절을 지나면서 지쳐가는 성도들에게 다시금 주님을 향한 바른 걸음으로 일깨워내기에 충분한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튼 무언가 기억하게 하고 교훈을 주려면 이 여인이 대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어야 하는데, 요한복음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사순절 5주에 복음서로 채택된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는 대체 마리아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그 안에 어떠한 가치가 담겨있는지를 발견해내야하는 숙제를 떠안게 된 셈입니다.
2.
주님과 마리아가 마주하고 있는 장소는 예루살렘 부근의 작은 도시 ‘베다니’ 입니다. 히브리어로 ‘벳’은 ‘집’이라는 뜻이고,‘가난하다, 비참하다’는 뜻의 ‘아니’로부터 나온 ‘아나니야’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이곳에 정착한 ‘베냐민’지파의 후손이름이기도 합니다. 벧과 아나니야가 합쳐져진 ‘베다니아’는 고난당하고, 슬픔이 가득한 이들의 집, 아나니야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마을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낫게 해주셨던 ‘베다니 시몬’이 나병환자였다는 사실을 종합해 보면, 아마도 ‘베다니'는 한센병, 나환자들이 모여사는 정착촌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에 나환자들이 유대 사회에서 얼마나 부정하게 취급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사람들 틈에서 쫓겨난 이들이 모여든 ‘베다니’는 말 그대로, 슬픔과 아픔이 가득 베어있는 ‘집’일 뿐입니다. 게다가 이곳은 개인적으로 마리아에게는 더욱 끔직한 아픔과 상처의 기억이 있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오빠가 갑자기 숨을 거두고 죽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요11:3)이었다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과 이들 사이에 오랜 친분이 있는 각별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재로 주님은 예루살렘을 오가실 때마다 베나디를 거쳐가셨고 마리아는 특별히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따라 수난에 대해 해주셨던 말씀이 자꾸만 생각납니다. 어쩌면 다시는 주님을 뵐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여자의 육감때문에 마리아는 불안해졌습니다. 죽었던 오빠는 살았는데 이제 그를 살려내신 주님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리고 슬퍼집니다. 적어도 자신이 알기에 주님은 죽음앞에서 돌아서거나 도망칠 분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주님의 제자들도 수난에 대한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을 전혀 마음에 담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기 싫은 마음에 부러 모른 척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 한걸음만 더 가면 예루살렘입니다. 이대로 예루살렘에 입성만 하면 주님께서 왕이 되실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이, 자신들도 한 자리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헛된 희망에 사로잡히게 했던 겁니다. 기대와 흥분으로 채워진 그들의 저녁식사는 덧없는 축제의 기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렇게 떠나보내고나면 다시는 주님을 뵙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온통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무엇을 해드려야 할까?’ 이 생각 뿐입니다.
3.
웃고 떠드는 소리가 한창이던 때, 잔치의 흥이 단박에 깨져버렸습니다. 말없이 방으로 들어온 그녀가 값비싼 향유인 ‘나드’를 주님 발에 붓고 닦아드렸기 때문입니다. 잔치를 즐기고 있던 이들의 눈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아드리는 그녀의 모습은 청승맞기만 합니다. 그녀의 행위에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향유를 쏟아 붓는 것도 그렇지만, 여인이 주님의 몸에 손을 대는 것도 규례에 어긋나는 불온한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깨어져 흘러내리는 향유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한 눈썰미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제자 유다가 그 모습을 견딜 수가 없어 대뜸 소리를 지르고 맙니다.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라는 그의 말을 통해서, 마리아가 쏟아붓고 있는 향유의 가치가 어림잡아도 이천만원이 훌쩍 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돈이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었다’는 유다의 날카로운 핀잔이 지나침이 없어 보일 만큼, 한번 쏟아붓기에는 이보다 더한 낭비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들먹이는 것은 속마음을 감추려는 그럴듯한 구실일 뿐, 그는 지금 ‘돈이 아깝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이 아무리 큰 돈이라도 그 돈으로는 세상의 모든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얼마전 광야에서 이백 데나리온으로도 한끼의 식사도 해결해 줄 수 없던 오천명을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먹이셨던 분이 있습니다. 쏟아지는 향유의 값은 번개처럼 계산해 낼 수 있으면서도, 자신들과 함께 하고 계신 주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재로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주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 당시의 표준화폐로서 은화는 ‘세겔’입니다. 한 세겔이 사데나리온에 해당한다고 보면 120 데나리온에 주님을 팔아넘긴 겁니다. 그러니 삼백 데나리온을 주님께 드림이 ‘낭비’라고 생각한 겁니다.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다보니, 주님마져도 돈의 가치로 보게 되었고 향유가 아깝다 여기게 된 겁니다. 요한은 그를 ‘도둑’이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우리들도 이런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랑도, 행복도, 그리고 신앙 마져도 ‘돈’으로 평가하는데 익숙해져, ‘물질의 복’을 받았는지로 잘 살고 있는지를 가늠하려는 어리석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유다를 닮은 모습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4.
