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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1/08 주현후 첫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1. 3. 22:26

    성서일과 독서 본문

    # 1독서 | 이사야 42:1-9

    #   응송 | 시편 29

    # 2독서 | 사도행전 10:34-43

    # 3독서 | 마태복음 3:13-17

     

    설교음원

    http://naver.me/x1gIrbDt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rTU5-0YZPaI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땅'을 향해

     

     

    # 01

    오늘은, ‘주현후 첫주’ 주일입니다. 주현절은 교회사안에서 ‘성탄절’ 보다 오래된 기념일이었습니다. 매년 1월 6일, 성탄후 13일째를 ‘주현절’로 지키게 되는데, 동방에서 온 이방인 경배자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방문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동방박사들의 방문이야 말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성육신하여 오셨음을 알리는 증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대 중에 오래된 것에는 ‘동방박사’의 모습이 새겨진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다 대략 4세기 후반부터 교회 역사안에서 ‘대강절’과 ‘사순절’이 ‘세례’를 준비하는 절기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 사이에 놓여있는 절기인 ‘주현절’도 자연스럽게 ‘세례’와 연관된 의미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주현절기’에는 복음서 말씀은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장면을 주목하게 되었고, 교회 전통은 주님의 ‘수세주일’인 주현절을 ‘세례주일’로 삼아 왔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현후 첫주’를 맞는 오늘 본문안에서, 우리가 집중해야하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장면이며, 그 사건이 보여주고 있는 핵심 메시지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메시지입니다.

     

    # 02

    예수님 이전에도, 당시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유대 땅에는 곳곳에서 ‘메시아 운동’이라는 것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아’라고 주장하거나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번 세상을 바꾸어 보자는 것이었지만, 대부분 로마에 의해 학살당하는 비참한 결과로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나사렛 출신의 예수님만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믿고 있습니다. 성서일과 말씀은, 그 근거를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에서 찾고 있는 셈입니다. ‘세례’가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그 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알게 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해질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제일 먼저 알아야 하고 찾아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답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을 이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 주가 의를 이루려고 너를 불렀다. 내가 너의 손을 붙들어 주고, 너를 지켜 주어서, 너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할 것이니, 네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줄 것이다.’ | 6~7

     

    이사야의 예언에서 엿볼 수 있는 하나님은, 서럽고 절망스러운 형편에 떨어져 있는 이들을 지켜내실 뿐만 아니라, 그런 형편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심으로 ‘공의’를 이루어내시는 분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치하시는 방식입니다. 바로 이것을 알리고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이 해야할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종은 단순히 그런 소식을 전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말이 아닌, 삶으로 메시지를 드러냄으로 만민이 하나님을 알도록 해야만 합니다. ‘세상의 종’과 달리, ‘하나님의 종’이 해야할 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자신을 보내신 이가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안에는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호칭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람들의 물음에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답하신 적이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고 물었을 때에도, 주님은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신 ‘포로된 자’가 자유케 되고, ‘눈 먼 자’가 다시 보게 되고, ‘눌린 자’가 자유롭게 되고 있다는 예언서에 언급된 일들만 언급하셨을 뿐입니다. 주님은 오직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 03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며(사 42:3), 눈먼 자를 눈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자를 해방시켜주실 뿐만 아니라(7), 마귀에게 억눌린 자 모두를 고쳐주고 구원하는 일(행 10:38), 예언서와 사도행전 말씀이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기 하실 일들입니다. 생각하면 할 수록 마음이 뭉클해질만한 일들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그토록 원했고, 이루고 얻기 위해 몸부림 쳐왔지만 결코 우리의 능력으로는 얻을 수 없어 절망할 수 밖에 없던 것들입니다. 깨어진 세상, 억울한 삶, 형편없이 추락하는 것같은 서러운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지향하던 ‘성공’의 목적지가 바로 이런 일을 내것으로 경험하고, 또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늘 이런 ‘구원’을 이루겠노라는 가치를 내걸고 달려왔지만, 여전히 구원자를 발견했다거나, 그런 구원을 이루어냈다는 소문은 들리지가 않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서로들 평화를 내세우며 수 없이 많은 외교적 노력들을 경주하고 있지만, 여전히 세계의 평화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이 땅의 ‘평화 통일’에 대한 기대도 신화처럼 아득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정권이 ‘평화 통일’을 언급하지만, 실재로 ‘평화’를 이루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도덕주의'나 ‘윤리주의’도 한 몫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살고, 저런 식으로 살면 세상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하지만, 이런 것들은 늘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그 결국은 ‘가식’과 ‘정죄’로 떨어지고 맙니다. 제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덕을 행하거나 자선을 베푼다고 해도, 세상 모두에게 선을 베풀 수는 없습니다. 또한 손쉽게 그런 것이 가능할 때도 있지만, 제 자신의 형편에 따라 속절없이 불가능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상황이 좋지 않고, 여유가 없고, 힘들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귀찮아 질 수도 있습니다. 

