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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1/22 주현후 셋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1. 18. 16:02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이사야 9:1-4

      응송 | 시편 27:1,4~9

    2독서 | 고린도전서 1:10 - 18

    3독서 | 마태복음 4:12 - 23

     

    설교음원

    http://naver.me/5ZvmLkyx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TPis1dxKL60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 Rembrandt van rijn, 1606-1669

     

    '회개' '하나님나라'

     

    # 01

    성서일과에서 1독서 구약본문은 복음서 말씀의 배경으로 읽혀집니다. 오늘도 ‘마태’는 실재로 ‘복음서’ 4장 16절에 구약본문인 이사야 9장 2절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고 있습니다.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 마태복음 4장 16절

     

    예언자 1이사야가 활동했던 기원전 8세기 초는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했고(BC 721), 남유다도 그 위협앞에서 불안했던 시기였습니다. 앗수르 입장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유다를 침공해 올 수 있는데다, 그렇다고 스스로 이 상황을 벗어날 능력도 없으니 유다 백성들의 두려움과 공포는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하고 폭력적인 이민족을 벌해주셔야 자신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언자 이사야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보복이 아니라, 오히려 ‘평강의 왕’을 보내주심으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 말씀의 기자인 마태는 예수님이야 말로 이사야가 전했던 바로 그 ‘평강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02

    1이사야가 예언활동을 하던 기원전 8세기의 ‘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찾아오셨던 당시도 ‘흑암’의 위세에 짓눌렸던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빛을 비추시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흑암’의 권세는 여전하기만 합니다. 누구도 스스로 선택한 적 없는 인생임에도 ‘욥’처럼 태어난 날을 저주할 수 밖에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루 아침에 해고를 당한다거나 건강이 깨어져 벼랑 끝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분들에게도 ‘흑암’은 실질적인 권세입니다. 사회적으로도 빈부의 격차는 자꾸만 커져가고 사람의 생명이 돈으로 평가받는 잔인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 나아질 조짐은 보이질 않습니다. 눈물이 멈추어지지 않는 이들도 참으로 많습니다. 갑작스러운 삶의 변화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이들, 부모를 잃은 아이들, 하루 아침에 거리로 내몰리게 되는 이들에게도, 현실은 벗어날 수 없는 ‘흑암’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제도가 개선된다거나 복지의 수준이 오른다면 ‘암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까요? 복지의 천국이라 불리우는 북유럽 국가들도 ‘천국’같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실재로 ‘천국’은 아닙니다. 그런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흑암’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이나 건강 같은 것만 있으면 쉽게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들이 채워져도 삶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허무와 결핍, 채워지지 않는 내면 때문에 삶이 파괴되는 것을 더 심각하게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모두 ‘빛’되시는 주님을 잃어버린 탓에 똑같이 ‘암흑’에 떨어진 신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분명해집니다. 사막에 떨어진 이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나 ‘소유’를 얼마나 더 가지고 있는지가 아니라, 한 모금의 ‘물’만 있으면 족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어둠을 밝히는데는 ‘돈’이 아닌, ‘빛’이 필요할 뿐입니다.

     

    # 03

    성경은 예수님을 ‘빛’으로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주님은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나, 동방박사의 경배를 받고, 나사렛에서 자라,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들어선 분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이런 정보의 나열들이 아니라,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대표적인 축구 선수인 손흥민 선수에 대해 그가 언제부터 축구를 시작했고, 어느 팀에 소속되어 있는지, 어떤 기록을 가지고 있는지와 같은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에 목사인 저에 대해 여러분은 비교적 잘 알고 계십니다. 비록 정보로는 모르는 것도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오랜 시간을 저와 함께 하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목회 철학이라든가, 제가 무엇을 믿고, 무엇에 인생을 걸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보의 나열로 생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 치면 당시에 주님을 박해하던 유대인들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믿으셨고, 무엇을 생각하고 선택하셨으며, 그분의 말씀과 사역이 선포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그분께서 십자가로 향하기까지 무엇에 운명을 걸었는지를 아는 것이, 참으로 예수님을 아는 겁니다.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 17:3

     

    그 ‘앎’안에 ‘영생’과 ‘구원’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앎’의 내용이 대체 무엇입니까?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 마태복음 4:17

     

    마태는 이 한문장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복음을 전하는 것에 생명을 걸으셨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주님의 말씀에 여러분의 심장이 뛰고 있나요? 기대와 소망이 넘쳐나고 있습니까?