유다 뿐만 아니라 잔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부어진 향유를 아까워했습니다. 바람이 있다면 그 군중들 속에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발견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분명 마리아가 보여준 ‘낭비’는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 삼자가 볼 때는 이해될 수 없는 어리석음일 뿐이지만, 사랑하는 당사자들에게는 아무리 많은 것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낭비’란 없습니다. 아까워하는 마음을 들키기라도 하면 그 순간, ‘사랑’은 곧바로 의심을 받게 됩니다. 잔치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고 그 중에는 고락을 함께 헸던 제자들도 있었지만,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낭비’하고, 주님을 사랑한 사람은 오직 마리아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오직 ‘낭비’할 수 있는 것만이 ‘사랑’이고, ‘사랑’때문에 ‘낭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요한은 그녀의 행위가 주님을 장사지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주님은 무덤에 묻혀 지워질 분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 하실 분이기 때문에, 기꺼이 낭비할 수 있는 겁니다.
서신서에서 만나는 바울도 엄청난 낭비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에, 히브리사람이면서 당대 최고였던 가마리엘 문하에서 배운 바리새파에 속하 사람입니다. 신앙적 열심이 남달랐으며 율법으로는 흠도 없습니다. 게다가 사회적으로는 로마의 시민권도 가지고 있습니다. 역시 ‘바울’입니다. 그런데 서신서에서 그는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자랑을 쏟아놓는가 싶더니 일순간 이 모든 것이 ‘오물’같다고 말합니다. 한참을 부러워하며 듣던 우리만 뻘쭘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의 말이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한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실재로 이 모든 것들을 누리며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던 그는, 정말로 형통하고, 세련되고 안락한 삶, 부자는 아니더라도 아쉬울 것 없이 살 수 있는 삶을 정말 배설물처럼 쏟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중요시여기고, 가치있다고 여기던 것을 다 버렸던 그의 낭비 앞에서, 가진 것 모두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초대를 등지고 떠났던 부자청년의 부담을 끌어안고 괴로워할 뿐입니다. 하늘의 기쁨을 누리고 싶지만, 도무지 황금 보기를 돌같이 여길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낭비’할 수 없기에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감동이 없고, 즐겁지가 않은 겁니다.