    ‘종교’ 역시 동일한 함정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세속적 ‘열심주의’가 ‘거룩’이라는 옷을 입고, ‘성공신화’가 ‘복’이나 ‘은총’이라는 이름으로 탈바뀜되었을 뿐, 결국은 제 스스로의 종교심이나 구도적 활동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려는 몸부림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사이비 ‘메시아’들의 소문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열광하게 했던 거짓되고 사특한 신(神)들은 진리를 대면하는 순간 아침 햇볕아래 안개처럼 속절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 04

    애당초 첫 단추를 잘못 꿴 탓에, 그토록 ‘평화’를 원하고, ‘구원’을 갈망하지만, 개인이든 사회이든 우리는 늘상 ‘불가능’만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하나님이 보내시는 이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것인데, 자꾸만 제 스스로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이루어 내려고만 했으니, ‘자유’를 갈망하면서 오히려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겁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메시지들은 하나같이, 이처럼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 ‘하늘로부터’ 임하는 능력, ‘하늘로부터’오는 이를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건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나 ‘신앙’의 유무를 떠나, 조금만 정직하게 돌아보면 분명해질 수 있는 문제입니다. 애당초 ‘구원’이 우리 안에 있었다면, 구원받아야 할 형편에 떨어질리도 없었을 겁니다. ‘구원’은 우리안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뜻이 옳고, 힘을 다하고, 성실하고, 모두가 한 마음이 된다고 해도, 우리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외에 인류의 구원은 불가능할 겁니다. 오히려 이런 한계를 인정하는 곳에서부터 ‘구원’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내 손에 없음을 알아차릴 때에야 비로서 자기 밖에서 구원을 찾고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인류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것만이 최선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나, 눈에 보이는 그런식의 결실들은 늘 상대적이고 한시적인 것에 그칠 뿐이고, 오히려 더 큰 허무와 결핍, 차별과 소외가 야기되고, 탈진과 가식에 떨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니 이제는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수세의 장면’은 겉으로는 분명 세례 요한에 의해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례가 유효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하늘로부터’라는 사건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받는 세례가 될 수 있는 것은, 요한의 권위라던가, 구름 떼처럼 청중을 몰고 다니는 유명세에 달려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그저 ‘도구’였을 뿐, 이 세례를 온전케 된 것은 비둘기처럼 주님께 내려와 앉으신 ‘성령’에 의해서 입니다.

     

    # 05

    그날 강가에서 요한을 통해 세례를 받은 것은 비단 주님만이 아니었습니다. 수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았음에도, 복음서는 유독 주님께만 세례를 통해 ‘성령’께서 찾아오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는 분이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성령’이 임하셨다는 말씀을, 주님은 어떤 초자연적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이 세례의 핵심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셨다는 것, 하지만 그 일이 전혀 고압적이거나 압도적이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비워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는데 있습니다. ‘하늘로부터’의 핵심은, ‘연대’ 즉 ‘하나됨’의 정신이라고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허기사 세상도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긴 합니다. 아니 어쩌면 더 많이, 더 자주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의 ‘하나됨’에는 늘 소외되는 이들이 많고, 상처가 남습니다. 끼리 끼리의 하나됨일 뿐만 아니라, 늘 상대에게 자격와 조건을 요구하는 편협한 하나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됨은 다릅니다. 주님이 받으신 세례안에는 피조물인 인간 요한 앞에 자신을 무너트리는 자리까지 낮아지신 하나님의 마음, 스스로 한 몸 되어주시는 하나됨, 상대를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낮추시는 하나됨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하나가 되어주시기 위해 낮아지시는 길을 택해주셨으니, 우리는 또한 어디까지 낮아질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 조차도 진실되게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 물음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주님의 수세’사건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증표가 되었던 것은, 또한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낸다거나, 부름받은 교회답게 낮아지고, 사랑하고, 평화하게 되는 모든 가능성이 ‘하늘로부터’부어지는 능력에 기댈 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이 장면을 기억해내야 하는 이유, 성서일과 말씀이 ‘주현’의 절기에 이 본문을 가르쳐주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일들이 닿은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성서일과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과 놀라운 일들이 ‘하늘’에서만 울려퍼진다면, 우리는 또 서러워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바로 이 땅, 제게 찾아오는 시련과 환란에 힘겨워하고, 낯설어하고, 좌절하고, 무능에 무너지고 통곡할 수 밖에 없던 땅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늘로부터’라는 거룩한 종교적 수사 보다는, ‘땅을 향해’라는 위로의 말씀이 더 필요합니다.

    주님은 벌거벗은 몸으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그곳으로 나아가, ‘하늘로부터’오는 하나님의 구원이 저와 여러분의 삶을 향해 강림하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지금 이 시간 땅에 발을 딛은채 살고 있으나, 이제부터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 인해, 언제라도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고, 그들의 삶을 허둥거리며 쫓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이어져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앞에 내몰리게 되는 언제라도, 구원의 능력이 ‘하늘로부터’ 임할 것입니다. 이 약속의 표징이 되어주시고 세상 끝나는 그 날까지 이 약속을 지켜내시고자, 주님은 우리안에 찾아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땅의 것’으로 결론을 삼지 마시고, 언제나 ‘하늘로부터’오는 능력을 기대하십시오. 그 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주현절 첫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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