     

    # 04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안에서 구원과 해방을 경험하려면, 먼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여전히 죽어서 가는 ‘공간’ 즈음으로 생각할 뿐, ‘하나님 나라’를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께서 증언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의 개념이 아닙니다. ‘공간’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 혹은 ‘다스림’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다스림’이라던가 ‘통치’라는 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드러난다는 것이고, 그 핵심은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는 현존성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은 너무 뻔한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믿는다고 해도, 실재로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럴때면 암흑에 사로잡히고, 절망하고, 무너지고, 생명이 파괴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임하였다거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심이 분명할 수록 스스로를 구원해내기 위해 조급함에 내몰리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삶이 깨어지고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누리고, 안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고, 또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임하였다는 것을 보고,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하는 일, 세상이 자랑하는 일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구원’이라면 하나님께서 로마 황제를 사용하셨을 겁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는 겁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기에, 내 삶에 함께 하시기에 만족을 얻고, 복이 되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저주받은 삶, 버려지고 깨어진 인생이라도 주님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빛’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을 발견한 사람이라면 더 이상 세상의 권세가 으스대고 자랑하는 것들 때문에 삶이 농락당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 05

    오늘 복음서 말씀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 마태복음 4:17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에 왔으니, ‘회개하라’ 이것이야 말로 핵심 중에 핵심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을, 그 동안 욕심을 부리고, 거짓말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혹은 반대로 친절이나 선행을 베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반성하라는 차원에서 이해하시면 곤란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기독교 신앙은 윤리나 도덕차원에서 좀더 세련된 사람, 좀더 종교적이고 거룩해 보이는 삶을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회개’ (메타노이아)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는 ‘복음’이 외쳐졌으니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에 부합하도록 삶을 전향하라는 초대인 겁니다. 그 동안은 ‘돈’이 주인행세하는 세상에서 ‘돈’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며 살아왔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세상이 왔음을 알게 된 이상 더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한다’가 아니라, 그렇게 살 수 없게 되는 겁니다. 

     

    19절 이하의 주님의 제자가 되었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회개’가 어떤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 19b

     

    어느날 불쑥 그들의 삶을 뚫고 들어오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던지신 말씀입니다.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를 잡고, 또 다시 그물을 기워야하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그들을 건져내시기 위한 주님의 초대에, 그들은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자신들의 ‘아버지’를 버린 후, 그들은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도 당신의 사람으로 불러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주님을 통해 얻고 채울 것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나,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도 제것 채우는 방식으로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주님을 믿으려면 그 동안 믿고 있던 것들을 버려야 하고, 주님으로 옷을 입으려면 제가 입고 있던 옷을 먼저 버려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직 주님의 것만 가치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 06

    어쩌면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이 지금의 내 삶과 무관한 뜬 구름 같은 이야기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 나라가 중요하다고 해도, 당장 이 땅에서의 삶의 문제를 허투루 대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밥도 먹어야 하고, 가정도 책임져야하고 이 땅을 살아가야합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 나라’를 향해 ‘회개하라'는 주님의 초대가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주님의 말씀을 덮어놓고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다보면 어떻게 해야 여기에 이미 임하였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인지, 자꾸만 마음의 부담이 커져갈 겁니다. 이런 부담은 귀한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갈급함이 여기에서부터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의 설교라는 것은 여러분이 ‘구원’을 위해 인생을 건 진중한 물음을 던질 수 있도록 세상과 예수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경계까지 인도할 수 있을 뿐, 그 너머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는 ‘나라’라던가, 공허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거기부터는 오직 여러분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정직하게 설 수 밖에는 없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보라’고 하셨던 그분께서, 정직하게 묻고, 구하고, 찾으십시오. 정직한 물음에는 반드시 정직한 답이 주어지는 법입니다. 그 길까지 우리는 그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도우심을 구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조바심 내지 않고, 각자에게 주어진 몫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기만 하면 그 뿐입니다. 준비된 때에, 어두운 눈을 밝히고 깨우치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나는 인생의 ‘빛’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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