5.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그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었을까?’가 아니라, 먼저 이렇게 질문해야만 합니다. ‘대체 바울은 이런 모든 것들보다 좋았던 ‘무엇'을 발견했던 걸까요?’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 빌립보서 3:10
그는 말합니다. 누구보다 성공지향적인 열심주의자였던 그가 죄인이요 괴수이며,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 때문이었습니다. ‘지식’이라던가 ‘알게 되었다’는 말은 비로서 감추어져있던 주님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와 만난 경험이 그의 인생의 목표와 삶의 방향 자체를 몽땅 전도시켜 버린 겁니다.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 이사야 43:18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시고, 애굽의 말과 기병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일들을, 지나간 일, 옛 일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기억행위’이고, ‘성경’은 ‘기억’을 가르치는 책입니다. 그런데 왜? 그 놀라운 역사와 이적들을 기억하지 마라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불신하라거나 무시하라는 말이아닙니다. 조상들의 하나님 경험은 그들의 경험일 뿐입니다. ‘지금’, ‘여기', 나의 ‘오늘’에서 마주하는 하나님 경험이 없는 신앙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은 교리에 갇혀 있고, 지식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 일 뿐입니다. 실재로 하나님을 믿는다고하지만, 삶이 그렇게 무기력하고 기쁨이 상실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 경험이 열심있는 율법주의자였던 사울이 그리스도 경험을 통해 ‘바울’이 될 수 있게 하고, 아낌없는 낭비가 가능할 수 있게 했던 근거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게 되었으니, 이제 바울은 주님 때문에 삼백 데나리온 쯤은 기꺼이 낭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가 포기했던 그 무엇보다 주님이 귀할 뿐만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이가 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 기쁨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위해 누구보다 신바람나게 달려갔습니다. 멈추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도 없이 우직하게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거나 박해와 핍박이 있더라도 괜찮습니다. 지나왔던 과거를 돌아보고 후회할 틈이 없습니다. 바람처럼 ‘부활’을 향해 달음박질할 뿐이었습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까워하면서가 아닙니다. 참으로 기뻐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길입니다.
6.
신앙은 보이지 않는 주님께 제 삶의 중심을 내어드리는 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는 이들의 눈에, 마치 없는 것을 향한 낭비처럼 보이는 신앙은 낭비일 뿐입니다. 저들이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으면 걸어갈 수 없는 ‘낭비’의 길이니 아무나 믿을 수 없는 겁니다.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쏟아부은 마리아나, 세상의 것을 다 오물처럼 여기겠다던 바울의 상식을 뛰어넘는 고백도, ‘사랑’안에서는 마땅하고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고상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돈이나 명예, 세상살이 같은 것 없이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것이 값어치나 효용성이 없으니 다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이 모든 것들의 가치를 전복시킬 만큼 소중하고 귀한 겁니다. 그 동안 가지고 싶고, 부러워하고, 없어서 또는 가질 수 없어 괴로워했던 문제들을 떨쳐내지 못했던 신앙의 어려움은,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황금보다 더 귀하신 주님을 보지 못했던 것, 주님을 더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성경을 들여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신 일 중에 어느 것 하나, 우리의 기대나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효용성을 중시하는 우리들 눈에 주님이 행하신 일들은 모두 ‘낭비’하는 것들 뿐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분의 아까워하시지 않고 쏟아붓는 낭비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제 아무리 비싼 향유를 쏟아붓는다고 해도, 당신 아들의 피를 한방울도 남김없이 쏟아부어주신 향기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성전으로부터 시작된 물이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던 것처럼, 마리아가 깨트렸던 향유의 짙은 내음은 주님의 발을 타고 바닥을 적시고 마당으로, 거리로, 그리고 말씀앞에 있는 우리의 마음에까지 흘러들어옵니다. 제자들의 오만함이나 부산함 뿐만 아니라 불길한 두려움도 향유의 향기 앞에서는 맥을 못추고 사라진 것처럼, 우리의 삶을 덮고 있는 죽음의 흔적들은 오직 그리스도로 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에 잠기워야만 지울 수 있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마침내 쾌쾌한 죽음의 음습함을 지워내고 존재만으로도 가까이 하는 모든 것에 생명의 향을 전해주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것 입니다.
마리아의 작은 헌신이 짙은 절망과 두려움으로 사로잡히게 만드는 십자가로 향하는 길을, 인류를 구원해내시기 위해 쏟아부어주시는 은혜의 ‘마중물’이 되었던 것처럼, 주님은 당신만을 위해서 드려지는 우리 자신의 ‘낭비되어지는 삶’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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